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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밥과 뇌관 결합작업을 벌인것은 사실이지만 도화선을 연결하진 않았다. 형식적으로 다이너마이트 인근에 연결된 것처럼 보이게 해뒀을 뿐이다.
만약 담뱃불이라도 떨어지는 날이면 광주시내가 온통 불바다가 될게 뻔한데 그런 위험한 일은 할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다이너마이트는
위협용이었지 사용돼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시민군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신만식
말그대로 시민군이 설치한 다이너마이트(TNT)는 자위용 무기였을뿐이지 실질적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는 반박도 있다.
5월 22일 목요일에는 시민수습위원회 대표 (시민군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 분소에 방문 항의 수습안을 전달하기도 한다
18시 00분에는 20사단이 통합병원 진입로 확보를 위해 1km 전진하며 사격을 하는데 작전 도중 지역 주민 8명이 사망한다
이 때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는 광주는 치안 부재 상태라며 방송했는데
당시 광주시민들은 시민 전체가 자발적으로 시민군에 협조했었고 백화점,금융가,상점가 약탈사건이 단 한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높은 치안력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남도청도 시민들의 협조로 정상적으로 운영 공무원들이 출근하여 일을 하고 그랬다.
5월 23일 금요일에는 시민 5만명이 도청광장서 집회를 하기도 했었다.
한편 5월 24일 토요일 13시 20분 11 공수부대가 원재 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 꼬마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4명의 어린이들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14시 20분에는 송암동에서 11 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 사이에 오인 총격전이 발생하여 9명이 사망했고 40명이 부상당하는 일도 ;
오인 총격전 직후 공수부대원들이 주변 민가에서 마을 청년 4명을 살해.
그리고 5월 25일 일요일에는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광주민주항쟁 구호 대책비 1천만원을 전달했고
5월 26일 월요일 5시 20분에는 계엄군이 화정동 쪽까지 진입했는데
8시 00분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은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농성동에서 죽음의 행진을 감행하기도 했다.
한편 시민군은 " 계엄군이 오늘 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 " 며 공식발표를 했고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을 귀가 조처했다.
5월 27일 화요일 D-DAY
2시 00분 계엄군이 광주에 진입했고
3시 00분에는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세요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도 있었으며
4시 00분 도청 주변이 계엄군으로부터 완전 포위
(당시 무려 2만 5000명이나 되는 계엄군이 동원됐고, 1만탄의 실탄이 배부)
4시 10분 2만 5천여명 계엄군은 시민군에게 최후의 사격을 했고
마침내 5시 10분 도청을 비롯한 광주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진압 작전 종료
피해자를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5명 행방불명자가 65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등의 기타 피해자는 1,589명
1988년 광주 청문회에서는 진압군 부대 지휘관들이 암매장은 없었다 진술했지만 진압에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2001년 비무장 민간인을 사살했고 암매장했다는 양심선언을 발표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0073135]
5.18 진압도중 사망한 경찰은 4명이고 군인은 23명인데 군인 사망자 23명중 13명이 자기들끼리 오인 사격을 하다 죽었다.
당시 사망자 165명 중 129명은 총상, 9명은 자상, 17명은 타박상으로 목숨을 잃었고
이들의 평균연령은 27.5세, 80년이후 평균생존기간은 13년 1개월로 나타났다.
청소년 사망자 41명 가운데 만 18세 미만이 30명으로 73%에 이르고 있다.
학교급별로는 대학생 13명, 고교생 11명, 중학생 6명, 심지어 초등생도 2명으로 조사됐다.
최연소 희생자는 두살배기 아이고, 최고령 희생자는 당시 72세였다.
5.18을 경험한 기자들은 이리 증언한다
동아일보 사회부 김충근 기자 " 젊은 여자,예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계엄군의 폭력은 더욱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가격하는 신체부위가 여체의 특정부위에 집중됐을 때 그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되겠는가 ? 백주겁탈,폭력만행,성도착적 무력집안 등의 여러 표현이 떠올랐다고 회고한다.
중앙일보 광주 주재기자 장재열은 5.18 당시 작성합 수첩에서 " 대검으로 찌르고 여자에게는 속옷만 입히고 마구 때려 폭행 집까지 쫓아 폭행 도망가는 시위대에 칼을 던졌다고 회고했다.
1980년 5월 25일 AFP 통신은 " 광주의 인상은 약탈과 방화와 난동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 며 전세계에 타진
프랑스의 언론사 르 몽드지의 기자 필립 퐁스는 80년 5월 27일 아침의 광주는 죽음의 도시와 같았고 그 때 상황을 학살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AP 통신 기자인 샘 제임슨은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1980년 광주의 3일간 군대 만행으로 빚은 희생보다 더 큰 것은 없었다. 군대의 만행은 이내 7일 간의 광주 사태로 치달았다.”라고 보도하면서 “대한민국의 거대 신문들은 광주 소재 (주)한국화약 창고의 다이너마이트 탈취 같은 시위자들의 과격한 행동을 강조했고, 군대의 잔인한 행동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수년 동안 많은 남한인과 몇 명의 미국인은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을 들춰냈다. 미국은 사실상 비난 또는 적어도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라고 5·18을 왜곡한 대한민국의 거대 신문을 비판했다
미국의 선 지의 서울 특파원인 블레들리 마틴 볼티모어는 “나는 지난 25년 동안의 기자생활 중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칭 등 사인방 재판, 그리고 인도의 인디라 간디 수상 암살 이후 폭동과 살인사건 등을 취재해 왔다. 그러나 나는 ‘광주’의 참상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건이 나의 기억 속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느냐고 누가 물어보면, 한 마디로 나는 ‘광주’라고 대답한다.”라고 증언한다 또 “광주항쟁 기간 동안 단 하루밖에 광주에 머물지 않았지만, 1980년 5월 26일 그날 하루만으로도 바로 죽음을 걸고 폭압에 맞서 투쟁했던 용감한 광주시민들의 모습이 나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광주야말로 나의 기자로서의 경력 중 가장 감동적인 경험을 제공해준 곳이었다.”라고 5·18을 높이 평가했다.
AP 통신 기자인 테리 앤더슨 (당시 LA타임스의 일본 지부 총국장을 지냈음)은 5·18에 대해 “5·18은 사실상 군인들에 의한 폭동이었다. 놀라움과 분노로 가득찬 시민들 앞에서 시위대를 추격하며 곤봉으로 때리고, 최루탄은 물론 총까지 쏘았다. 공수부대원들은 상점과 시내버스 안까지 쫓아가서 젊은이들을 잡아 끌어냈다. 광주는 분노로 일어섰다.”라고 진술했다
논쟁
1. 윤기권의 월북
윤기권은 광주 대동고등학교 2학년 재학생 신분으로 시민군의 대열에 참여해 총상을 입었는데 그 충격으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고 그 치료비 보상금을 받았고1991년 1월 광주 민주화 운동 보상금 수령 후, 노모에게 광주 보상금을 건넨 뒤 유럽여행을 갔다 영국대사관을 통해 북한으로 월북했다.
지인들은 “윤씨가 사람들의 긴 침묵에 괴로워했다.”라면서 5월 항쟁의 큰 충격은 감수성이 예민한 한 고등학생에게 11년이 지난 오늘 '월북'이라는 '돌연한 결과'를 가져오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2. 5.18 신원미상자 12명은 무엇인가
http://gall.dcinside.com/list.php?id=news_new&no=542370 들어가기를 바람.
3. 지만원의 <솔로몬 앞에선 5.18> 전격 해부 - asegaew.egloos.com/3411106
4. 광주교도소 습격은 진실인가
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64241
(光州=聯合)蔡熙宗기자 = 5.18 당시 光州교도소장이었던 韓道熙씨(70)는 14일 "시민군이 80년 당시 光州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계엄사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5. 광주 시민 중에 시위대 무기인 카빈에 맞아 죽은 사람이 더 많다?
보안사,안기부에서 발표문을 보면 카빈에 죽은 사람이 무려 88명이나 되며 이를 시위대 내의 자체 피해로 발표하였다.
이 것은 잘못된 자료인데 5.18 왜곡하는 사람들은 자주 언급하고 있다. 보안사에서 인용한 검시 자료에서 조차 카빈 사망자 숫자는 매우 적다.
당시 보안사의 검시에 참여했던 원광대학교 문형배 교수와 목사 2명 등의 증언에 따르면 m16에 맞아 죽은 사람은 폭도로 분류되어 연좌죄에 연루되고 정부에서 주는 사망자 보상금 400만원을 받지 못하였다.
그 사정을 알고 있는 검시에 참여한 의사와 목사 2명은 m16 사망자를 20명 까지 줄였다.
오히려 군에서 폭도의 숫자가 적다며 m16 사망자를 36명까지 늘렸다.
보상금과 연좌죄와 관련 없는, 광주검찰청이나 보안사에서 자체적으로 작성한 자료는 m16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5.18 검시 자료는 광주시,광주지검,보안사 등의 검시 결과가 있다. 각 자료 별 카빈 사망자 숫자는 다음과 같다.
광주시청 검시자료 - 12명
광주검찰청 -26명
보안사(기무사) 505보안부대 사망자 검시결과 보고 - 21명
각 자료 별로 카빈에 의한 사망 여부가 엇갈려서, 다음 3자료에서 모두 카빈으로 공통적으로 인정 된 사람은 8명 정도이다. 물론 이 8명 정도 남짓한 인원 중에도 카빈으로 사망한 것이 맞는 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시신들이 부패하고, 부검 절차가 복잡하여 정식 부검을 거쳐 작성된 자료는 아니라는 것도 문제다. 사입구보다 사출구가 크면 M16에 의한 총상,사입구와 사출구가 비슷하면 카빈에 의한 총상으로 분류하였다. 그렇기에 자료 마다 카빈 사망 여부가 엇갈리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가까이서 총격을 받았는가 멀리에 총격을 받았는 가에 따른 차이도 있기 때문에 완전히 정확한 자료는 아니다. 그렇지만 5.18 검시 자료들이 워낙 없기에 그나마 신뢰할 만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6. 오일팔에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자유북한군인연합의 횡설수설
실제로 사망자 손옥례,권근립씨등 8명의 사체에서 자상이 발견됐고 부상자 하헌 남,최승기씨 등이 자상을 입은 점 등을 종합할 때 당시 시위진압
현장에서 지휘관의 의사와 상관없이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대검이 사용된 사실이 인정됨.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8. 5.18 유언비어에 대한 논쟁 정리
http://seosa.egloos.com/5647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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