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백마 탄 백수
작가 : 이대리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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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편 재방송 잠깐, 혹시 내가 복권 당첨 사실을 알고서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얘기가 복잡해지는데.
그러니까 보라가 뛰는 뇬이고 그 위에 나는 넘은 난데, 다시 그 위에서 날고 있는 뇬이 보라니까..
으아앗! 복잡하다!
아니다. 그런 의심은 하지 않고 있는 게 분명하다.
만약 내가 알고 있다고 눈치챘다면 벌써 도망가고도 도망갔을 것이다.
아무튼 그녀의 맘을 100% 사로잡기 위해서 앞으론 좀 더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펼쳐봐야겠다.
아무리 안 좋은 추억이 있고 남자가 싫다 하여도 끔찍할 정도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나면 공든 탑 무너지듯이 한순간에 와르르르 무너져버리는 게 여자다.
다시 한번 눈사람 만들 듯이 머리를 데굴데굴 굴려봐야겠다.
한 대수, 힘내자!!
싱그러운 아침 햇살이 차창 밖으로 눈부시게 부서지고, 하늘은 바다처럼 새파랗고,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스쳐지나가고 있는 건 영화 속 날씨다.
맑았던 어제의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오늘 날씨는 꽤 우중충하다. 호랑이 장가가는 날씨인 것 같다. 아니, 여우가 시집가는 날씨 같다.
아니다. 둘이 결혼하는 날씨로 하자.
근데, 여기서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둘의 사이는 국경 없는 사랑이었나? 아님 불륜이었나?
둘의 관계는 도대체 무슨 관계였을까?
또 길어졌구나! 적당한 선에서 멈추질 못하냐!
연중무휴로 깔아둔 이불 위에 누워 창 밖으로 흐리멍텅 꾸리꾸리하게 떠있는 구름을 계속해서 올려보았다.
얼마 후, 시커먼 비구름만큼이나 어두운 표정을 한 얼굴이 서서히 구름을 가리며 나타났다.
그 얼굴은 비구름을 대신하여 잔뜩 비를 쏟아낼 것만 같은 슬픈 모습이었다.
[나 이제 누구도 믿기 싫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그랬어. 그래서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했는데, 요즘 어딜 가나 힘든 건 마찬가지 같애. 그래서 이제부턴 다른 일도 병행하려고.]
[아빠는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힘들게 고생만 하시던 엄마는 중풍으로 쓰러지셔 요양원에 계셔.]
그녀의 슬픈 눈망울이 아른거릴 때, 내 눈동자는 안약을 투여한 것처럼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곧, 넘쳐흐르는 눈물을 눈 밖으로 흘러보내야만 했다.
촉촉한 눈물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렇게 터진 눈물은 또다시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내 입에서는 애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라야, 몰랐어. 너가 그렇게 힘들게 살고 있었다는 거. 흑흑.』
그렇게 울고 있는 나의 모습이 거울에 생생하게 비취고 있었다.
너무나도 슬퍼 보였다.
그 슬픈 얼굴이 조금씩 찌그러지면서 어느새 비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요럴 줄 알았냐? 으함~ 졸립다. 졸려. 왜 하품을 하면 눈물이 나오는 걸까.』
하마처럼 크게 입을 벌리며 하품을 해댔다.
어제 보라랑 무리하게 데이트해서 그런지 피로가 멈추지 않았다.
그냥 내일 아침까지 자서 32시간 시체놀이 신기록 한번 세워볼까?
아니다. 이제 난 백수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시간 때우는 기록 달성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지금 태평하게 잠이나 자고 있을 시간이 없다.
가면에 탈을 쓴 그 여우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새로운 작전에 돌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뭐? 경제적으로 힘들다고?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엄마는 중풍으로 쓰러지셨다고?
나도 가끔 부모님 팔아먹긴 하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두 명 다 팔아먹진 않는다.
조상까지 팔아먹을 뇬!
날 떨어뜨리기 위해서 이런 양심 없는 연기를 펼치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어처구니가 없구나.
그나저나 이렇게 날 멀리하려 하는 그녀의 열길 물 속보다 들어가기 힘든 마음속으로 한번에 다이빙해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자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다.
누군가 내 등을 힘껏 밀어줘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좋다. 동이한테 파병요청을 해보자.
비디오방에 들어서니 동이네 엄마가 가게를 보고 있었다.
엄마와 친구로 지내시는 분인데도, 볼 때마다 굉장히 세련되고 젊어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안녕하세요? 동이는 없나요?』
『오랜만이네. 동이 영화보고 있는데.』
짜식~ 이 황금 같은 일요일날 혼자서 영화나 보고있다니, 왕따같은 넘.
『뭐 보는데요?』
『킹덤인가?』
킹덤이면 저번에 어떤 넘이 가장 긴 영화 달라고 했을 때, 동이가 5시간 짜리라며 내 주었던 영화인데. 정말 할 일 없는 넘이구나.
『참, 이 우대권은 뭐니? 아까 어떤 사람이 들고 왔길래 잘못 온 것 같다며 돌려보냈는데 자세히 보니 너희 센터 이름이 적혀있네.』
허걱~! 이건 내가 만든 쿠폰이잖아.
이 멍청할 넘! 엄마한테 말도 안 하다니!
잽싸게 동이가 있는 방으로 달려가 방문을 활짝 열어버렸다.
그러자, 미래의 어깨에 팔을 휘감고 있는 동이의 모습과 살짝 동이에게 앵겨있는 미래의 모습이 보였다.
빌려먹을넘! 킹덤 보는 이유가 있었구나.
내 귀에 먼저 들려온 목소리는 동이의 놀란 목소리였다.
『엇! 처.. 처남!』
『오모나! 오빠, 웬일이야?』
『처남 같은 소리하고 있네! 양동이, 너 이리 나와봐!』
동이 어머님이 볼까봐 화장실로 끌고 들어갔다.
근데, 지구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냄새가 내 허파를 자극했다.
변기를 보니 어떤 십센치가 떵 싸고서 물도 안 내리고 나갔다.
궁딩이를 빙빙 돌리면서 쌌는지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둥글게둥글게 몇 겹으로 쌓여있었다.
역겨운 냄새에 의해 목안에서 뭔가가 꿈틀거렸지만 참아야했다.
『야! 어떻게 된 거야! 너 엄마한테 쿠폰 말 안 했어?! 웁!』
『마, 맞다. 깜빡했다. 지금 바로 엄마한테 말할게. 미, 미안.』
『임마! 그러다가 회원들 다 캔슬나면 어떡하려고 그래! 내가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그리고 너, 왜 미래랑 여기서 영화 보냐. 웁!』
『주, 주말에 데이트하라고 했었잖아.』
헥헥! 그랬었구나.
근데, 난 떵냄새 때문에 구역질 나 죽겠는데 이 자식은 떵냄새를 마치 베르사체 향기로 흡입하는 듯 아무렇지도 않다. 혹시, 이 자식 작품인가?
『그러니까 내 말은 극장가서 보지, 왜 이런 좁은데서 보냐 이런 말이지. 헥헥!』
『헤헤, 난 여기가 더 편해서.』
편하기는! 니넘의 얄팍한 꾀를 내가 모를까.
미래랑 오랫동안 뒹굴러보려고 여기서 킹덤 보는 거 아니냐!
『참, 동이야. 부탁이 있다. 헥헥.』
『부, 부탁?』
녀석의 귀에 입을 붙이고 소곤거렸다.
귀 구멍에 오바이트 할 뻔했지만 끝까지 잘 참아냈다.
『어때? 어려운 부탁 아니지?』
『어, 어려운데..』
『임마, 너 예전에 공동묘지에서도 잘했고 박부장한테 전화해서도 잘했잖아.』
『그래도 이번엔 좀....』
『매제. 부탁할게. 나 사실 보라 좋아하는데 보라는 나한테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그래. 매제도 미래 좋아하니까 알 거 아냐. 미래가 무관심하다면 얼마나 힘들겠어. 도와줘. 매제도 파병 요청하면 내가 적극 지원해줄게.』
인류가 생존하기 부적합한 역겨운 떵냄새를 흡입하며 이렇게 긴 대사를 하고 나니 금방이라도 픽,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랬구나, 알았어. 하늘은 다른 사람을 돕는 자를 도와준다고 했으니 내가 도와줄게.』
멍청할 넘! 스스로 돕는자다! 어쩐지 요즘 조용하더라.
『하핫! 고마워. 매제. 혹시 내가 도와줄 일이라도 있어?』
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재빠르게 말하는 동이다.
『저, 저것 좀 내려 줄래.』
『으, 응?』
『저거.』
동이의 손가락 방향 끝에는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그 떵이 있었다.
허걱!
『그래. 저 떵은 내가 없애줄게.』
재래식 변기 한 가운데서 거대한 성을 이루고 있는 떵을 내려보았다.
지금까지 본 떵 중에 지름과 둘레와 굵기가 가장 컸다. 누군지 몰라도 분명 항문 찢어졌을 것이다.
대야로 물을 몇 차례 뿌려댔지만, 수 차례의 물세례에도 꿈쩍 않는 점도 높은 고 밀도 초강력 접착 떵이었다. 태풍 허리케인을 맞아도 꿈쩍 안 할 것만 같았다.
헥헥, 저 녀석이 아무렇지 않은 이유가 있었구나.
며칠동안 이 떵을 못 내리고 있다가 점점 중독이 되어 면역이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보통의 물 폭격에는 꼼짝도 않을 것 같다. 마지막 필살기로 승부를 봐야겠다.
화장실 문을 열고 최대한 원거리로 대피한 후, 대야에 가득 찬 물을 힘껏 공중을 향해 부웅~, 날렸다.
두꺼운 물줄기가 공중으로 슝~, 날라 가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충실히 따르며 변기를 향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근데, 그 강력한 물줄기가 거대한 떵을 강타하는 순간!
폭탄 맞은 집이 사방으로 파편을 날리듯이, 떵에서 황토색 파편들이 내 몸 쪽으로 사정없이 날라 왔다.
『으아악~~! 으아악~!!! 우웨에엑~!』
어젯밤 새로운 기록 두 개를 달성했다.
하루에 샤워 13번!
하루 물 사용량 2톤!
어젯밤 내 근처에 대패가 있었더라면 아마 대패로 살을 밀어버렸을 것이다.
중간에 떵 끊고 나온 기분보다 더 찝찝한 마음으로 집을 나와 센터로 출근했다.
박부장과 이팀장이 내 몸에서 낯선 향기를 느꼈는지 오늘따라 미팅도 일찍 끝내고 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떵 밟고서 남에 집에 들어갔다가 쫓겨났을 때의 비참함과 비슷한 감정을 맛봐야 했다.
영업을 나와 보라네 집 근처에서 동이를 만났다.
오늘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선 먼저 동이를 분장시켜야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준비해 온 소품들과 옷을 입혀 백발도사로 변신시켰다.
길게 늘어뜨린 백발에 덥수룩한 수염과 눈썹, 그리고 약간의 때가 묻은 너덜너덜한 한복에 기다란 지팡이를 든 모습이 지리산 꼭대기에서 자연과 동화되어 10년간 도를 닦다가 내려온 도사 같았다.
『너, 내가 어제 그 떵치우다가 떵물 뒤집어쓰고 밤새도록 샤워하느라 잠도 못 잔 거 알지?』
『응, 미안해.』
『내가 널 위해 내 몸까지 버려가며 도와줬으니까 너도 잘해야돼.』
『응. 최선을 다할게.』
『생방송이다. NG나면 안 된다!』
『휴, 아, 알았어.』
동이와 함께 보라네 집 앞에 숨어 보라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외출을 하는 보라가 보였다.
『앗! 나왔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침착하게 잘해.』
동이를 무대로 밀어 넣고 난 담벼락에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골목길을 걸어 내려오는 보라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곱추처럼 힘겹게 올라가고 있는 동이의 거리가 서서히 좁혀지고 있었다.
『쯧쯧, 인생은 일장춘몽이야.』
동이의 신들린 연기에 살짝 걸음을 멈추고 동이를 바라보는 보라다.
『할아버지, 저한테 말씀하신 건가요?』
앗싸! 먹혔구나!
『부귀영화는 한바탕 봄꿈에 지나지 않아. 쯧쯧.』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동이야! 파이팅!
『내 보아하니, 커다란 부귀영화를 쥔 것 같은데, 얼마 안 가서 다 잃게 될 거야. 허나, 남자를 잘 만나면 그 부귀영화를 놓치지 않을 수 있어. 어허, 주위에 그 남자가 있군.』
『칫, 뭔가 했네. 저 돈 없으니 그만 갈게요.』
그러면서 다시 발을 옮기는 그녀다.
앗! 동이야! 그냥 보내면 안 돼!
『이보게, 처녀, 이 노인의 말을 끝까지 들어봐.』
동이가 잽싸게 그녀를 따라가서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저 지금 바빠요. 그리고 돈도 없으니 다른데 가서 알아보세요.』
『내, 지리산에서 오늘 내려온 기념으로 무료로 해줄 터니 함 들어봐.』
『지리산에서 오셨다고 요?』
『허허, 지리산 흑곰보살이라고 들어봤나?』
미칠넘!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흑곰보살요? 무슨 조직에 계시다 오셨나요? 근데, 좀 수상하네.』
『수, 수상하다니.』
『아까는 곱추처럼 등이 굽었는데 지금은 저보다 더 크네요. 그리고 피부도 좋고..』
저 붕닭! 허리를 피면 어떡해!
『그,, 그건..』
『게다가 목소리도 조금씩 변하고 있고, 혹시, 사이비...』
아후! 걸리기 일보직전이구나.
잽싸게 등장하며 말했다.
『앗! 보라야! 여기서 뭐해?』
나의 갑작스런 등장에 전혀 놀라지 않고 동이의 표정을 수상히 살피고 있는 그녀다.
『하핫! 이 할아버지는 누구야? 아는 분이야?』
그러면서 눈빛으로 동이에게 교신을 시도했다.
빙닭아! 빨리 사라져!
그러나 나의 눈빛을 거꾸로 읽은 동이다.
『허허, 바로 이 청년일세. 이 청년을 잘 잡아야 3대가 편히 살 수 있어.』
아후~! 미칠넘! 빨리 꺼지라니까.
평소 때는 잘만 도망 다니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끈질기게 안 도망 가냐! 니가 또 날 엿먹이려는 거냐!
『씨퐁,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이것도 인연인데 같이 경찰서나 갈까요?』
그러면서 동이의 지팡이를 빼앗는 그녀다.
『보라야, 연로하신 할아버지한테 그 무슨 천벌을 소나기로 받을 짓이야.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얘가 원래 안 이러는 앤데... 하핫.』
이대로 있다가는 걸릴 것 같아. 강제로 보라를 끌고 골목에서 빠져 나왔다.
『쓰댕아! 저 사람 사기꾼이란 말야!』
『저 늙은 할아버지가 얼마나 먹고살기 힘들었으면 이런 짓을 하겠어. 그러니까 그냥 봐주자.』
『아는 사람이라도 되냐? 너답지 않다.』
『내가 노인정에서 화투판 깔아주는 사람도 아니고 저런 늙은이를 어떻게 알겠냐.』
『씨퐁, 저게 늙은이로 보이냐! 근데,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원래 황인종이 다 비슷하게 생겼어. 그러니까 그만 생각해.』
내 말은 들은 채도 안 하고 계속해서 허공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는 그녀다.
불안한 마음에 방해공작을 펼쳤다.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 할아버지가 터잡으시고~ 홍익인간 뜻으로 나라 세우니 대대손손 훌륭한 인물도 많아~』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노래를 랩으로 부르며 신나게 댄스 춤을 춰대자, 길거리에 사람들이 걸음을 늦추며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띵기리! 이게 다 그 멍청할 넘 때문에 생긴 일이다. 왜 허리를 펴서 일을 망치냐!
어제 떵 뒤집어 쓴 생각만 하면 쫓아가서 싸대기 100대 갈긴 다음, 똥물에 처박아버리고 싶다.
4절까지 노래가 끝나자 보라가 입가에 조소를 띄우며 말한다.
『너 지금 코미디 하냐?』
『하핫! 내가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잖아.』
다행히도 나의 적극적인 방해공작으로 기억을 못 찾아낸 것 같다.
휴, 큰일 날 뻔했다.
『여긴 왜 왔냐?』
『아, 일하다보니까 이 근처더라고. 어디 가는 길이였어?』
『음반 사러 가.』
『재즈시간에 틀 음악? 어디로 갈 건데?』
『교보문고.』
『정말? 이야~ 나도 오늘 광화문 쪽 가서 영업하려고 했는데, 같이 가면 되겠다.』
『어느 정신나간 놈이 광화문에서 여기까지 운동을 하러 오냐?』
『아, 광화문에서 일하는 직장인 중, 40%가 영등포에서 산다는 조사결과가 있더라고.』
『칫, 별 이상한 조사도 다 있네.』
『하핫! 그렇지?』
나의 자연스러운 말빨에 자연스럽게 그녀와 버스를 타고 광화문을 향했다.
이렇게 그녀를 졸졸 따라 다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자꾸 미운 정이 쌓이다보면 그것이 고운 정으로 등급 업 되고 또 그것이 사랑으로 등급 업 되기 때문이다.
'미운 정은 사랑을 키워내는 보약'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점수를 못 딸 바에야 이렇게 끈질기게 따라 다니며 미운 정이라도 쌓아야한다.
광화문에서 내리니 이라크 파병반대 촛불집회를 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모여 시끄럽게 농성 중이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깃발과 피켓을 들고 도로를 점령하여 차들이 꼼짝 못하는 상황이었다.
『참나. 더럽게 할 짓 없는 사람들이네. 백수도 이런 짓은 안 하겠다.』
『.....』
『보라야, 안 그래?』
『안 그렇다!』
『왜?』
『국가를 위해 놀고 싶은 시간, 쉬고 싶은 시간, 다 바쳐가며 헌신하는 게 할 짓 없는 거냐! 가서 도와주지 못할망정 비꼬지나 마라!』
으잉? 이렇게 흥분하다니. 혹시 유관순 할머니의 후손인가?
아무튼 나랑 사상이 많이 틀린 것 같다.
그렇다면 나의 사상을 잠시 바꿔야겠군.
『아, 내 말을 잘못 알아들었나 본데, 이런 식으로 인원수나 채우러 올 바엔 안 오는 게 낫다는 거지. 뭔가 열의가 없어 보이지 않아? 국가가 지금 위태롭게 생겼는데 저 정도로 농성해서 대통령 귀에 들리기나 하겠어?』
『칫, 입만 살아 가지고. 그럼 직접 해보시지 그러셔. 너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놈은 힘들걸?』
『참나. 너가 날 아직 2%밖에 몰라서 그러나 본데, 나도 국가를 위해 1인 시위하고 있다.』
『너 오늘 개그콘서트 하냐? 차라리 지구가 1주일 안에 멸망한다는 말을 믿겠다.』
하긴, 그 말도 틀린 말이 아니지.
근데, 가만 보니까 보라가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애국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애국자다운 멋진 모습을 보여줘서 100점 만점을 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다행히도 교보문고에 보라가 찾던 재즈음반이 다 팔리는 바람에 주문을 하고서는 내일 다시 오기로 했다.
신께서 나에게 절호의 찬스를 주시려고 재즈음반도 다 팔리게 하고 이라크 파병문제도 일으켜주셨구나.
그래, 낼 보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 곳에서 멋지게 1인 시위를 하는 거다!
보라는 레슨을 하러 센터로 향했고, 난 좀더 영업을 하고 들어간다고 뻥치고서는 혼자 집으로 왔다.
그리고 잽싸게 인터넷을 뒤져 이벤트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감사합니다. 고객의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프로이벤트입니다.』
『고객의 성공을 위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습니까?』
나의 무겁고도 진지한 말투에 뭔가 큰 거 하나 걸렸다는 듯이 상대편의 목소리가 활기를 띠었다.
『그, 그럼요. 액수만 맞는다면 못 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내일 광화문에 무장하고 있는 전경 열 명만 보내주세요. 그리고.....』
내일의 작전에 대해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자, 좀 힘든 의뢰라며 한숨을 푹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 되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비용이 좀 많이 들 겁니다. 괜찮겠습니까?』
『얼마나 듭니까?』
『200만원은 예상하셔야 합니다.』
허걱! 200만원이나?
좋다, 까짓 거 10억에 비하면 벼룩의 간의 적혈구의 헤모글로빈일 뿐이다.
식탁 위에 반짝반짝 거리고 있는 모친의 진주반지와 금목걸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대답했다.
『내일 오전에 입금시켜드리겠습니다.』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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