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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상하이 폭탄 의거 실제 동영상
* 위키백과 정보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시인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본명은 윤우의(尹禹儀), 호는 매헌(梅軒)이고,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교육 계몽 활동
청년 시절에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한 윤봉길은 농촌계몽활동, 농촌부흥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운동 등을 시작하였다.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였다. 1928년 부흥원 설립을 기념하는 공연인 우화 「토끼와 여우」의 공연과 월례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기사년 일기>(己巳年 日記)를 지었다. 이어 위친계(爲親契) 조직, 월진회(月進會), 수암 체육회 등을 조직하였다.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후에 이 정보를 일본 경찰이 입수하여 미행,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출옥 후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야채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金九)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일왕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 협의 끝에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폭탄은 도시락 모양과 물통 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폭탄을 도시락 및 물통으로 위장하려는데에 목적이 있었다. 당시 일본 일왕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으므로 일본측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공원에 입장한 후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천진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이 등장했고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열었다.
11시 50분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물통 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졌다.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다시 바닥에 놓아둔 도시락 폭탄을 집어들려는 순간 일본 헌병이 덮쳤다. 윤봉길은 팔목이 잡힌 채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쳤다.
홍커우공원에서의 폭탄 투척을 실행한 윤봉길은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2], 상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 등을 죽이고, 총영사 무라이,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에게 중상을 입혔다.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蔣介石)는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 투척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고, 이는 그 동안 장제스가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사형 순간
폭탄 투척 직후 체포, 곧바로 헌병으로 넘겨지면서 보다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제 대양환으로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金澤陸軍刑務所)에서 총살 당했다.
역사적 평가
만보산 사건으로 일본에게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중국의 주석 장제스는 이후 윤봉길의 상해 의거를 높이 평가하여 중국의 백만 대군이 이루지 못한 것을 윤봉길이 해냈다며 극찬하고, 이후 임시정부의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겸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이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병문화시킨 것의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윤봉길의 의거가 임시정부 지원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임시정부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 특히 윤봉길의 의거가 있기 전에 임시정부는 참 외로웠다. 장개석이 임시정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동전 한푼도 도우지 않았으며, 윤봉길 의거를 보고서야 장개석이 전적으로 도왔던 것이다”라고 회고하였다. 반면, 박헌영과 이승만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절하 했는데, 박헌영은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없는 극소수의 활동'이라며 윤봉길 의거를 부정적으로 평가절하였고, 이승만은 '이런(의거)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유언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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