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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60772
    작성자 : 깜지
    추천 : 33
    조회수 : 6263
    IP : 114.201.***.15
    댓글 : 43개
    등록시간 : 2013/11/24 06:02:53
    http://todayhumor.com/?panic_60772 모바일
    효녀심청
    “18세기로 들어서면서 조선 사회에는 기초적인 자본주의의 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해. 상품 유통이 활발해지고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상민들도 양반 못지않은 부를 축적하게 되었지. 이러한 과정 속에서 등장한 게 바로 부농이야. 그런데 니들 내 말은 듣고 있는 거냐?”

    교수가 말했다.

    “네.”

    맥없는 대답이 이어졌다. 교수는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좋아. 저번 시간에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 사회의 신분 구조가 급격하게 흔들리게 되었다고 말했을 거야. 상민들은 돈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신분 상승을 이뤄낼 수 있게 되었지. 특히 나중에 가서는 양반이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하게 되는 기현상까지 나타나. 하지만 여전히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것은 진짜 양반 출신들일 뿐 상민 출신의 양반들은 여전히 지방에 머무르게 돼.”

    그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말을 이었다.

    “자, 충분히 돈도 모았겠다. 양반 계급도 샀으니 누가 괴롭힐 일도 없겠다. 그럼 자연스럽게 뭘 하게 될까? 진숙이, 니가 말해 봐.”

    게슴츠레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여학생은 지적을 받자 놀란 듯 했다.

    “예......예? 저요. 글쎄요......아마 놀 것 같은데요.”

    “그래, 맞아. 노는 거야. 배부르고 등 따시면 자연스럽게 사람은 뭘 하고 놀지를 찾게 돼. 하지만 이들 신흥 양반들은 기존의 양반들처럼 한문으로 된 책을 읽거나 한시를 짓지는 못했어. 그럼 이들이 할 일은 뭐겠어. 문자가 필요없는 판소리를 듣거나 남사당패 공연을 보러 다니고, 한글로 된 소설 같은 것을 찾아 읽는 거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전하게 되는 게 바로 판소리계 소설이야. 그리고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늘 배울 심청전이야.”

    교수는 말을 마친 후 강의실을 훑어보았다. 수업이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태반이 졸고 있었다. 아마 흥미가 없는 것이겠지. 심청전의 내용을 모르는 대학생이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국문과라면 더더욱. 인신공희 설화니 어쩌니 하는 것들은 시험 전에 인터넷만 검색해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인문대학의 교육 수준이 암만 교양 쌓기 정도로 떨어지고 있다곤 해도 이 정도면 너무하다. 그렇다고 필수 과목을 너무 어렵게 만들면 아주 난리가 나겠지. 가볍게 한숨을 쉬며 교수는 책을 덮었다.

    “여기 심청전 내용 모르는 사람 있나?”

    교수가 말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없겠지. 그럼 이론은 나중에 유인물로 보고. 오늘은 딴 이야기를 해 보자. 심청이는 과연 효녀일까 아닐까? 응, 진숙아. 니가 먼저 말해 봐.”

    다시 또 지적을 받은 학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글쎄요. 아마 효녀라 보기엔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호오. 왜?”

    “우선 부모보다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은 불효인데다가, 심청이 죽으면 홀로 남은 심봉사의 봉양을 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실제로 맹인 잔치에서 심청이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심봉사에게는 불행한 사건들만 계속 터지기도 했고. 뺑덕 어멈 같은.”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때는 참신한 대답이긴 했으나 이제는 교과서적인 대답이다.

    “다른 의견은?”

    “전 효녀라고 생각합니다.”

    구석에 앉은 남학생이 대답했다.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는 것이 아침에 늦잠이라도 잔 모양이었다.

    “왜지?”

    “그 결과가 어찌 되었든 의도 자체는 순수했다고 생각해요. 선의에서 나온 행동이 잘못되어 부정적인 결과를 불러온다고 해도 그 의도 자체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심청의 행동은 순전히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고, 부처에게 죄를 짓게 하지 않으려는 목적에서 나왔다고 여겨지거든요.”

    “그래. 그것도 답이 될 수 있지. 그럼 또 다른 의견은? 앞서 나온 것들 말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없어?”

    “저요.”

    가장 뒷 자리에 앉은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평소에 자주 보던 얼굴은 아니었다.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아 출석부를 뒤져보니 역시나 복수전공자였다. 기계공학과라. 어쩐지 신선한 대답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는 효녀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유는?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요.”

    “괜찮아. 말해 봐.”

    “저는 아마 심청이 일부러 자살을 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흠?”

    “심청전을 읽어보니 심청의 나이는 당시 열 다섯이었습니다. 그리고 심학규의 나이는 결혼할 때가 20대 였으니 아마 늦게 잡아도 40줄 초반이겠죠.”

    “그런데?”

    “당시 여자 나이 십육세면 이미 혼기가 꽉 찬 나이입니다. 하지만 심청은 아버지를 봉양해야하기 때문에 모든 혼사를 거절하고 있었죠. 아직은 젊을 때니까 뭐 괜찮겠죠. 하지만 그게 5년이 되고 10년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심청은 노처녀로 평생을 늙어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언제 아버지가 죽을 지 모르니까요.”

    “그냥 혼인을 하면 되지 않겠나.”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미 동네에는 심청이가 효녀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후였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아주 이미지가 좋은 연예인이라는 거에요. 당시 혼인을 하게 되면 여자는 출가외인이 됩니다. 즉, 더 이상 아버지를 모실 수 없게 되는 거에요. 그럼 그 동안 아버지 봉양을 이유로 혼인을 미뤄왔던 심청의 이미지는 어떻게 될 까요? 아마 철저하게 무너지겠죠. 즉, 처음엔 효성에서 시작된 일이 나중에 가서는 그녀 본인의 발목을 잡는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버지를 봉양하면서 노처녀가 되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아버지를 버린 나쁜 년이 되는 것도 싫고. 결국 그렇게 아무것도 못하다가 늙어갈 자신의 인생에 회의감이 들었겠죠.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이 못난 아버지는 공양미 삼백석을 바쳐야한다는 말도 안 되는 약속까지 하고 말았으니 그녀 입장에서는 폭폭할 수 밖에요.”

    “결국 공양미 삼백석이 기폭제가 되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장승상 댁에 수양딸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그 때는 이미 수양딸 제의를 거절한 상황이었습니다. 다시 찾아가 받아달라고 하기엔 모양새가 영 말이 아니죠. 게다가 공양미를 그 쪽에서 갚아준다고 하더라도 남은 인생이 우울할 것임에는 변함이 없죠.”

    “흥미롭네. 그럼 왜 용왕은 심청을 살려준거지?”

    “답은 간단합니다. 이뻤으니까요.”

    강의실에서 실소가 터졌다. 하지만 그 기계공학과 학생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고전소설 중 어느 작품을 봐도 못생기면서 착한 인물은 없습니다. 박씨부인전이 유일할까 했지만 결국 나중에 가서는 아름답게 변하죠. 여기까지가 소설 내부에서 생각한 저의 진상입니다.”

    “내부라 하면...소설 외부적인 것도 생각해 둔 게 있다는 건가?”

    “예.”

    “그건 뭐지?”

    “이건 정말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는데요.”

    “말해봐. 방금 전 이야기도 상당히 괜찮았어. 만약 이것도 괜찮으면 다음부터 수업 안나와도 돼.”

    그러자 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사실 이것이 실화는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실화?”

    “예. 만약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을 마치 동화처럼 아름답게 꾸며놓은 것이라면 어떨까 하고 말이죠. 헨젤과 그레텔처럼.”

    “흥미롭네. 그럼 자네가 생각하는 진상은 뭐지?”

    “심청은 인당수에 몸을 던지지 않았다 입니다. 아니, 애초에 뱃사람 같은 건 없었다고 생각해요.”

    “왜?”

    “심청은 공녀 출신의 황후였으니까요. 심청전의 후반부를 살펴보면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중국의 송 시대라는 것을 알 수 있죠. 하지만 이것은 위장. 소설 속 ‘장 승상댁 마님‘의 승상이라는 직책은 고려 후기 원에서 설치한 정동행성의 최고 수장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최고 수장은 바로 고려의 왕이었구요.”

    교수는 학생이 가진 지식에 내심 감탄했다.

    “그래서?”

    “심청은 몰락하긴 했지만 엄밀히 상위 계층의 자식입니다. 그리고 원나라에 공녀를 납품하는 것은 바로 고려의 왕이죠. 자기 백성을 타국의 성노리개로 판다? 암만 몰락한 왕이라도 이건 체면이 말이 아니죠. 그래서 심청을 데려간 것이 승상이 아니라 비천한 뱃사람들이 될 필요가 있었다는 겁니다.”

    “위장이라는 거군. 그렇다면 뱃사람들이 아니라 실제로는 승상 댁. 즉 왕의 부하들에 의해 차출된 공녀다?”

    “그렇죠. 게다가 이후 심봉사에게 주어진 보상 역시 일개 백성이 받기에는 지나치게 과분한 양입니다. 뱃사람들이 심청의 효성이 갸륵하다고 쌀 2백석과 돈 3백냥, 무명과 삼베를 추가로 지급하는 건 솔직히 말해 오버스럽죠. 제 값의 수 배를 치르다니. 심청을 데려간 사람들이 일반 뱃사람은 아니었다는 거죠.”

    “그러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지?”

    학생은 잠시 숨을 골랐다. 교실 안은 어느새 정적만이 맴돌고 있었다.

    “장 승상댁, 즉 왕에게 차출된 상류 계층의 자식인 심청은 그대로 원나라로 갑니다. 그리고 황제의 눈에 띄어서 바로 황후가 되죠.”

    “그렇다면 맹인 잔치는 뭐지?”

    “공녀 출신의 황후는 정치적 배경이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기껏해야 자신을 추천해 준 소수의 대신들만이 그녀의 뒤를 받쳐줄 사람들이었던 거죠.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정통성, 즉 효심이나 충 같은 유교적 가치였던 거죠.”

    “허나 원나라는 유교 사회가 아니었어.”

    “하지만 충분히 유교에 영향을 받은 사회였죠. 원나라가 멸망하게 된 계기 중 결정적으로는 명의 탄생이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중원인들의 사상에 감화가 되어 내부적으로 약해져 있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설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교적인 가치가 그들 내부에서 충분히 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구요.”

    그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이유로 심청은 자신의 위치가 확고해지기 위해서는 효라는 유교적 가치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 고국의 아버지를 불러달라고 황제에게 요청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문제라니?”

    “바로 심봉사의 사망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재밌는 것이 심청이 팔려간 이후 심봉사의 재산은 날로 늘어갑니다. 황후를 뒷배경으로 둔 아비의 힘이죠. 그리고 여기서 뺑덕 어멈이 등장합니다. 뺑덕 어멈은 날로 늘어나는 심봉사의 재산을 보고 들어온 첩이죠. 그리고 이어진 황제의 부름. 소설 속에서는 맹인 잔치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만. 어쨌건 심청의 아비는 수도로 떠납니다. 그리고 중간에 황봉사가 등장하죠. 바로 뺑덕 어멈을 빼앗아가는.”

    “황봉사가 왜?”

    “고려에서 원의 수도까지는 엄청난 거리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모두 안전한 것은 아니구요.”

    “마적떼군.”

    “그래요. 뺑덕 어멈은 심학규의 첩인데 이 첩을 빼앗겼다는 것은 바로 마적떼를 만나 가족과 재산을 빼앗겼다는 것이죠. 그리고 목숨까지도.”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맹인 잔치에 등장한 심학규는 뭔데?”

    “심청은 심 봉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원나라 내에서 실제로 그의 아버지를 본 사람은 없죠. 그래서.”

    “그래서?”

    “가짜를 만들기로 한 거죠.”

    “대리인을?”

    “그래요. 잔치 마지막 날에, 그것도 거지 꼴로 도착한 아버지. 충분히 마적단에게 시달림을 당한 인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장님이 눈을 떴다는 건 뭘까요. 즉, 처음부터 두 사람은 동일 인물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완전한 별개의 인물을 자신의 아버지로 위장시켜 등장시킨 거죠. 실로 극적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섬뜩하지. 하여간 자네 말대로라면 심청전은 그 모든 사실을 숨기기 위해 지어낸......”

    “위장이라는 겁니다. 정적들이 제기하는 의문들을 일소시키고 황후를 천상의 선녀처럼 여기게 하기 위한.”

    “그렇다면 그 가짜 심봉사는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글쎄요. 잠시 이용당하다가 어디서 독살이라도 당했겠죠.”

    시계를 보았다. 수업이 끝날 시간이었다.

    “좋아. 여기서 수업 끝.”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흩어지기 시작했다. 교수가 학생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설마요. 그냥 지어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렇겠지.”

    “그래요.”

    “하여간 재밌었네. 자네는 다음부터 수업 안 나와도 좋아. 시험에 백지만 내지 않는다면야.”

    그렇게 말한 후 교수는 자리를 떴다. 잠시 창 밖을 바라보던 학생은 이내 책들을 가방에 챙긴 후 밖으로 나갔다. 강의실은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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