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생존해 있는 한 위안부 피해자인 박영심 할머니가 일본군의 끔찍한 만행을 증언했는데,
박 할머니가 증언하기를
"일본놈들이 어느날 `너희들이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있으니 오늘은 고깃국을 대접하겠다'면서 고깃국을 주었다"면서 "영문도 모르고 다 먹었더니 놈들은 그 고깃국이 `조선처녀의 고기로 만든 국'이라며 껄껄 웃어댔다"고 말했다.
박 할머니는 "(일본군은) 저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 던 처녀를 죽여 가마에 넣어 끓였다고 했다"며 "일본놈들은 정말로 짐승같은 놈"이라며 치를 떨었 다. 그가 위안부로 끌려간 나이는 17살 때(1938년) 였다 박영심 할머니는 일찍이 어머니가 사망하고 계모와 탄광 인부로 일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다가 14살 때 평안남도 남포시 후포동의 한 양복점의 식모 로 팔려나갔다.
그러다가 1938년 3월경에 일본순사가 나타나 "좋은 일자리가 있으니 소개해 주겠다"고 해 "부모님 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저항했으나 다짜고짜 기차에 실어 어딘가로 데려 갔다. 그 곳은 중국 난징(南京) 이였는데 난징에는 일본군 병영들이 많았으며 그 병 영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금수로 위안소'가 있 었다. 위안소는 3층으로 된 벽돌집이었으며 각 방의 크기는 가로 세로 2X2.5m로 방에는 침대가 하나씩 있었다고 하며 방에 들어서자 소름이 끼쳤으나 앞으 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몰랐지만, 잠시 후 일본 군인이 방에 들어와서야 무엇을 당하는가를 알아차 렸으나 절대로 응하지 못하겠다고 저항했다, 그러자 일본군이 자신을 마구 때리고 차면서 마지막에는 긴 칼을 뽑아 목에 들이대고 "이래도 응하지 못하는 가"라고 위협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날부터 하루에 일본군인 30여명을 대상으로 성노 예 역할을 해야만 했으며, 하도 힘들어서 응하지 않 으려고 할 때도 여러 번 있었는데 그들은 다짜고짜로 때리고 차고 때로는 칼로 찌르기도 하면서 강간을 당 했다고 한다. 박영심 할머니는 "힘든 생활이 계속되 어 아편을 먹고 견뎌보려고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 었다"며 "죽을래야 죽을 수 없고 살래야 살 수도 없어 정말로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조선신보는 박 할머니가 중국 내의 여러 위안소에 끌려다니다가 광복을 맞아 한 중국인의 도움으로 고향에 돌아왔으 며 그후 박 할머니는 자궁을 들어낸 데다 심장판막과 신경쇠약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하며, 특히 박 할머니는 지금도 한밤중에 그때의 일이 머리 를 스쳐 지나가면 흠칫 놀라 잠에서 깨어난다며 "원한을 풀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증언했 다.
그알 보려고 스브스 틀었는데. 강제 성 징용 할머님들 이야기를 보고 있어요. 할머님들 이야기에 분노하고 또 위로하는 사람들 보고 누군가는 그래서 니가 뭘할수 있는데라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자가 무얼 하는게 아닙니다. 우리 세금이 우리 사회가 우리 정부가 해야지요. 세금과 관심과 투표에 우리의 책임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론 할머님들보고 창녀라고 자발성위안부 라고 능욕하는 사람들을 질타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