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터넷 커뮤니티, SNS 등에서 '헬조선' 코드가 급부상했다. '헬조선 드립'은 이제 가상 공간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헬조선은 '헬(Hell)'과 '조선'의 합성어로, '지옥 같은 한국'을 말한다.
그런데 이 헬조선 코드는 단순히 '혐한'이 아니다. 한 헬조선인(헬조선 코드를 공유하며 현 상황을 자조하는 사람)은 "헬조선을 지옥과 비교하는 것은 지옥에게도 실례"라고 말한다. "지옥은 적어도 죄 지은 자가 벌을 받는 곳인데, 한국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거다. 그래서 헬조선인들은 "죽창을 달라!"고 외친다. '죽창 앞에선 평등하니까'.
헬조선이란 말은 디시인사이드 게시판 중 친일·혐한 성향이 강한 역사갤러리(역갤)에서 처음 유래했다. 이후 타 갤러리들에 퍼졌을 당시에는 갤러(갤러리 유저)들 간의 다툼이 심했다. 우리나라를 어떻게 그렇게 비하할 수 있느냐는 요지였다.
그런데 지겹게 싸우다 보니 단어가 주는 느낌이 강렬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현재 나라 꼴을 돌아보면 정말 '지옥이 맞는 것 같다'는 역발상이 누리꾼들 사이에서 생겨났다. 한 갤러는 이런 분위기에 대해 "(이 나라는) 이제 실드 쳐주기도 지겹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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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조선의 군대. 헬조선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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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커뮤니티를 많이 애용하는 이들은 2030세대이다. 결국, '헬조선' 운운하는 청년들의 감성은 나라 꼴 자체에 대한 울분과 냉소인 셈이다. 디시인사이드에는 '헬조선의 현실.jpg' 하는 식의 제목을 단 풍자물들이 자주 올라오는데, 면면을 보면 한국은 매우 피곤한 곳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닦달하는 주입식 교육, 느닷없이 끌려가 개고생하는 군대, 취업 못해 그냥 노는 청년들, 요원한 결혼과 육아 등 노력해도 잘 되는 게 없다. 의무는 많은데 권리는 적고,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없는 곳이라는 거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잘 보이는 구조도 아니고(콘크리트!), 기득권은 뻔한 꼼수들로 국민을 기망한다.
헬조선인들이 죽창을 외치는 이유 |
▲ 헬조선 관련 키워드로 탑시(TOPSY)에서 트윗 건수를 조사한 결과다. 조사는 2015년 8월 4일 01:15분을 기점으로 과거 30일 간을 기준으로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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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지옥이다'라는 헬조선론에 대한 일각의 비난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헬조선'을 말하는 이들에게 '혐한' 프레임을 씌워 본질적 문제가 아닌 과장의 문제로 몰아가는 것. 이때 헬조선인들의 고통을 전 세계 자본주의 추세에서 지극히 평범한 것으로 눙치며, '노력'을 더 하라는 고전적 논리가 덧붙는다.
둘째, 이들이 정작 구조를 바꾸기 위한 저항 '노력'을 하지 않는다 가르치려 드는 것. 헬조선인들에게 "헬조선 기사에서조차 '노오력' 하라는 말을 보게 될 줄이야. 암 걸리겠네"라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이 비난들은 헬조선인들의 의식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분석들이다. 위 그림은 트위터에서 최근 30일간 '헬조선 관련 키워드' 통계를 분석한 결과다. '꼰대', '노오력'(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노력 탓으로만 돌리는 걸 비꼬는 말), '죽창'이란 단어에 주목하자.
청년들은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능력만큼 인정해주지 않고 좌절이 반복되는 사회 현실 앞에서 환멸과 자조를 느낀다. 그러나 각자의 성향에는 차이가 있다. 일부는 친절마저 스펙이 된 사회에서, 자신의 감정을 내면으로 숨기고 친절을 가장한다. '센 놈에게 붙으려면' 바짝 엎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응어리진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분출되어야 하기에, 인터넷에서 과감하게 표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좌파 등에게 분풀이를 해봐야 처지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순응을 위해 억지로 끌어온 논리들도 '적나라한' 현실 부조리 앞에서 무력해질 뿐이다. 아니, 무엇보다 더는 감정을 응어리로 만들어 마음에 가둬둘 공간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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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에서 추천을 가장 많이 받은 게시물들을 모아놓는 '일간베스트' 게시판에 올라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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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위기는 심지어 극우 성향으로 분류되기 일쑤였던,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아래 일베)'에서도 감지된다. 한 '일게이(일베 게시판 이용자)'가 금속노조 사진을 올리며 "시위 재밌어 보이지 않냐?"고 묻는다. 이 글은 호응을 많이 받아 '일간베스트' 게시판에 등재된다. 댓글 반응이 눈길을 끈다.
다른 일베 사용자가 "노조가입자 80% 이상이 전라도 사람이다"라며 지역혐오 발언을 하자, 작성자가 웹툰 <송곳>의 "(인간에 대한) 존중은 힘에서 나온다"는 대사로 맞받아 친다. 그러면서 "영국 노동자들이 시위해서 여기까지 온 거니까 앞으로 처우 개선을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우리가 알던 그 일베가 맞나 싶은 반응이다. 물론 다른 게시글들을 보면 일베 특유의 분위기는 여전하다. 그러나 '메르스 파동'과 '최저임금 논란'을 겪은 후 일베에서 부쩍 기득권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일베 너머 SNS나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까지 가면, 더 전위적이다. 헬조선인들에게 대한민국은 차라리 '망한민국'이기 때문이다. 이민 즉 '탈조선(탈출+조선)'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가능해도 마땅한 기술과 재력이 없다면 허망한 결과를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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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조선 최근 개설된 헬조선(www.hellkorea.com)의 대문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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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헬조선인들을 결정적으로 열 받게 하는 건 무시와 조롱을 일삼는 '꼰대'들이다. 최근 개설된 인터넷 커뮤니티 '헬조선'의 대문 그림은 꼰대들이 어떻게 헬조선인들의 신경을 긁는지 잘 보여준다.
청년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희망이 없어 분노하고 있는데, 눈치 없이 "노오력은 해봤나?" 하는 식으로 무시하거나 "마음에 안 들면 북한으로 가라(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식의 고전 논리)"고 조롱하는 꼰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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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조선 청년들의 논리구조 헬조선의 청년들은 노력의 굴레에서 반복적인 좌절을 겪으며, 자조감과 환멸감이 증폭되고 이는 사회에 대한 풍자로 승화된다. 여기서 그들의 신경을 긁는 꼰대들은 울분과 모멸감을 불러일으킨다. 울분과 모멸감은 존엄성을 인정해달라는 인정투쟁으로 이어지고, '죽창'으로 표상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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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정작 이 나라를 떠나겠다고 하면, "애국심이 부족하다"며 물고 늘어지는 꼰대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들어봤다면, 이미 헬조선 계급의 최하층인 '흙수저'나 '똥수저'에 해당한다. 어쩔 수 없이 울분의 심정으로 '죽창'을 집어들게 되는 셈이다. 왜 죽창인가? 헬조선인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헬조선은 계층 이동의 기회가 평등하다면서도, 금수저는 아이템전이고 흙수저와 똥수저는 노템전(아이템 없이 치르는 게임 속 전투)인 나라다. 그리고 똥수저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아이템은 죽창이다.""죽창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누구든) 죽창 한 방이면…."'헬조선인들'을 욕하지 마시라 |
▲ 비주얼 노벨 게임 <페이트 할로우 아타락시아>를 '헬조선'과 전봉준에 빗대어 패러디한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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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 지금 헬조선은 좌우를 막론하고 감정을 꾹꾹 누를 수 없는 한계에 직면해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 모여든다. 하나같이 '울분'이라는 감정에 포섭되고 있고, 이것은 '죽창'으로 표상된다. 죽창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존엄하다(人乃天)'는 평등사상으로 분연히 일어선 녹두장군 전봉준의 무기는 죽창이었다. 반면 헬조선인들이 좋아하는 무기는 '풍자물'이다. 전봉준이 기득권에 대항하기 위해 대나무를 깎아 죽창을 만들었다면, 헬조선인들은 각종 소재들을 갈무리해 풍자물을 만든다.
그리고 이를 인터넷에 올려 서로 공감한다. 이때 "노오력은 해봤나?"라는 꼰대질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 이상으로 신경을 긁을 뿐이다. 고통스럽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다. 이 나라의 꼰대들이 생각을 좀 달리해야 할 이유다.
"패배는 죄가 아니요! 우리는 벌을 받기 위해 사는 게 아니란 말이요!" ― 웹툰 <송곳> 중 고구신 노무사의 대사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물화>(악셀 호네트 / 나남출판 / 2006)
<윤리적 노하우>(프란시스코 J. 바렐라 / 갈무리 / 2009)
<인정투쟁>(악셀 호네트 / 사월의 책 / 2011)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열광의 감정동학>(김학준 / 서울대 학위논문(석사) / 2014)
<헬조선-디시위키>(2015.8.3 최종버전)
<헬조선-나무위키>(2015.8.3 최종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