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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이 있는 누군가를 오랫동안 혼자 사랑해본 적이 있나요
비가 내리면.. 눈이 내리면, 문득 니가 떠올라.
비가 오던 어느 날 우산 없이 학교 건물 안에 있던 때 우산을 들고 서 있던 너의 모습, 눈이 몹시 내리던 날 작은 눈사람을 만들어 차 본네트 위에 올려
놓고 나란히 앉아 있던 네 모습. 1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문득 떠올라.
우린 인터넷으로 만났지. 학교 폭력에 시달려 학교에선 친구 하나 없어 한마디도 못하던 내가 채팅을 통해선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행복했었어.
그런 나에게 넌, 하늘이 불쌍하게 여겨 내게 준 선물 같았지.
너에겐 뭐든 말 할 수 있어 좋았어. 내가 맞고 사는 현실도, 지독하게 왕따 당해 말 한마디 못하고 산다는 사실도.
넌 언제나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줬었지. 힘내라며 아침이면 남겨주던 호출기의 음성 메세지는 도피하고 싶었던 내 현실에서 유일한 희망이고 삶의 의미였어.
연인도 아닌데 서로 잠이 들 때까지 시덥지 않은 대화를 나누던 전화가 난 정말 좋았어.
그런 내게 네가 사랑이 될 줄은 몰랐어.
지금 생각하면 오글거리지만 우리의 관계가 이어지는 조건은 평생 만나지 않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왜였을까. 난 너의 저음의 목소리가 좋았고, 집 전화 너머로 너와 나 둘 다 좋아했던 EVE의 너 그럴 때면을 함께 듣는 것이 좋았고 오늘은 어땠
냐고 맞지는 않았냐고 물어봐주는 네가 좋았고, 같은 시각 다른 공간에서 같은 영화를 보며 아 이 영화 좋다 라며 함께 무엇인가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게
좋았어. 너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좋았어. 네게 물을게, 내가 어떻게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랬기에, 너와의 관계가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너를 만나면 분명 나는 너에게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우리의 약속을 깨고
니가 만날래? 라고 작게 말했던 순간을 그 떨림을 난 아직 잊지 못해.
1년여 간의 채팅, 전화를 하고 처음 너를 만나던 그 날은 내겐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다. 3월 19일 금요일. 보건대를 다니던 나는 6교시를
마치고 학교 근처 지하철역에서 너를 기다렸지. 하필이면 내가 가장 싫어하는 기생충학 퀴즈가 월요일에 있어 내 손엔 기생충학 전공서적이 떡하니 들
려있었어. 가방에 넣기엔 이미 내 가방은 포화상태였었지.
남자의 긴 머리를 싫어하는 나는 그래서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외모를 하고 있었어. 긴 머리에 금색에 가깝게 염색한 머리. 이건 무
슨 양아치지? 했었지. 난 남자의 외모에 있어선 보수적 이었나봐. 기생충학 전공서적을 들고 있던 너는 그 책을 넘겨받으며, 넌 참 징그러운 걸 좋아하
나보다 호러 영화는 보지도 못하면서 라고 했던 그 말도 토시 하나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너와의 첫 만남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
조금은 어색했던 시간이 흐르고 이내 우린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해졌어. 처음 만나는 것이지만 1년간의 대화가 전혀 쓸모없던 시간 낭비가 아니었지.
전화로만 듣던 네 목소리, 흠 하며 작게 헛기침하는 버릇. 늘 귀로만 듣고 상상만 하던 네가 내 앞에서 움직이고 말하는 모습은 오랫동안 보고 싶던 영
화를 보는 것처럼 많은 기대감과 설렘의 연속이었어.
나는 그래, 너에게 소울메이트 이고 싶다고.
남들이 보면 우린 연인 같았을까. 너와 난 주말마다 만나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고 근교로 바람도 쐬러 다녔지. 시험기간엔 서로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어 깨워주기도 하며.
그래서 난.. 우린 사귀자는 말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연인이라고 생각했어. 그런 관계가 3년을 지속됐는데 어떻게 내가 그런 생각을 안 하겠어. 난 너를
이미 오래전부터 사랑하고 있었는데.
내가 너에게 고백했더라면, 그때 그 당시에 우리가 정말 좋았을 때 고백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내 인생에서 후회하는 시간이 있다면 그때야. 당연
하다고 여겼기에 안일했던 것.
넌,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했었지. 자식까지 낳고 사는 부부들도 이혼하는데 젊은 연인들에게 영원한 사랑이 있겠냐며. 그건 너의 부모님 얘기
였지. 넌 언제나 네가 생기는 바람에 네 부모님이 서로 불행해졌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했으니까. 우리 나이면 10에 6~7은 그렇게 결혼하고 살았고
우리 부모님도 그랬다 라는 말도 크게 위로가 되진 못했어. 넌 너를 불행의 씨앗이라며 늘 자책감을 갖고 살았어. 난 그게 너무 안타까웠어. 그래서 너
에게 영원한 사랑이 되고 싶었어. 하지만 넌 내게 이런 말을 했었지. 우린 절대 사귀지 말자, 난 너와 헤어짐이라는 것을 겪고 싶지 않으니까. 친구라면
영원으로 남을 수 있지만 연인이라면 언젠가 헤어지게 될테니까. 등신 머저리 같던 난, 그게 아니라는 말도 못했어. 그래도 위안이 되었던건 내가 아니
더라도 넌 누군가와 연인이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내 남자가 될 수 없지만, 그 누구의 남자도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난... 얼마만큼 등신이었던 걸까.
넌 중심을 잘 잡고 있었는데 나 혼자 이런 착각에 빠져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계기는 너에게 생겼다는, 누가봐도 예쁜 여자친구. 무용을 전공한다는
예쁘고 천상 여자 스타일의 너의 그녀.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들며 동시에 부끄러웠어. 얼굴을 못보고 지낸 1년, 만나게 된 3년 도합 4년을 혼자
착각속에서. 그런 날 너는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했을까.
너의 그녀가 생긴 후 너는 나와 했던 모든 것을 그녀와 함께 하기 시작했지. 나의 주말은 항상 한가했지만, 한가함 만큼이나 크던 공허함과 상실감은 이
루 말할 수 없었어. 넌.... 처음부터 나의 남자였던 적은 없었는데.
난, 너와 함께 했던 것들을 나 혼자 하기 시작했어. 너와 내가 금요일 밤이면 함께 보던 심야영화를 혼자봤지. 피곤하다며 갑자기 내 배를 베개 삼아 자
기 시작했던 너의 모습이 기억나 씁쓸하게 웃었어. 난 혹시나 내 뱃살이 드러날까 배에 힘주고 코로만 숨쉬느라 영화는 뒷전이었던 기억도. 혼자 본 영
화는 다 코믹했는데 난 웃지 못했어. 넌 그녀와 함께 영화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영화가 끝나면 아침 공기를 느끼며 너와 걸었던 덕수궁 돌담길. 그 길을 연인과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을 얘기하며, 그럼 우린 걱정 없겠네. 연인
이 아니니까라고 말했던 네가 기억나 잠시 멈춰 서 흐르려는 눈물을 참기도 했어. 넌 늘 그렇게 중심을 잡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우산이 없는데 괜히 비가 내리기라도 하면 공연히 휴대폰을 바라보기도 했어. 기억할까? 비가 오던 어느날 괜히 전화해 어디냐? 라고 물었던
거. 본관이야, 라고 대답하니 가장 큰 회색 건물?이라고 되묻던 너. 넌 1인용 우산을 들고 본관 앞으로 걸어왔어. 지방에서 학교를 다니던 너이기에 주
말도 아닌 평일에 우리학교에 서 있는게 신기했지. 어떻게 왔어?라고 물으니 그냥 이라고 답하는 네가 좋았어. 그냥이라는 대답뒤에 네가 보고 싶어서,
가 생략된 것이 아닐까 하며 두근 거리기도 했었지. 임상화학 전공서적을 들어주며 1인용 우산이라 좁다 하고는 내 어깨를 감싸안아 우리의 틈이 좁아
졌을 땐 호롤롤루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았던 기억.
그치만 너는 그녀의 옆에 있었어. 정말 잘 어울렸던 너와 그녀. 그래서 감히 겨뤄볼 생각도 못하는.
나는 나 혼자 너에게 속박되어 벗어나질 못했어. 내가 누군가를 만나버리면 영원한 사랑은 없는게 되잖아. 혼자 하는 사랑도 사랑에 속한다면 네 말대
로 영원한 사랑은 없는게 되어버리잖아.
보여주고 싶었어, 믿을 수 있게 해주고 싶었어. 교만, 내 철저한 교만일지라도 난.. 너를 놓을 수가 없었어. 참 그랬어.
그래서 한 해 한 해, 그녀와의 만남이 길어질수록 나는 무너져가고 있었어. 표면적으로 난 학점 관리도 하고 대학병원은 아니더라도 번듯한 직장도 가
지게 된 직장인으로 보통의 사람들과 다를게 없었어. 하지만 내면은 썩어가고 있었어. 네가 군대에 있을 때 가끔 걸려오던 수신자 부담의 전화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반가웠어. 하지만 난 네게 면회같은 것을 갈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지. 너에겐 그녀가 있었으니까. 그치? 이런 나를 모르는 주변 사람
들은, 이 남자 괜찮은 남자니까 만나봐 라고 하기도 했었어. 그럴때마다 전 집 교통수단이 나빠서 차 없는 남자는 만나기 힘들어요, 하는 된장녀 코스프
레도 하곤 했었어. 20대 중반의 직장 새내기가 무슨 돈이 있어서 차를 사겠어. 아, 그러니 20대 중반에 30대 중반의 남성분을 소개 해준다는 분이 계시긴 했었지.
넌, 그녀와 함께였지만 가끔 아주 가끔 나에게 희망 고문을 하곤 했지. 기억하겠지. 기억 못한다면 넌 정말 쓰레기 같은 놈일테니. 하긴 그런 희망 고문
에 놀아난 나도 참 한심하지.
객관적으로 너나 나나 너의 애인에게는 참 몹쓸 사람들이었던 것 같아.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 날, 넌 새벽 2시에 내게 전화를 했었지. 한참을 말이 없던 너에게 자다가 깬 나는 짜증도 나곤 해서 말 안할 거면 끊을게, 라고 했
더니 잠시 나와 줄 수 있냐고 물었어. 새벽 2시. 우리집에서 교통수단이란 내 튼튼한 다리아니면 택시였는데 이 새끼가 드디어 돌았구나 했었어. 난 액
면 그대로 말했지. 너 우리집 알지 않냐고, 내가 무슨 수로 이 시간에 너를 만나러 가냐고. 넌 내게 그랬어. 너희집 앞이야...라고.
가끔, 아버지 차를 빌려 넌 나를 데려다 준적이 있었기에 우리집은 아는게 당연한 거였지만, 새벽 2시 눈도 내리는 날 그녀가 아닌 나를 선택했다는 착
각에 난 자다 일어나 순식간에 화장..이라고 해봐야 눈썹 그리고 파우더 하고..까지 하고 나갔어. 넌 시동을 꺼놓은 본네트 위에 녹아가는 작은 눈사람
을 올려놓고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 쓰고나니 참, 콩깍지 껴있던 그 시절의 나는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이 들어 생각해보니 지랄도 그런
지랄이 없네. 영화찍니. 하긴, 넌 훈남이라서 어울리긴 했었어.
분위기 하나 만큼은 영화 부럽지 않았어. 함박눈, 그린벨트가 풀리지 않은 경기도 외곽의 시골 마을, 가로등은 단 한 개. 나도 영화주인공처럼 로맨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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