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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즈파크 레인저스의 2부리그 강등이 현실로 다가온 상황에서 박지성의 거취가 관심을 끌고 있다. 팀 잔류와 이적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또한 만약 박지성이 이적을 할 경우 어떤 팀으로 가는 게 적당한지도 관심사다. 일부에서는 차두리(FC서울)처럼 K리그 클래식에 입성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고 있다. 나 역시 박지성이 현역에서 은퇴하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 리그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걸 다 떠나 박지성의 의사를 가장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이 너무나도 터무니 없다. K리그가 박지성을 외면했으니 K리그에는 눈길도 주지 말라는 것이다.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는 이들이 많아 오늘은 제대로 된 사실을 알리려 한다.
일부에서는 K리그 구단들이 박지성의 가치를 몰라보고 내쳤는데 J2리그 교토퍼플상가가 버려진 선수를 발굴해 키워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박지성을 외면한 K리그는 한심한 존재로 부각되고 교토퍼플상가는 자비로운 구단으로 인식된다. 이렇게 박지성이 밑바닥을 경험하고도 우뚝 선 선수라는 걸 증명하고 싶고 K리그가 선수 보는 눈도 없는 하찮은 리그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건 엄청난 과장과 거짓으로 포장된 주장이다. 오늘 칼럼은 박지성이 앞으로 K리그에 입성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잘못 전달되고 있는 과거의 이야기를 바로잡고자 함이다. 이 칼럼을 읽고 내가 박지성을 실력으로 깎아내린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없길 바란다. 지금의 ‘대단한 박지성’이 아닌 ‘어린 박지성’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대단한 박지성’을 모르는 이는 없지 않으니 이 부분은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1999년 수원에는 박지성의 자리가 없었다
박지성이 수원공고 3학년이던 1998년. 그는 그렇게 빛나는 선수가 아니었다. 왜소한 체격으로 고등학교 무대에서도 그리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1981년 2월생인 박지성은 친구들보다 1년 학교에 먼저 입학한 소위 ‘빠른 81년생’이었다. 1년 차이에 따라 발육과 실력이 현저히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가뜩이나 왜소한 박지성은 유망주로 분류되기에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팀 내에서는 주전이었지만 전국적으로 그리 유명한 선수는 아니었다. 1981년 창단된 수원공고는 10여년 동안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다가 199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전국대회에서 소기의 성과를 내는 정도였다. 박지성이 속한 수원공고는 1998년 전국체전 우승과 대통령배 3위, 추계연맹전 3위, 백운기 2위를 기록했다. 나쁘지는 않은 성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는 경기력도 아니었다.
당시 수원공고는 K리그 수원삼성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수원삼성은 수원공고의 인재를 육성해 활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선수가 대학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K리그 무대에서 활약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초고교급 선수로 평가받던 고종수와 김은중, 이동국 등을 제외하고는 이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사실상 고등학교에서 프로로 직행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당시 수원공고를 지원하며 졸업생에 한해 세 명까지 임의지명할 수 있었던 수원은 신인이 도저히 경쟁을 할 수 없는 팀이었다. 수원은 서정원과 데니스, 샤샤, 고종수, 바데아, 윤성효, 신홍기, 김진우, 이병근, 비탈리, 이기형, 박건하 등 지금 생각해도 완벽에 가까운 선수 구성을 자랑했다. 이 팀은 박지성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원삼성 입단을 노크하던 1999년 K리그 전관왕을 달성하며 지금도 역대 최강팀으로 불리고 있다.
고교 무대를 평정해도 프로에 직행하는 게 1년에 한 명 있을까 말까한 상황에서, 그것도 무명의 선수가 역대 K리그 최강팀의 선택을 받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지성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고등학교에서 연고지역 임의지명 제도로 K리그의 선택을 받은 건 전남드래곤즈의 김경일이 유일했다. 당시 김경일은 광양제철고 소속으로 창단 2년 만에 팀을 2년 연속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며 “같은 나이 때의 윤정환과 고종수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그는 1998년 전국고교선수권대회와 KBS배 고교축구선수권대회 MVP 역시 석권할 정도의 초고교급 선수였다. 이 정도는 되어야 당시 고등학교에서 프로로 직행할 수 있었지만 김경일도 결국엔 프로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실패를 맛봤다. 당시의 박지성으로서는 수원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게 당연한 결과였다. 당시 드래프트에서는 김경일 외에 진순진과 성한수, 김영철, 이성재 등 이미 대학 무대에서 검증된 선수들이 대거 K리그의 선택을 받았다.
연봉 5억 원, 교토의 파격적인 대우
결국 K리그 입성에 실패한 박지성은 명지대에 진학했다. 사실 이걸 실패라고 볼 수도 없다. 김남일과 이관우(이상 한양대)도 그랬고 이영표(건국대)와 박진섭(고려대)도 그랬다. 안정환도 아주대를 거쳐 프로에 입단했다. 어지간한 초고교급 선수가 아니면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교에 가 프로 입성을 준비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박지성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원의 선택을 받지 못한 걸 가지고 K리그가 박지성을 버렸다고 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 김호 당시 수원삼성 감독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수원공고 박지성을 주시하기는 했다. 수원공고는 우리가 지원하는 학교였다. 하지만 당시 우리 팀 선수 구성이 워낙 막강해 박지성이 경쟁을 펼치기에는 부족했다. 나 역시 그가 대학에 가 실력을 더 키워 수원으로 오길 바랐다.” 박지성은 1999년 K리그 드래프트에는 아예 참가 신청서도 넣지 않고 대학 진학을 결정했다.
명지대에 진학한 박지성은 1999년 허정무 감독에게 발탁돼 일약 몸값이 치솟았다. 올림픽 대표팀을 이끌던 허정무 감독은 울산에서 전지훈련을 실시했고 시간을 쪼개 울산현대와 명지대의 연습경기를 보러갔다. 원래 수비수를 체크하러 갔지만 무명의(?) 박지성을 보고 반했다. 명지대 김희태 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허정무 감독은 일주일 동안 박지성을 올림픽 대표팀에서 훈련시킨 뒤 기술위원회를 통과하지 않고 감독의 권한으로 그를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했다. 허정무 감독은 “센스가 있고 괜찮아서 김희태 감독에게 물었더니 신입생이라고 했다. 그래서 ‘저 선수 1주일만 데리고 훈련하겠다’고 한 뒤 대표팀에 발탁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언론과 팬들은 활동량만 왕성한 박지성의 올림픽 대표팀 발탁을 두고 거센 비난을 보냈지만 허정무 감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올림픽 대표팀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중용된 박지성은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에서 골까지 뽑아내며 2000년 1월 성인대표팀에 발탁됐다. 그리고 같은 해 4월에는 라오스와의 아시안컵 예선을 통해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과 비교하면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왜소한 체격을 극복하기 위해 웨이트트레이닝에 매달렸고 허정무 감독과 김희태 감독의 정성까지 깃들여져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어린 나이에 올림픽 대표팀은 물론 성인 대표팀에까지 발탁돼 주목받던 박지성을 돈 많은 J리그가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시미즈 S펄스에서 박지성을 노렸고 J리그 하위권으로 처진 교토퍼플상가도 박지성을 주시하고 있었다. 박지성은 애초 시미즈와 협상 테이블에 앉았지만 연봉을 놓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고 결국 교토행을 확정지었다. 자그마치 연봉이 5억 원이었다. 비공식적으로는 더 많았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당시 홍명보가 J리그에서 연봉 7억 원을 받았고 윤정환이 4억 5천만 원을 받던 시기에 박지성의 연봉은 무척 파격적인 것이었다. 당시 고려대 소속 이천수가 주빌로 이와타로부터 제시받은 연봉이 1억 원임을 감안하면 박지성의 몸값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K리그는 박지성을 버린 적이 없다
당연히 K리그에서는 박지성을 잡고 싶어도 잡지 못할 만큼 J리그에서의 조건이 파격적이었다. 당시 K리그 최고 연봉자는 3억 원을 받는 김도훈이었다. 박지성은 이미 대표팀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J리그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연봉을 받는 고액 연봉자였다. J리그 최고 수준 연봉을 받는 선수를 돈으로 K리그가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부에서는 K리그에서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던 박지성을 J리그 교토가 발굴해 낸 것처럼 바라보지만 이는 잘못된 시선이다. 박지성은 이미 J리그에 입성할 때부터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고 도저히 K리그가 감당해 내기에는 몸값이 너무 비쌌다. 이에 대해 김호 당시 수원삼성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우리가 수원공고 출신 박지성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충분히 문제 삼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선수 본인의 장래를 위해 박지성의 J리그 진출에 대해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다.” 명지대 김희태 감독 역시 전력손실을 감수하면서도 박지성을 교토에 내줬다.
사실 관계와 시간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히딩크 감독이 박지성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건 분명하지만 무명의 박지성을 발굴해 낸 건 히딩크 감독 이전의 수원공고 이학종 감독과 명지대 김희태 감독, 올림픽 대표팀 허정무 감독 등이었다. 박지성이 교토에서 맹활약을 한 것도 분명하지만 이미 박지성은 교토에 입성할 때부터 최고 대우를 받는 선수였다. 박지성이 무명 시절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믿는 이들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한다. 박지성은 더 좋은 조건을 제시받고 J리그로 간 것이다. K리그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그저 가능성 있는 선수를 선발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선수를 버렸다고 하는 것도 지나친 비약이다. J리그 구단끼리 영입전을 벌여 몸값이 5억 원까지 폭등한 선수를 시장이 훨씬 작은 K리그가 데려올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대표팀까지 거친 선수를 K리그가 외면할 이유는 돈 말고는 없다.
박지성이 K리그에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하건 유럽에서 은퇴하건 그건 개인의 자유이고 존중해야 한다. 유럽파의 국내 복귀는 선택이지 의무가 아니다. 나는 그가 교토에서 은퇴한다고 결정해도 박수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린 시절 고등학교 무대를 평정했는데도 K리그가 외면해 J리그로 옮겨 성공했으니 K리그에는 눈길도 주지 말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게 얼마나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지 알았으면 한다. 자신을 버린 리그에 돌아오면 안 된다는 주장이 얼마나 억지스러운가. 박지성의 사례를 들어 K리그가 대선수를 몰라봤다고 하는 것도 잘못된 시선이다. 교토가 데려간 박지성은 대학도 떨어지고 갈 곳 없는 신세가 아니라 이미 국가대표에 발탁돼 몸값이 껑충 뛴 고액 연봉자였다. K리그가 버린 박지성의 진가를 J리그가 알아서 거둬준 게(?) 아니다. 박지성이 뛴 J리그를 미화하고 박지성을 버렸다며 K리그를 폄하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박지성과 K리그의 관계는 나쁘지 않다
박지성 본인도 K리그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은 없다. 박지성은 지난해 2002년 한일월드컵 10주년을 기념해 열린 K리그 올스타전에도 참가했고 영국에서도 K리그 소식을 듣기 위해 K리그 하이라이트 프로그램도 챙겨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입단 의사는 아니지만 수원삼성을 가장 좋아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2009년 7월에는 일주일간 수원 클럽하우스에서 수원 선수들과 훈련을 하기도 했고 지난해 5월에는 수원월드컵경기장을 방문해 “K리그가 발전할 수 있도록 더 많이 경기장을 찾아주시고 응원해주시길 바란다”고 애정 어린 당부를 하기도 했다. 박지성은 그 자체로도 위대한 선수다. 그런데 여기에 자꾸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 K리그가 악역을 맡아야 할 이유는 없다. 박지성은 이런 작위적인 스토리가 아니어도 충분히 그 자체로도 빛나는 선수 아닌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K리그는 박지성을 버린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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