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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한분이 말씀 하셨지만
대선의 영향으로 너무 멘붕이 컸는지
한국 근현대사 말고는 역게에 주제로 대화할 만한 글이
너무 안오르는듯 합니다 ㅎ
그렇다고 어떤 다른 주제 글을 연재를 할 수준은 아니고
그저 중간에 끼어들어 잡글이나 쓰는 스타일이라
밑에 싱가포르에 대한 글이 올라와서 끼어들어 한번 써봅니다.
싱가포르가 왜 발전했는가 묻는다면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영향을 준것은 지리적 영향이 아닌가 합니다.
바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이기 때문이죠.
17세기 동인도회사가 인도양을 넘어 극동으로 진출한 이래
싱가포르는 인도에서 극동으로 넘어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말라카 해협에 위치한 항구입니다.
동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인도반도를 지나 극동으로 넘어오는 길목에 위치한
말라카 해협은 남해 바닷길이 열렸을 때 부터 존재한 중요 해로로
자바섬을 돌아서 오세아니아 방향으로 수천키로를 돌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면
(해류와 해풍을 이겨낼 항해법, 선박도 존재하지 않았고요)
수백년간 이어진 단 하나의 루트였으며
이는 지금도 중국,한국,일본으로 오는 중동의 유조선과
수에즈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화물선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현대에도 중요한 해로입니다.
때문에 중계무역이 일찍히 발달했으며 지역을 오가는 상인을 위한
서비스업, 금융업, 정보의 집결지 역할을 하며 18세기를 거쳐
19세기 대중국 무역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중요 진출목적이 되며
크게 팽창하며 발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불어 중국의 인구팽창으로 동남아 등지로 확장된 화교의 유입은
싱가포르 인구의 70%이상을 차지하는 중국계 인구를 보더라도
유교문화 특유의 근면함과, 성실, 저축, 교육의 문화를 이 지역에 뿌리내리며
싱가포르를 발전 시켰습니다
이런 번영의 뿌리는 당연 지리적 이점이 아니었는가 합니다.
해로에 의한 선박의 물류교류는 당제국의 몰락 이후
이미 실크로드로 상징되는 육로수송을 압도하며
송나라 시대 남해의 해상무역이 이를 대체했음을 증명하듯
이후 세계경제의 중요한 물류 이동 수단으로 등장했으며
조선기술과 항해술의 발전에 힘입어 유럽의 대항해시대 도래 이후
해로의 유통과 장악은 국부와 국력에 직결되는 부분이었죠
해군력이 곧 국력이라는 개념이 이 때문에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에 격파된 사건이
스페인의 몰락과 영국의 부흥으로 이어진 예가 그러하죠
영국은 단순히 해군력만 키워서 초강대국이 된 것이 아니라
우수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해로의 거점 장악이 중요함을
가장 먼저 깨우친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를 초크 포인트라고 합니다.
세계 유라시아 대륙의 중요 문화권을 연결하는 해로중에
반드시 이동을 위해 거쳐가야 하는 지점이 그것으로
북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도버해협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로스해협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몰타섬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지브롤타해협
서아프리카와 동아프라카를 연결하는 케이프타운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
서인도와 동인도를 연결하는 실론섬
인도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연결하는 말라카 해협
인도차이나와 극동을 연결하는 남중국해 (홍콩)
태평양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대한해협
이들 중요 지점을 장악하는 국가는
전 세계의 물류와 경제를 장악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됩니다
때문에 영국의 전세계 식민지 확장은 이들 지점을 연결하며
이뤄졌고 영국은 이들 지역에 반드시 우수한 해군력을 주둔하여
통제하였죠
사실상 이들 초크포인트를 모두 영국이 장악한 19세기 이후
전세계 제국주의의 경쟁은 말이 형식상 경쟁일 뿐이지
영국의 국책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영국의 허락으로
"허용"된 식민지 확장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영국이 전세계를 모두 점령 할 수 있는 건 아니니 말이죠.)
초크포인트를 장악함으로써 영국이 아닌 다른국가의
식민지확장은 언제든 폐쇄하여 통제가능한 것에 불과한 지역일 뿐이고
극단적인 대립도 영국이 우위에서 외교담판이 가능한 상황이 되죠
빅토리아 시대 역사를 보며 대영제국의 번영이 단순히
영국의 영광을 말하는게 아니라 역사, 문학, 언론 서술에서도
영국에 우호적인 이유가 이런 연유입니다.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 유럽국가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영국을 부정적으로 대할수 없거든요.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로 영국과 함께 인도에 진출했으나
영국의 국책이 인도병합으로 정해진 상태에서
단지 거슬린다는 이유로 해군을 통제하자
인도에서 곧바로 축출 당해 버린 사례가 그러하고
먹을게 없어 영국이 이미 격파한 청나라와 전쟁을 통해
인도차이나에 진출해 베트남 자투리에 겨우 교두보를 만들어
숨을 쉬며 살아간 안습의 사례가 그러합니다.
이런 해상의 장악을 통해 19세기를 풍미한 왕언니 영국에
도전한 국가가 있으니 바로 "러시아"입니다.
러시아의 경우 표트르 대제 당시 해군력의 중요성에 눈을 뜬 이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설
흑해진출과 해군양성을 통해 바다로 나아가고자 기를 쓴 국가입니다.
발틱해를 얻고자 수도를 아예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 부르크로 이전했으며
지중해로 나아가고자 오스만 투르크에 전쟁을 걸어 흑해를 얻고 나아가
발칸 지역에 진출해 오스만 투르크를 통제하여 보스포로스 해협을 얻어 지중해로 나아가고자 했죠
이것을 저지한 사건이 그 유명한 크림전쟁입니다.
이슬람국가로 유럽을 위협하는 터키보다 영국의 해상권 장악에 새로운 경쟁 국가로
러시아가 등장하는 것을 꺼려한 영국이 프랑스와 동맹하여 러시아를 다굴한 전쟁입니다.
크림반도가 탈탈 털리고 흑해함대가 괴멸되며 끝난 전쟁을 통해
러시아 배운 교훈은 영국이 통제하고자 하는 해상교두보는 건들면 안된다는 것이겠죠.
영국의 입장에서 발틱해로 러시아가 아무리 기를 쓰고 전진해 바야
영국 본토와 직결되는 북해에 도달할 뿐이니 강력한 본토해군력으로 제압이 되지만
보스포로스 해협을 내주게 되면 배후 교두보인 지중해 함대의 군비가
이유없이 증가되며 위협이 되니 사전에 차단한 현명한 대체입니다.
러시아는 이때를 기점으로 동방으로 선회하여
중앙아시아 진출, 극동진출을 입안하게 됩니다.
("가죽푸대의 입구가 막히면 다른쪽이 불룩해진다"로 표현합니다 )
해로로 안되면 육로로 진출하자 정책이죠
이중 중앙아시아 진출에서 영국과 출동하게 되는데
아프카니스탄에서 였습니다.
이는 기존에 존재한 적이 없는
영국에서 큰 위협이 된 사건인데
이런 것이죠.
유럽의 어느국가든 아시아로 식민지 진출을 하는 나라는
모두 영국이 통제하는 초크포인트를 넘어야 함으로
영국이 강한 해군력을 유지하는 이상 언제는 조절이 가능한 대상에 불과하지만
러시아는 이런 해로가 아닌 육지를 통해 유럽에서 아시아로 도달 가능한
영국이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유럽국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때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와 영국이 충돌한 사건을
"THE GREAT GAME" 이라 부릅니다
이때 등장한 개념이 그 유명한 "러시아의 남하정책" 이라는
러시아에 대한 부정적인 팽창주의 악의축 국가 이미지 입니다.
프랑스는 사이좋게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나눠먹는 사이지만
러시아는 프랑스처럼 통제 가능한 국가가 아니니
여론을 통한 러시아 견제의 한 흔적이죠
이런 견제의 흔적은 바로 우리나라 역사에도 나오는 대목입니다
극동에서 초크포인트인 대한해협의 역할은
바로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에서 태평양으로 나아가기 위한 길목을
차단하는 역할입니다.
연해주를 통해 나온 러시아 선박이 대한해협을 거치지 않을 경우
훗카이도를 지나 태평양 한가운대로 일본열도를 한 바퀴 돌아야 하는
모헙을 강요받는 것이죠
거문도사건이 바로 이런 대한해협의 사전 차단을 목적으로
조선이 러시아와 1884년 조약을 맺기 전
이미 영국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며 1882년 요구조건으로 거문조 조차를 요구한 것이고
이어 곧바로 강제 점유를 시도해 국제적으로 잇슈가 된 사건입니다.
얼마전까지 한국은 냉전체제에서 소비에트에 대한
영미의 적개적인 입장을 공유하고
냉전시기 러시아 관련 1차 사료를 얻을 수 없던 관계로
무려 국사책에서 한국의 시각도 아닌
영국의 시각에서 러시아관 "러시아 남하정책"을
거문도 사건의 이유라 가르쳤던 기도 안차는 내용의 내막이죠 ㅎ
이런 러시아의 왕언니 영국에 대한 도전이 끝나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와도 긴밀한 바로 러일전쟁입니다.
러시아는 1895년 만주의 뤼순 조차 이후 만주에 집중하며
3면이 바다인 한반도는 애초 수비가 불가능하나
최소한 한반도 정권의 안정을 통해서라도
블라디보스톡과 뤼순을 연결하는 대한해협의 보장을 꾀했고
더불어 시베리아철도의 부설을 통해 유럽과 만주를 연결하는 육로를 확보하고자 했으나
(이 시기 조선에 친러가 외교 대안으로 나타난 것도 바로 러시아의 한반도 안정책에 따른 지원 때문이고
명성황후가 친러성향을 보이다 암살 당한 뒤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 수중에 들어오자
러시아는 완전히 장악한 한반도 정부를 두고 택한 정책이 러시아-일본 양국의 한반도 철군과
중립화였습니다. 니시-로젠협정이라 부르죠. 이때 조선은 건국이래 처음으로 외세가 간섭안하는
정치환경이 조성되었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근대화정책을 시작했습니다.)
1902년 영일동맹으로 이미 승리의 자신감을 얻은
한반도 식민지의 사활을 건 일본의 도전에
패하며 극동을 포기하게 되죠
발틱함대가 포위된 태평양함대를 구원하고자
유럽 아프키라를 돌아 극동까지 온 예는 너무 유명합니다
당시 영국이 통제하는 초크포인트를 다수 지나야 했는데
이때 공포에 질린 함대 사령관의 일지는 "짜르의마지막 함대"라는 책에서
자세히 적고 있죠
러시아의 최강함대이자 극동함대를 구원하고자 러시아가
국력을 집결해 출발하는 러시아의 대함대는
사실 지블로터에 있는 영국 지방함대조차 상대 못하는
영국이 마음만 먹으면 괴멸이 되는 안습 격차인지라
함대 사령관이 가장 무서워한 것은 사실 도착해 대적해야 하는
일본이 아니라 쵸크포인트마다 주둔한 영국 지방함대가
행여 공격하지나 않을까 하는 극도의 공포였죠
(영국은 쓸데없는 국력소모라 판단하고 개입을 안했습니다.)
그리고 지구반바퀴 1만 키로를 돌고 돌아
극동에 도착한 발틱함대는
블라디보스톡의 함대와 함류하기 위해 올라가던 중
바로 그 대한해협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함대에 모두 괴멸되었습니다.
19세기 중앙아시아에서 충돌하여 영국에 위협으로 부상한 러시아는
독일이 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친러시아)을 포기하며 발칸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위기가 고조됨에따라 발칸으로 외교역량이 집중되며
1907년 영국과의 조약을 통해 중앙아시아를 포기하였고
더불어 1907년 일본과의 조약을 통해 북만주를 조금 떼어주는 조건으로
남만주와 조선을 일본에게 넘기며 극동도 포기했습니다
(이토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총에 맞아 죽은 이유가 바로 하얼빈에서
러시아와 이런 조약을 협상하는 과정에서였고, 이준열사가 헤이그에서 입장을 못한 것도
조약 전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북만주 좀 만 남겨달라고...) 고종을 도와서 가능했으나
일본이 조약을 양보하며 체결하자 막상 헤이그에 도착한 이준일행을 생까며 나타난 일이죠.)
제국주의 시절 영국이 해상권을 장악하며 그 전략으로 취한
초크 포인트 지역은 제국주의 시대 영국의 국력을 지탱하는 거점이었고
서술한 내용 말고도 세계사에 많은 사건을 남겼죠
격변의 한국사만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제국주의는 19세기 영국이 이를 위해 전 세계에 군항을 거점으로 경영한 것만 보아도
그 유지비용에 따른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 부담으로 인해
종식되었고 지금은 물리적,군사적 제국주의가 아닌 금융으로 지배하는
금융 자본주의의 제국주의가 세계경제를 통제하는 시절이죠
물리적 지리적 거점이란 것보다
각 금융허브의 거점이 되는 지역이 더욱 번영하기도 합니다.
싱가포르는 과거 그런 지역이었고
이런 지형적 이점이란게
역사적으로 어떤 성격의 지역을 의미하는 것인지
한번 서술해 보았습니다.
간단하게 쓰려던 잡설인
쓰다보니 자꾸 내용이 길어져서
두서없는 장문이 되었네요 ^^;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