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독재정권시절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싸워온 진보원로 인사 71명이 16일 오전 대한성공회 성당 앞 마당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이들은 아울러 지난 9일 보수원로들이 국보법 유지를 주장한 것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았다.
리영희교수, "국보법은 한국판 파시즘법" 70년대 <전환시대의 논리>를 펴내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던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는 이날 국가보안법은 단순히 법과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리 교수는 먼저 "과거 국제 사회는 대한민국에 예술과 문화가 존재할 수 있는지 궁금해 했다. 이는 국가보안법으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 상상과 발상의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 어떻게 상상력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하는 예술과 문화가 존재할 수 있겠냐는 '정당한' 의문이었다"며 "최근 우리 스포츠·문화계가 세계적 평가를 받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지식인·예술인의 놀라운 비약은 상상력을 옥죄었던 국가보안법이 지난한 민주화 투쟁으로 다소나마 약화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리 교수는 이어 "국가보안법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대만의 장개석처럼 국가주의자들이 자신의 권세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의 아류"라며 "국보법 유지의 이유로 국익을 주장하지만, 국보법은 기본적으로 인간존중의 정신에서 크게 벗어난 인간을 죽이는 법이다"고 주장했다.
백기완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역시 "국가보안법 폐지는 단순한 법률 폐지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며 "국보법이 수십년간 존재하면서 만들어낸 '국보법적인 문화'를 교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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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으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은 경험이 있던 각계 원로 인사들은 16일 오전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프레시안 |
"원로라고 부르지 말라", "독재정권에 빌붙던 이가 원로라니...황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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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 불편한 몸을 이끌고 기자회견에 참여한 리 교수는 "국보법은 단순히 법률 폐지를 넘어 국보법이 수십년 존속하면서 만들어낸 문화들도 함께 일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레시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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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들은 지난 9월9일 보수원로들 1천여명이 시국선언을 통해 국가보안법을 유지할 것을 촉구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백기완 소장은 일단 '원로'란 표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백 소장은 "원로란 말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냐"며 "사람들이 나를 보고도 원로라고 하는데, 나는 단지 땅속을 헤집는 '늙은 무지렁이'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이어 "세속적으로 '원로'란 말을 쓰더라도 국가보안법 유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과연 '원로'라고 불릴 수 있는가"라며 "그들의 과거 활동을 살펴보면 (원로로 불리는 것에 대한) 부당함을 쉽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리영희 교수도 "과거 강대국과 독재정권에 빌붙어 오로지 자신들의 출세, 축재, 권력을 위해 국민의 자유와 창조력을 앗아간 이들이 '원로'라며 국가보안법 영속화를 주장하는 것을 봤다"며 "과거 행적들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는 그들은 우리를 다시 야만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려고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오충일 목사도 "국가보안법 유지를 주장하는 분들의 면면을 보고 황당했고, 고통스러웠다"며 "이 자리에는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을 넘나들며 고통을 온 몸으로 느꼈던 분들이 왔다"며 "국보법 유지를 주장하는 분들은 국보법이 어떻한 고통과 고난을 가져오는지 경험하지 못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이었던 그는 "6월항쟁이 끝날 때 국보법도 함께 없어지는 줄 알았다"며 "6월항쟁이 끝나고 10년이 넘은 지금도 국보법 폐지를 주장하니 씁쓸하다"고 덧붙였다.
폐지 이후 대체입법, 보완입법에도 깊은 우려 표명 한편 이들은 여권의 국보법 폐지 이후 대체입법 혹은 보완입법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이들은 "대체입법이나 보완입법을 통해 국보법 폐지로 인한 처벌 공백을 메우자는 논의가 진행되는 것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보장되는 인권을 인정치 않은 독소조항들을 이런저런 이유로 존속시키는 것은 국보법 폐지의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이어 "국보법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연구와 논의들이 진행된 만큼 인권을 억압한 국보법의 많은 독소조항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이제는 56년 국보법 56년의 역사, 고통과 인권유린, 국가억업의 역사를 끝내자"고 주장했다.
다음은 이날 발표된 각계 원로인사 71명의 공동선언문이다.
'희대의 악법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광복 60주년을 맞자'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국가보안법이 탄생한 지 벌써 56년이 되었습니다. 조국의 민주화와 민족의 평화적 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온 우리는 최근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기 위한 역사적인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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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백 소장은 지난 9월9일 보수인사들이 국가보안법 유지를 주장한것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원로라고 부를 수 있냐"며 "독재정권에 빌붙어 인권탄압에 앞장선 죄 부터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레시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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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의 역사는 인권유린과 반민주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해왔음은 구구히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국가보안법에 의해 구속되어 수십 년간의 옥고를 치르는 비상식적인 상황도 있었습니다. 정부에 대한 건전한 비판만으로도 영장 없이 체포되고, 고문을 당했으며, 가정은 파괴되고, 이웃들로부터 고립되는가 하면 연좌제의 사슬에 묶여 심각한 피해를 입고는 했습니다. 공안ㆍ정보기관은 국민억압의 체계를 촘촘히 짜고, 국민들의 일거수 일투족만이 아니라 머릿속 생각마저도 통제하려 하였습니다. 공포가 지배하는 사회, 침묵이 강요당하는 사회를낳았고, 자의적 법 적용에 의해 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런 이유로 민주화가 되면 가장 먼저 없애야 할 법률로 국가보안법이 우선 순위에 꼽혔던 법률이 국가보안법이었고, 과거청산 과제의 정점에 해당하는 것이 국가보안법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고, 민간정부가 들어섰고,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개혁이 이뤄지고 있음에도 우리는 아직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논란을 치르고 있습니다. 과거 국가보안법에 기반하여 국민을 감시, 억압하던 공안기구들은 비대한 조직체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그 기관들에 종사하던 인사들과 그 기관들에 유착하여 지냈던 인사들은 다시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반대하는 발언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국론의 분열은 어떻게든 국가보안법을 존속시키려는 수구적 냉전세력에 의해 조장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들이 과거를 돌아보면서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자중자애 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일부 정당과 수구 인사들은 국가보안법이 마치 국가안보에 기여해온 법률이며, 이 법률이 폐지되면 우리 사회가 당장 이북에 의해 적화될 것 같이 주장하며 다시금 국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던 배경과 이후 독재자들에 의해 강화되고, 개악되었던 역사를 알고도 이런 주장을 한다면 이는 양심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국가보안법은 국가안보라는 미명 아래 정치적 반대세력들을 탄압하고, 정권의 안보를 위해 기능하여 왔습니다. 독재자들일수록 국가보안법을 정치적 탄압의 도구로 더 많이 사용했습니다. 이제 군사정권도 끝났고, 그런 독재자들도 사라진 마당에 국가보안법을 없애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과거 냉전과 분단의 유습이자 국가보안법에 의한 억압의 질서와 체계를 21세기의 오늘에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획일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자신의 사상과 의견을 자유로이 표현하고, 토론하고, 창조적인 방향을 찾아나가야 하는 이때에, 남과 북의 교류가 활성화되고 수만의 남북 정치인과 경제인, 민중들이 서로 왕래하고 있는 이때에 이런 평화적인 교류마저 처벌하는 법률을 그대로 유지하자고 주장하는 그 본뜻은 무엇입니까? 언제까지 감시와 억압, 대립과 갈등, 증오와 반목을 되풀이하면서 미래를 위해 투자하여야 할 역량을 이런 데에 소모해야 합니까?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시작입니다. 자의적인 남용이 가능하고, 그런 법 조항으로 이미 많은 폐해를 입었던 우리가 과거의 국가보안법 적용사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가 가입하고 있는 국제인권조약에 명백히 위배되고, 헌법에서 보장하는 기본권도 침해하는 이런 법률체계, 그리하여 근대 법 원리인 죄형법정주의에도 위배되는 법률을 유지할 어떤 명분도 없습니다.
한편 정치권의 일각에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서 대체입법을 만들자거나 형법을 보완하여 국가보안법 폐지로 인한 처벌 공백을 메우자는 논의가 진행되는 점에 대해서도 우리는 깊은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히 보장되는 인권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처벌해온 것이 국가보안법의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독소조항들을 이런저런 이유로 형법에 보완한다든지 새 법률을 만들어 대체한다는 발상은 이미 국가보안법 폐지의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연구와 논의들이 진행되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건전한 민주사회로 가자면 당연히 인권을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의 많은 독소조항들은 완전히 제거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제 국가보안법 56년의 역사를 끝냅시다. 그 고통과 인권유린, 국가억압의 역사를 끝냅시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사회를 만듭시다. 평화통일을 앞당깁시다. 우리는 국가보안법을 완전히 없애고 민주와 인권, 통일의 시대로 달려가야 합니다. 광복 60주년을 한 해 앞 둔 올해 반드시 국가보안법을 없앱시다. 국가보안법은 그 자체로 끝내고, 묻어야 할 과거의 유령입니다. 비상식이 판치는 야만을 넘어 상식이 존중받는 문명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이상 국가보안법에 의한 비극은 끝나야 합니다.
오늘 선언에 참가한 우리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한 단계 더 높이기 위해 시민사회와 함께 노력할 것을 엄숙히 다짐합니다.
2004년 9월 16일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각계 인사 공동선언 참가자 71명 일동
[종교계] 강신석 목사(조선대 이사장), 강원하 목사(기장 원로목사), 금영균 목사(예장, 전 노사정위원회 위원), 김동완 목사(전 KNCC 총무,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중앙위원), 김상근 목사(기장총무, CBS 이사), 김준영 목사(감리교 총무 원로목사), 김지길 목사(전 감리교 감독회장), 박덕신 목사(감리교,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상임의장), 박상증 목사(전 아세아교회협의회 총무), 박형규 목사(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오재식(전 월드비젼 회장), 오충일 목사(전 NCC 회장, 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장), 유경재 목사(예장, 안동교회 원로목사), 이명남 목사(전 KNCC인권위원회 위원장, 예장 사회문제위원장), 이해동 목사(기장, 덕성여대 이사장), 조승혁 목사(감리교 도시산업선교회, 도시개발연구원), 조용술 목사(복음교회 목사, 전 CBS 이사), 홍근수 목사(기장 원로목사, 평화운동가), 홍성현 목사(예장, 전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공동대표), 김병상 신부(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택암 신부(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문정현 신부(불평등한소파개정국민행동 공동대표), 양홍 신부, 송기인 신부(부산가톨릭교회사연구소장), 신현봉 신부, 안승길 신부, 안충석 신부(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고문), 황상근 신부, 함세웅 신부(전 천주교정의평화인권위원장), 영공 스님(전 해인사 주지)
[학계] 강만길(상지대 총장), 국순옥(인하대 교수), 박승경(전 이화여대 교수),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 변형윤(서울대 명예교수), 성대경(역사문제연구소 고문), 이문영(고려대 명예교수), 이상희(서울대 명예교수), 이이화(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이지형(성균관대 명예교수), 장회익(녹색대학 총장), 정창렬(한양대 명예교수), 주종환(동국대 명예교수), 최장집(고려대 교수), 한완상 한성대 총장(전 교육부총리)
[법조계] 이돈명 변호사(전 민변 회장), 최영도 변호사(전 민변 회장), 한승헌 변호사(전 감사원장)
[여성계] 김윤옥(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 박영숙(한국여성재단 이사장), 이효재(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명예대표)
[언론계] 김중배(전 문화방송 사장), 리영희(한양대 대우교수), 주섭일(내일신문 주필 겸 고문), 최일남(소설가, 전 한겨레 논설고문)
[보건의료계] 서한태(목포환경과건강연구소 이사장), 장임원(전 중앙대 의대학장), 홍창의(전 서울대병원장)
[재야] 백기완(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남상헌(민주노총 지도위원), 박정기(유가협 고문), 박용길(전 통일맞이 이사장), 배다지(민화협 상임고문), 배종렬(전농 고문), 신창균(통일연대 명예대표), 오종렬(전국연합 상임의장), 이소선(유가협 고문), 임기란(민가협 고문), 정광훈(전국민중연대 상임대표)김경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