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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엔 육조라 하여 중앙 관청과 지금의 서울 시청격인 한성부, 감찰 관청 격인 사헌부,
그리고 최고 행정기간인 의정부 등등 아주 많은 기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관청들이 다 어디에 있었을까? 하면,
흔히 생각하기를 궁궐 내에 있었겠지.. 하는 분들이 많은데
궁궐은 왕이 거처하고 집무를 보는 곳이기 관원들이 일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 집무를 보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 말하려는 '육조거리'입니다.
육조거리의 위치는 지금 광화문 앞 세종대왕과 이순신 동상이 있는 세종로.
정확히 그 곳입니다.
육조거리의 구성은 대략 이렇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gnass/40159927921
육조거리는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를 하려고 했을 때 정도전의 주도하에 만들어 졌습니다.
얼마전 광화문 광장을 새로 지을 때 토층 검사를 해보니 조선 건국 이래 도로를 4번은 깐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더군요.
거리의 폭만해도 40미터가 넘음으로써 명실상부 조선 최고의 거리 규모를 자랑하는데
구한말의 사진이 남아 있음으로써 다행이 그 모습을 현재에도 알 수 있습니다.
1894년 광화문과 육조거리
1896년도 사진.
사진만 봐도 도로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느껴지시죠? 사진만 봐서는 거리가 아니라 무슨 광장처럼 느껴집니다.
사진출처 : http://dlrnjstpblog.pe.ne.kr/1699
광화문에서 찍은 육조거리. 사진이 너무 어두운 게 아쉽습니다.
조선 최고의 관청이 모인 거리이니 그 곳은 양반들과 관원들만 다녔을 거 같다는 통념과 달리
관원, 일반 백성, 아이들까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광화문 앞에는 해태상 두 개가 있는데 그 해태상은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휴식처(?)로 잘 이용되었습니다.
(한편으론 원래 이렇게 아이들이 놀 수 없었는데, 왕조가 몰락하면서 놀이터처럼 이용 됐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육조거리에 있던 관청들은 일제침략기 때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가 생기면서 모두 철거되었고
그 일대도 한국전쟁과 산업화 등을 겪으며 모두 사라져 알다시피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6조거리 관청의 모습을 제대로 알기가 힘든데,
철거되기 직전 1920년쯤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남아있습니다.
육조거리 외각에는 민간인들이 빼곡히 모여 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조선 최고의 거리다보니 거리 근처엔 기와집이 대다수이고 외각으로 갈 수록 초가집 비율이 많아집니다.
사람은 서울로가고 말은 제주도로 가라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닐정도로 민가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습니다.
1902년에 찍은 육조거리 모습. 왼쪽 가운데쯤에 광화문이 보입니다.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niobe0502/150090894781
당시 경복궁과 육조거리를 보여주는 미니어쳐.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타기 전까지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왕들은 경복궁에 있는 걸 상당히 싫어했습니다.
거의 모든 임금이 경복궁이 아닌 다른 궁에서 거처하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경복궁이 이 중앙관청과 가장 밀접하게 있던 궁이다보니 집무에 너무 시달려 거처하길 싫어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ㅋ
현대에 많은 외국인들이 경복궁을 보며 도심 한 가운데에 궁궐이 떡하니 있는 것에 놀라워합니다.
사실 저도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 도심 중심가 대다수의 건물이 예전에 쓰였던 건물 그대로이며
고층건물이 하나도 없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두가지가 섞여 경복궁만 아니라 광화문 앞 육조거리가 지금까지 남아있어
과거의 문화를 현대에도 간접적이나마 경험할 수 있었으면..하는 건 너무 욕심이려나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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