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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59231
    작성자 : Dementist
    추천 : 23
    조회수 : 12117
    IP : 115.88.***.168
    댓글 : 19개
    등록시간 : 2013/10/23 14:49:46
    http://todayhumor.com/?panic_59231 모바일
    역사속 지옥도라 부를만한 추악하고 끔찍한 기록들 <BGM>
     BGM : One Republic - Apologize
     
     
     
    1. 람리섬 전투 (1945)
     
    300px-SE_002256_landings_on_Ramree_island.jpg
     
    람리 섬 전투(Battle of Ramree Island)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1945년 1월부터 2월에 걸쳐 6주간 진행된 전투였다.
    이 전투는 수많은 일본군 병력이 늪지대에 대기중이던 바다악어들에게 잡혀먹혔다는 보고와 연계되어 있다. 기네스북
    (Guinness Book of World Records)은 이 사태를 사상 최악의 악어 재난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악어로 인한 최대 희생자 발생 사례로도 등재하였다.
     
    1월 26일 샌키 작전(Operation Sankey)에 따라 영국 해병대가 체두바 섬에 상륙하였고,
    섬 내 일본군이 없는것을 확인하였다.  람리 섬의 일본 주둔군은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제 36 인도 보병여단은 공군과 해병대의 도움으로 상륙을 마쳤다.
    해병대가 일본군 거점의 측면을 돌파하자 거점 내에 있던 일본군 900여명은 거점을 포기하고
    섬 반대편에 있는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퇴각하였다.
    일본군이 이동한 경로에는 16 km 길이의 망그로브(mangrove) 늪지대가 있었는데,
    나머지 지역들은 영국군이 포위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진흙 가득한 지역을 지나던 일본군 내에서 곧 풍토병이 시작되었으며, 전갈과 모기, 그리고 바다 악어가 일본군을 괴롭혔다.
     
    영국군은 일본군에게 수차례 항복을 권고했지만 일본군은 이를 묵살하였다.
    늪지대를 탈출하려던 일본군 병사들에게는 영국 해병대가 사격을 해댔고,
    일본군은 늪지대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수백명의 전력을 식량 부족과 식수 부족으로 잃었다.
    당시 전투에 참전하였던 박물학자 브루스 스탠리 라이트(Bruce Stanley Wright) 등은
    악어들이 일본군을 공격해 수많은 병사들이 잡혀먹혔다고 하였다.
     
    라이트는 1962년 출판한 저서 ‘가깝고 먼 야생 스케치(Wildlife Sketches Near and Far)’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였다.
    “그날 밤(1945.02.19)은 박격포병들이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가장 공포스러운 시간이었다.
    컴컴한 늪지대 안에서 산발적으로 소총 사격 소리가 들려온 후에 거대한 파충류의 턱에 분쇄되는 부상자들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으며, 악어가 움직이며 내는 흐릿한 소리가 지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지옥의 불협화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새벽이 되자 독수리들이 모여들어 악어들이 남긴 잔해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약 천명의 일본군 병사들이 늪에 들어갔지만, 살아서 발견된 수는 20여명에 불과했다.”
     
    영국군이 늪가에 당도하였을때 이들은 늪지대로 들어간 일본군 900여명 중에 20여명의 생존자들을 발견하였는데,
    그나마 대부분 중상자였다. 영국군의 치밀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약 500여명이 늪을 빠져나갔다.
    만약 라이트의 주장이 맞다면 람리 악어 공격 사태는 사상 최악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이 사태에 대한 영국군의 공식 보고나 일본군 생존자들의 증언, 또는
    버마 현지 주민들의 증언 등이 남아있지 않아서 실제 악어 공격 희생자는 가늠하기 어렵다.
     

    2. 위대한 반란 : 유대 - 로마 전쟁 (66 C.E)
     
    image010.png
     
    제1차 유대-로마전쟁 또는 유대독립전쟁으로 불리며 때때로 위대한 반란으로 불리는데,
    로마 제국에 대항한 유대 지방의 유대인들의 세 번에 걸친 중요한 항쟁 중에 첫 번째 전쟁을 말한다.
     
    이 전쟁은 66년에 발발했는데. 그리스계 로마인과 유대인 사이의 종교적 분쟁에서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기원후 70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고 유대인 저항군을 진압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 유대인 반란의 패배의 결과로 유대인은 자신의 국가를 잃어버리고 흩어져
    로마 제국의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는 디아스포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부터 예루살렘에 대한 공격 시도가 몇 번 있었으나 실패하였다.
    예루살렘은 사방을 둘러싼 높은 벼랑 위에 서있는 천연의 요새이고,
    이중삼중으로 겹쳐진 성벅 곳곳에 높은 탑과 튼튼한 돌벽으로 둘러싸인 성채가 우뚝 솟아 있으며,
    예루살렘 성전도 이중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로마군은 공격에 앞서 관례에 따라 '숫양(아리에스)'이 성벽과 부딪치기 전에
    ('숫양'이란 공성무기, 성벽을 깨부술 때 쓰는 추를 가리키는 로마군의 은어이다)
    항복한 자는 용서하겠다며 항복을 권고했지만 유대인은 듣지 않았다.
    한편 도시 안에서는 공성전에서 평화협상을 시도하지 못하게 하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드높이기 위해
    식량을 모두 불태웠는데 그로 인해 많은 도시거주인과 군인들이 굶어죽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 공략을 위해 영구진지를 도시 주위에 구축하고 성벽높이의 벽을 쌓고 참호를 팠다.
    누구든지 도시를 탈출하려고 하면 붙잡아 십자가형에 처했는데 공성전이 끝날 때까지
    만 명이 도시 주위를 둘러싸는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예루살렘 공략을 지휘했다.
     
    70년 8월 10일에 예루살렘 성전이 성 안으로 돌입한 로마군에 의해 불탔으며,
    9월 8일에 시내에서의 저항도 수그러들고 20일에 저항은 모두 끝났다.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린 로마군은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웠다.
    유대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도 철저히 약탈당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루살렘 공방전 당시 성 안에는 어림잡아 27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지만,
    포로로 잡힌 유대인의 수는 유대 전쟁 모든 기간을 통틀어 9만 7천 명이었고,
    예루살렘 공방전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무려 110만 명이었다고 한다.
    현재 로마에 서 있는 티투스의 개선문에는 당시 성전에서 메노라와 같은 성물을 약탈하는 로마군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부터 시작된 로마의 유대에 대한 관용 노선은 이때를 전후해 크게 바뀌었다.
    예루살렘에서 잡힌 포로 가운데 로마에서 열릴 개선식을 위해
    젊고 잘생긴 남자만 남기고 17세 이상의 남자 포로 가운데 일부는 이집트로 보내져 노역에 종사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포로는 노예로서 각 속주에 선물로 보내지거나, 검투사가 되거나 야수의 먹이가 되었다.
     

    3. 아즈텍 제국의 멸망 (150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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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 아메리카의 멕시코 중부 부근에 존재하던 거대 제국. 아스텍 혹은 아스테카(스페인어 Azteca)라고도 한다.
    톨텍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6세기에 에스파냐와 접촉하여 멸망하였다.
     
    아즈텍에는 인신공양 전통이 있었는데 이에 사용할 제물을 위하여 다른 원주민 부족을 강제적으로 지배하였으며,
    원주민 부족의 반란을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진압할 정도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아즈텍의 중추였던 대도시 테노치티틀란(Tenochititlan)의 인구는 약 15 ~ 30만 명인데,
    이는 당시 유럽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거대한 규모였다.
     
    이후 1500년대 초반에 에르난 코르테스의 공격으로 인하여 쇠락하였고 결국 불과 수 년만에
    한줌의 에스파냐 정복자들과 그들이 선동한 다른 남미계 부족들의 공격으로 아즈텍 제국은 멸망해버렸다.
    왜 이 거대한 제국이 그리도 쉽게 망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에스파냐의 총과 말(남미에는 말과 같은 동물 뿐만아니라 가축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동물도 없었다.
    오죽하면 인육을 섭취했을까...)로 대표되는 강한 군사력과 주변 부족들의 적의,
    유럽에서 건너온 신종 전염병인 천연두 정도로 요약된다.
    사실 인신공양도 전술한 원인 못지 않았다. 하지만 아즈텍이 몰락한 제일 큰 원인은 천연두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신공양 관습 으로 인근 도시들을 핍박했던 것때문에.
    인근 원주민들의 도시국가들은 에스파냐가 본격적으로 아즈텍 정벌에 나서자
    자발적으로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고, 꽤 큰 규모의 병력까지 제공했다.
    쉽게 말해서 인근 도시들을 핍박하니 그들이 도와주기는커녕 멸망하라고 부추긴 것.
    아무리 화력에 무기/갑주가 좋아도 에스파냐인들만으로는 무리 또는 굉장히 힘들었을
    전쟁이 원주민들 덕택에 유리해진 것. 특히 제물 대상자들의 스페인 정복자들에 대한 지지가 매우 적극적이였다.
    그들에게 스페인 정복자들은 자신들이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막아줄 유일한 사람들이였기 때문이다.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은 25만명이 살던 초거대 도시로, 호수 속에 있었던 자연요새였다.
    게다가 테노치티틀란의 25만명의 시민들은 유사시 전부 전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변 원주민 도시들과 협력을 통해 한 번 도시에 갇히게 되고 에스파냐인들이
    조립식 전함을 동원해서 호수를 장악하자, 호수는 오히려 아즈텍인들을 봉쇄하는 치명적인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텍스코코 호수는 석회수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본래 마실 수 없었고,
    고립된 상황 속에서 이 물을 마시게 된 아즈텍인들은 병들어 더욱 위기에 몰렸다.
    고립된 상황과 석회 성분이 많은 호수는 전염병의 대유행도 불러왔다.
    결국 1521년, 아즈텍은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4. 유럽의 흑사병 (1347~170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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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에서는 1347년 처음 창궐한 이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여 공포의 대상이었다.
    1340년대 흑사병으로 약 2천5백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 때의 흑사병은 중앙아시아나 인도에서 발원하여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당시 유럽의 인구의 약 30%에 달하는 숫자이다.
    최초의 흑사병 확산이후 1700년대까지 100여 차례의 흑사병 발생이 전 유럽을 휩쓸었다.
     
    14세기 중세 유럽에 퍼져나간 흑사병은 "대흑사병"이라 불린다.
    14세기 유럽의 흑사병은 사회 구조를 붕괴시킬 정도로 유럽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왜 생기는지는 몰랐기 때문에, 거지, 유대인, 한센병 환자, 외국인 등이
    흑사병을 몰고 다니는 자들로 몰려서 집단폭력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학살을 당하기도 하였다.
    물론 사회학적으로 비평했을 때 흑사병 기간동안 일어난 학살들은 마녀사냥처럼 흑사병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전가한 희생양적인 폭력이었다.
     
    한편, 흑사병의 창궐은 삶에 대한 태도도 바꾸어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는 신조를 낳았고,
    이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등에 반영되었다.
    흑사병은 유럽인들의 종교적인 사고에도 영향을 주어,
    일부 사람들은 하느님이 흑사병으로 심판하니 고행을 함으로써 죄를 씻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유럽 지역의 인구는 흑사병으로 인해 지역에 따라 1/3 ~ 1/2 규모로 감소하였다.
    14세기 유럽의 흑사병 희생자는 총 7천5백만 명에서 2억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 중세사를 연구하는 사학자 필립 데이리더는 2007년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한 초기 4년간의 희생자는 통상 인구의 45% ~ 50% 로 추산되고 있으나 이는 총괄적인 수준의 기록이다.
    실제 유럽에서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사망률을 보였는데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남부 등에서는
    지역에 따라 인구의 80%가 희생되는 경우도 빈번하였다.
    한편 북부 독일, 잉글랜드 등지에서 초기 4년 동안의 사망률은 20% 정도였다"
     
     
    5.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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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942년 8월 21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스탈린그라드(현재 이름은 볼고그라드)
    시내와 근방에서 소련군과 추축군 간에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전투에서 약 200만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인간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이 전투는 독일 제6군과 다른 추축국 군대의 스탈린그라드 포위와 이후의 소련군의 반격으로 이루어져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단일 전투였다.
    이 전투는 199일간 지속되었다. 전투의 범위가 광대했고,
    사상자 수가 지나치게 많을 것을 두려워 한 소련 정부의 금지 때문에 정확한 집계도 어려웠다.
    전투 초기에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심한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소련군이 독일군의 측면(주로 루마니아군)을 돌파하여 독일 제6군의 나머지를 포위하기 전에도
    독일 제6군은 이미 큰 손실을 입고 있었다. 어떤 때는 독일군이 시의 90%를 장악하기도 했으나
    소련군 장병들은 독일군의 점령 지구 안에서 필사적으로 싸웠다.
    독일 제4기갑군의 일부도 스탈린그라드 주변의 소련군의 반격 때 심한 손실을 입었다.
     
    많은 학자는 이 전투에서 추축국의 병력 손실(전상 및 전사, 포로 등 포함)이 85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한다.
    독일이 40만 명, 루마니아가 20만 명, 이탈리아가 13만 명, 헝가리가 12만 명에 달하는 인명 손실을 본 것이다.
    전투에서 살아남아 포로가 된 9만 명도 1943년 봄에 대부분 티푸스로 사망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소련에 억류되어 전후 복구 사업에 강제 동원되다가 최종적으로 1955년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자는
    5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독일도 소련군 포로를 가혹하게 다루긴 마찬가지였다.
     
    5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 출신 독일 부역자(히비(Hiwi))들도 소련군에 사살되거나 잡혀 처형되었다.
    각종 문헌 자료에 따르면 소련군의 손실은 총 1,129,619명이라고 한다.
    478,741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650,878명이 부상당했다.
    이 수는 작전의 범위를 넓게 잡아 추산한 것이다. 또한, 독일 제6군과 제4기갑군이 시내로
    진격해 온 첫 주의 공습에서 4만여 명의 소련 민간인이 시내나 교외에서 사망했다.
    시 이외의 민간인의 총 사망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소련과 추축국의 전체 인명 피해는 170만에서 200만으로 추정된다.
     
     
     
    6. 중국의 대기근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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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중국의 제1차 5개년 계획이 끝난 후,
    중국공산주의의 첫 번째 단계는 자급자족의 공산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니만큼,
    마오는 공산주의 이행 속도를 증진해야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마오는 "대약진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것의 목표는 식량과 철강 생산을 증산하여 단번에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려는 계획이었다.
     
    산업발달의 척도가 되는 철강 생산을 위해 전국적으로 각 마을마다 재래식 고로를 세우도록 하였다.
    또다른 목표인 식량증산을 위해서 농촌에 존재하던 소규모 협업조직인 호조조(互助組)를 해체하고
    이를 대규모로 만들어 집단농업과 집단동원을 위한 인민공사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재앙으로 변했다.
    농민들이 농사보다는 질낮은 철을 생산하는 데 몰두했기 때문에, 전 산업계는 혼란에 휩싸였다.
    이런 철들은 목표량 달성에 급급한 관리들이 농민들을 몰아붙여 농가의 마당에 설치된
    구식 화로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에 산업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 동안 대량의 농기구들이 이런 화로에서 철 생산을 위해 녹여졌기 때문에 농업생산은 급격히 감소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지역담당자는 처벌을 면하기 위해 허위생산량을 보고하여 문제가 커졌다.
    수십 년간 계속된 내전 및 중일 전쟁, 한국 전쟁으로 타격을 입었던 중국경제는 회복되는 듯하다가 다시 한번 침체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철강 생산량은 연간 520만 톤에서 1400만 톤으로 눈에 띄게 늘어났다.
    처음의 목표는 비현실적으로 연간 3000만 톤의 철을 생산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후에 더 현실적인 2000만 톤으로 조정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생산된 철은 대부분 질이 떨어졌고,
    처음에 목표한 산업발전을 위한 기자재로 쓰기에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그동안 식량생산에서도 문제가 불거져서, 농민들이 철생산에 매달린데다가,
    이런 철생산을 위한 연료로 쓰기 위해 목재를 남벌한 결과 1958년부터 여름마다 홍수가 나서 농경지는 침수되었다.
    또한 대약진운동과 함께 벌어진 제사해 운동에서는 참새를 유해조로 지정해서 대대적 퇴치운동을 벌였는데,
    이때문에 생태계의 균형이 깨져 여름에 병충해가 창궐하게 되었다.
    여기에다가 집단화된 농업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비효율의 극치를 달렸고,
    더욱이 검증이 안된 새로운 작황법을 도입해 종자를 밀집되게 심었다가 도리어 생육에 지장만 주었다.
    그리하여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대규모의 기근이 발생했다.
    더욱이 광범위한 기근을 발생하였는데도 중국정부는 소련의 기술도입료와 차관상환을 곡물로 하여 해외 수출을 계속하였다.
    기근은 매우 심각했고, 이때 기근으로 사망한 이들은 2,000만-3,000만으로 추산된다. 이 기근은 1961년까지 계속되었다.
     
     

    7. 대서양 노예무역 (1500s~1800s)
     
    traversee-danse-jpg.jpg

    노예무역은 14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수없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노예가 되었고 죽음을 당했다

    유럽, 아프리카, 중동, 그리고 신세계의 인구를 모두 합한 수에서
    아프리카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노예무역과 함께

    1600년과 1900년 사이에 약 30%에서 10%를 약간 넘는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패트릭매닝

    노예무역은 16세기엔 소규모로 이루어지다가
    17세기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여
    18세기엔 절정에 달했고
    10년간의 노예 수출 수가 가장 많았던 때는 1780년대로 약 79만 7000명이 수출되었다.
     
    1451년에서 1870년에 이르기까지 800만에서 1050만명이 노예로 수출되었다

    노예 무역은 인구학적으로 정치학적으로 경제학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이 사람을 팔았던 사건과 사실임에 주목해야 한다
    아프리카인들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모두가 동일한, 존중받고 사랑받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받을 권리가 아프리카인들에게 있었다
    하지만 서구열강의 나라들은 그들의 필요를 위해, 생명의 가치는 버려진채로
    마음껏 유린하고, 가지고 쟁취하고 지배했다

    현대의 풍요로운 유럽의 모습과
    여전히 비참한 아프리카의 모습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재미있는 사실은, 서구권의 식민침탈이 시작되었을때
    아프리카에 재앙이라고 말할 수 있을만한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루안다 인구의 4분의 1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천연두
    그리고 콜레라, 매독,전염병들, 기근, 가뭄등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까지 이어졌다

    '전쟁, 가뭄, 기근, 전염병, 메뚜기떼, 우역! 왜 그토록 많은 재해가 끊이질 않는것일까?'
    '도대체 왜?' - 프랑수아 코이야르 선교사 1896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비참했던 과거의 일제강점기 시간들을 잘 알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주권을 상실하고 가족이 파괴되던, 권력과 탐욕에 의해 짓밟힘 되었던 역사는
    약소국에겐 끊임이 없고, 지금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 과거의 오랜역사의 한 부분인 노예무역의 시간들앞에서 말할 수 있는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지나가고 현재까지 아프리카인들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8. 르완다 집단 학살 (1994)
     
    Refugees-from-Rwanda-in-G-007.jpg

    르완다 집단 학살(Genocide in Rwanda)이란 1994년 르완다에서 르완다 내전중에 벌어진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과 후투족 중도파들의 집단 학살을 말한다.
    4월 6일부터 7월 중순까지 약 100여일간 최소 50만명이 살해당했으며 대부분의 인권 단체들은
    약 80만명에서 100만명이 살해당했다고 주장한다.
    현재 르완다 정부는 이 학살에서 100일 동안 1,174,000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것은 1일당 1만명, 1시간당 400명, 1분당 7명이 살해당한 것과 같다.
    또한 수많은 여성들이 남편을 잃고 강간을 당해, 지금까지도 수만명이 HIV에 감염되어 있다.
    또한 이 기간동안 약 40만 명의 고아가 발생했다.
     
    르완다 내의 투치족에 대한 학살 준비는 정부 차원에서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학살 개시 당시 이미 르완다 내에서는 3만여명이 AK-47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비무장 후투족도 간단한 서류 작성 후에 이 무기들을 공급 받았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장 캄반다는 르완다 국제 전범 재판소에서 당시 정부 각료회의에서도
    투치족 말살론이 공공연히 논의되었고 한 각료는 "개인적으로도 투치족들을 말살시키는 데 찬성한다.
    투치족이 없다면 르완다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주장을 했었다고 증언했다.
    재판 당시 지방 정부 차원에서도 시장들과 경찰관들이 집단 학살에 대해 논의하고 또 그것을 이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9. 홀로코스트 (1945)
     
    The-Holocaust-1.png
     
    홀로코스트(Holocaust) 혹은 유대인 대학살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전멸시키려는 목적으로 자행하였던 제노사이드이다.
    히브리어로는 쇼아 라고 하는데, 구약성서의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를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나치 독일은 유대인 외에도 공산주의자, 동성애자, 집시, 정신지체 장애인을 포함한 장애인,
    소련의 전쟁포로, 여호와의 증인과 프리메이슨 등 여러 ‘원치 않는 부류’를 유대인과 함께 학살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집단수용소에 옮겨져 조직적으로 학살되었으며,
    장애인의 경우는 의사에 의해 안락사시키는 방법으로 5만명이나 학살했다.
     
    홀로코스트로 인해 사망한 유대인의 수는 대략 6백만 명 정도이며,
    나치의 탄압에 의해 죽은 비유대인을 포함시킬 경우 총 사망자 수는 9백만에서 천만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종전 후 희생자 수에 대한 과장 부분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으며
    148만명에서~ 최소 86만명까지로 주장하는 프랑스의 라니에리 같은 외국 학자들도 있으며
    아우슈비츠의 추모 기념 석판에는 학살자수가 400만명이었다가 1990년 이후 150만으로 수정한 석판으로 교체하였다.
     
    히틀러와 NSDAP가 왜 이렇게 많은 유대인을 학살했는지에 대해서는
    단지 히틀러가 내세운 "반유태주의" 때문이라고만 사람들은 알고 있다.
    히틀러가 반유태주의자가 된 이유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설명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심리학까지 동원되고, 어머니가 어느 유대인의 정부였다는 설까지 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는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만으로 설명되기 힘든 사회적 요인들을 수없이 안고 있다.
    나치 독일 이전부터 유럽 전역에 만연해있던 반유대주의가 나치의 집권과 함께
    극우아리안민족주의와 맞아떨어지며 홀로코스트의 첫 추동력을 형성하였으며,
    이것이 나치의 폴란드 침공으로 발발된 제2차세계대전의 진행과 함께 그 형태를 달리해가며
    심화되어간 결과 홀로코스트라는 대학살극, 일명'최종해결책'으로 귀결된 것이다.
     
    나치는 집권 후 상당수의 유대인 관련 법을 제정하였는데 이는 유럽 역사에 있었던
    수많은 유대인 억압 규범들과 많은 부분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이 나치의 순수한 창작물이 아닌 기존에 있던 반유대주의의 심화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치는 유대인이란 누구인가를 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러한 규정에 따른 사회적 불이익을 가하였고,
    이것이 심화되어 격리수용, '게토'로 대표되는 정책으로 발전한다.
    그 후 나치는 유대인으로 분류되어 사회로부터 격리된 이들의 강제이주를 고려하기 시작하는데
    전쟁으로 인해 해외강제이주정책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최종해결책'이라는
    이제껏 인류사에 유래없는 학살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참조 : 위키백과
             디시인사이드 해전갤러리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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