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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59153
    작성자 : 왕눈이개구리
    추천 : 23
    조회수 : 4103
    IP : 112.158.***.40
    댓글 : 11개
    등록시간 : 2013/10/21 22:34:30
    http://todayhumor.com/?panic_59153 모바일
    쭈욱캬님의 방탈출 이거 맞나요? 일단 1부만..
    1.jpg
    그림을 보고 상상한 이야기를 적는 중입니다.


    1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그동안 나는 스프의 섭취량을 최소한으로 줄여 살을 뺐다. 더 굶었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즈음 탈출을 시도했다. 머리부터 구멍에 집어넣고 발가락으로 바닥을 밀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통로는 비좁을 뿐더러 빛이 통하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들어온 지 삼십분 정도 지나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서서히 근육에 경련이 일어났다. 앞으로 갈수록 통로는 점점 협소해졌다. 살을 빼지 않았다면 진즉에 구멍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가다가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면 나는 서서히 굶어죽게 될 것이다. 최악을 상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경험해보니 공포의 강도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죽게 될 거라는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빌어먹을, 이런 곳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얌전히 스프나 받아먹었으면 이렇게 비참하게 죽진 않았을 걸… 도대체 어째서 나는 이런 일에 휘말려버린 걸까?’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눈자위가 뜨거웠고, 귀에 이명이 울렸다. 한계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발가락에 힘을 줬다. 순간 머리에 닿는 콘크리트의 느낌이 사라졌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비틀어 필사적으로 전진했다. 머리와 어깨, 그리고 허리까지 빠져나오자 그 다음은 수월했다. 간신히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자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기침을 했다.
    빠져나온 건가?
    하지만 주변은 여전히 어두컴컴해서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적당히 휴식을 취한 다음 몸을 일으켰다. 상황을 파악하려고 벽을 더듬거리는데 손가락에 스위치가 걸렸다. 그것을 누르자 천장에 불이 들어오며 방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절망했다.
    방의 구조는 이전과 동일했다. 사방이 콘크리트로 막힌 입방체 구조를 배경으로 스프가 나오는 튜브, 그리고 내가 들어온 곳과 똑같이 생긴 구멍이 보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 방의 크기가 전에 비해 절반가량 작았고, 시커먼 구멍이 맞은편에 하나 더 뚫려 있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주먹으로 벽을 치고, 악을 썼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죽음을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육체는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나는 형이상학적인 무늬가 그려진 접시를 스프 투입구 아래 받치고 튜브를 잡아당겼다. 걸쭉한 액체가 꾸역꾸역 흘러나와 접시를 채웠다. 나는 스프를 물처럼 들이키며 결심했다. 다시는 저 구멍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그러나 키케로는 말했다. 시간이 덜어주거나 부드럽게 해주지 않는 슬픔이란 하나도 없다고. 나의 공포와 결심도 흐르는 시간 앞에서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게다가 아주 은밀하게 거리를 좁히는 벽은 언젠가 나를 쥐포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
    나는 심호흡을 하고 구멍을 노려봤다. 그리고 천천히 머리를 집어넣었다. 콘크리트로 된 단단한 통로가 몸을 압박하자 애써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나아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통로는 전과 달리 곡선으로 휘어져 있었다. 때문에 움직이는 게 훨씬 힘들었다. 휘는 부분에 관절이 걸릴 때마다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눈에 땀이 들어가서 따끔거렸지만 닦을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아무리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내 운도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지동물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앞으로 기어가던 내 앞에 갈림길이 나타난 건 그때였다.
    머리에 닿는 느낌으로 미루어보아 구멍은 두개였다. 한쪽은 비교적 넓었고, 다른 한쪽은 지금과 같았다.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넓은 쪽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순간 좁은 쪽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여자의 흐느낌이었다. 어쩐지 음산한 소리였지만, 나 말고도 이곳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할 만큼의 위안을 주었다. 나는 당장의 편안함을 포기하고 좁은 곳을 선택했다. 그리고 선택한 방향으로 급하게 밀고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희미한 빛이 통로로 새어 들어왔다. 출구였다.
    머리를 구멍 밖으로 끄집어내자 여자의 새된 비명이 들렸다. 나는 온힘을 다해 간신히 구멍에서 빠져나왔다. 여자는 뒷걸음질을 쳐 방구석으로 물러났다.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방의 구조는 이전과 같았다. 내가 들어온 구멍 외에 다른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넓은 쪽으로 갔어야 했나.'
    나는 기진맥진해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자가 내 행동에 놀랐는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는 검정색 스웨터에 스키니진 차림으로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이었다. 여자는 아무런 말없이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적당히 숨을 고른 뒤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나도 그쪽처럼 여기 갇힌 사람이에요.”
    여자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저 구멍 너머에 있는 방에서 왔습니다. 절대 나쁜 사람 아니니 걱정 마세요.”
    그제야 조금 안심한 듯 여자가 입을 열었다.
    “여기 말고 방이 또 있나요?”
    “네, 아마도 저 구멍은 방과 방을 연결하는 통로 같아요.”
    여자에게 내가 지나온 길을 대략적으로 설명해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의 눈자위가 붉었다. 화장도 번져 있었다. 아까의 흐느낌으로 미루어보아 지금까지 울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설명이 끝나자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서 정말 무서웠는데 조금 안심이에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운이 났다. 그렇지만 마음을 놓기엔 일렀다. 상황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요?”
    내 말에 여자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 택시만 안탔어도.”
    “택시요?”
    내가 묻자 여자가 말을 이었다.
    “친구랑 술을 마시고 나와서 자정쯤 택시를 탔거든요. 택시기사가 방향제라면서 자꾸 뭘 뿌리는 게 이상했는데 그때부터 잠이 쏟아지더라고요. 일어났더니…”
    그때를 생각하자 분한 듯 여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이내 한숨을 내쉬며 나를 쳐다봤다.
    "그쪽도 택시 탔어요?"
    "아, 전…"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사실 저는 기억이 나질 않아요.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여기 오게 됐는지…”
    여자가 미심쩍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내 과거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당장 이상하게 보인다고 해도 괜히 거짓말을 해서 나중에라도 의도치 않은 오해를 사고 싶지는 않았다. 여자는 곧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는지 입을 열었다.
    “사정이 어떻든 지금은 여기서 나가는 게 우선이겠죠.”
    나도 동감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이어 말했다.
    “전 이수정이라고 해요. 그쪽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냥 편한 데로 부르세요.”
    수정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손가락을 튕겼다.
    “이름을 모른다고 했으니까 무명 어때요?”
    “나쁘지 않네요.”
    상황이 일단락되자 수정은 어깨를 펴고 심호흡을 한 뒤 나를 쳐다봤다.
    “자, 그럼 이제부턴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무명씨.”
    수정의 질문에 나는 이 방에 들어오기 전에 지나쳤던 분기점에 대해 설명했다.
    “일단 가보지 않은 길은 그곳뿐이니까 조금 쉬었다가 바로 출발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수정을 쳐다보며 물었다.
    "같이 가실 거죠?"
    수정은 내 시선을 피해 비좁은 구멍을 힐끔 보곤 마른침을 삼켰다.
    “저긴 도저히 들어갈 자신이 없어요.”
    “하지만 밖으로 나가려면 시도해 봐야죠.”
    내 설득에도 수정은 물러서지 않았다.
    “무명씨가 먼저 탈출해서 구조대를 불러주면 되잖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탈출한다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이 방은 뭔가 위험해요.”
    "위험하다뇨?"
    수정의 속편한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이 방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다.
    “생각해 봐요. 이 방은 출입구가 없어요. 그럼 우리가 어떻게 들어왔을 것 같아요? 설마 저곳으로?”
    손가락으로 구멍을 가리켰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수정도 잘 알 것이다. 생각지 못한 위협에 충격을 받은 듯 그녀는 멍한 표정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내가 생각한 가설을 설명했다.
    “각각의 방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떤 식으로 재조립되고 있는 거예요. 모든 방이 같은 속도로 변하는 건 아니겠지만… 전에 지나쳐온 방은 여기의 절반 정도의 크기였죠. 아마 지금은 더 작아졌을 겁니다. 내가 처음 탈출을 결심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여기도 한동안은 괜찮겠지만 언젠가 선택해야할 때가 올 겁니다.”
    수정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어쨌든 전 이제 출발할 거예요. 따라오든 여기 계속 머무르든 선택은 수정씨가 해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예의 그 압박감이 전신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러나 처음처럼 공황상태에 빠질 정도는 아니었다. 뭐든 반복할수록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나는 발끝에 힘을 모아 몸을 천천히 앞으로 밀었다. 어느 정도 진입했을 때 뒤에서 수정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기다려요! 저도 갈게요.”
    그녀의 선택에 마음이 놓였다. 체구가 작은 여자라 아무래도 나보다 움직이기가 수월할 것이다. 나는 소리쳤다.
    “잘 생각했어요. 좀 천천히 갈 테니까 서두르지 말고 따라와요.”
    “뭐라고요? 무명씨 잘 안 들려요.”
    수정의 말에 나는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외쳤다. 공간의 구조적인 특수성 때문에 뒤에 있는 사람은 앞에 있는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목소리를 알아듣기 어려운 것 같았다. 여러 번 반복한 뒤에야 수정이 알았다고 대답했다.
    머뭇거린 것에 비해 의외로 수정은 잘 따라왔다. 중간에 불안한 듯 종종 나를 소리쳐 불렀지만, 그때마다 나는 큰 목소리로 대답해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분기점에 도착했다. 왼쪽의 좁은 구멍은 내가 왔던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고, 오른쪽의 넓은 구멍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나는 수정이 행여 엉뚱한 길로 가지 않도록 몇 번이나 반복해서 오른쪽으로 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수정이 알겠다고 대답하자 나는 갈라진 구멍으로 머리를 들이 밀었다.
    넓다고는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으로 지금까지에 비해 그렇다는 뜻이지 몸을 돌리거나 손과 발을 사용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기가 한결 수월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힘차게 발끝으로 땅을 밀어내는 순간 서늘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나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이를 악물었다. 무리를 한 탓에 발톱이 빠진 것 같았다. 내가 멈추자 뒤에서 수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행여 수정에게 불안감을 줄까 싶어 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발을 놀렸다. 누가 발톱에 바늘을 박아 넣은 것처럼 움직일 때마다 몸에 경련이 일었다. 콧잔등에 맺힌 땀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간신히 앞으로 나아가던 중에 나는 정수리를 단단한 콘크리트 벽에 부딪혔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이 앞은 막다른 길이었다.
    머릿속이 물감을 엎지른 것처럼 하얗게 변했다. 머리를 벽에 대고 있는 힘껏 밀어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캄캄한 통로 안에서 그야말로 완벽하게 갇혀버렸다.
    “무명씨?”
    뒤에서 수정이 나를 불렀다.
    어떡하지?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하지만 그런 고민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뭐라고 해도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구멍에 들어온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수정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더라도 이젠 솔직하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수정 씨. 미안해요. 이길 막다른 곳이에요.”
    “그럼 다시 뒤로 가면 되는 건가요?”
    대수로울 것 없다는 수정의 말에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그게 돼요?”
    “네, 아까 불안해서 실험해 봤는데 되던걸요.”
    나는 모종의 희망을 가지고 몸을 뒤로 밀어보았다. 하지만 자세가 자세니만큼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내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마 늘씬하고 작은 체구의 수정이기에 가능한 방법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라도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러면 혼자라도 돌아가세요. 전 고물차라 후진이 안 되네요.”
    덤덤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수정은 놀란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이내 내 발목을 붙잡고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만류했다.
    “소용없어요. 괜히 힘 빼다가 수정씨도 여기서 탈진해 버리면…”
    나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느리긴 해도 확실히 나는 수정이 당기는 만큼 뒤로 끌려가고 있었다.
    “수정 씨.”
    “말 좀 시키지 마요. 힘들어 죽겠으니까.”
    수정은 빽 소리를 지르곤 묵묵히 나를 끌어당겼다. 중간에 템을 두고 쉬어가며 이동한 끝에 우리는 간신히 둘 다 분기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뒤로 나온 곳이 수정의 방으로 가는 통로라 우리는 자연스레 처음 내 방으로 향하는 길 쪽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탁 트인 공간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와 수정은 바닥에 늘어져서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땀에 푹 젖었지만, 둘 다 살아남았다. 난 어떤 말로도 수정에게 내 고마운 마음을 다 전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몸을 추스른 뒤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수정 씨한테 목숨을 빚졌네요. 내가 이 은혜는 반드시 갚을게요.”
    수정은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나도 혼자 남기 싫어서 그런 거니까. 저 배고파요. 밥 먹어요.”
    우리는 접시에 스프를 받아 차례로 배를 채웠다. 한결 안정된 기분으로 벽에 기대어 앉아 있자니 잠이 쏟아졌다. 꾸벅꾸벅 졸던 수정은 이내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잠이 들었다. 나는 그녀와 조금 떨어진 곳에 몸을 뉘였다. 우두커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전에 왔을 때보다 방이 커졌다. 하지만 어째서?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의혹은 곧 어떤 결론에 닿았다. 나는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외쳤다.
    “그래, 그거였어! 이 방의 비밀은…”
    내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수정이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그녀가 잠에 취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왜 그래요?”
    나는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수정 씨 어쩌면 우리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몰라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수정의 눈동자가 빛났다. 나는 방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처음 이 방에 왔을 때, 이곳은 우리가 있던 방보다 절반이나 작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죠?”
    “원래 있던 곳이랑 비슷한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렇다는 건 여기 구조가 바뀌었다는 뜻이에요.”
    수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조가 바뀌다뇨?”
    “전에 방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 말 생각나요?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는데 이젠 알 것 같아요.”
    수정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었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각자의 방에서 뭔가를 했기 때문일 겁니다.”
    내 말에 수정이 혼란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전 여기서 아무 것도 한 게 없어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나는 말꼬리를 흐리는 수정에게 재차 설명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예컨대 이 방에 있는 전등 스위치를 누른다거나, 아니면 여기 스프가 나오는 튜브를 살짝 돌린다거나 하는 행동이 이곳의 구조를 바꾸는 키워드일지 모른다는 거죠.”
    수정은 팔짱을 끼고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럼 아까 그 막다른 길도 우리가 이곳에서 뭔가를 하면 통로를 개방한다는 뜻인가요?”
    “바로 그겁니다.”
    하지만 아직 가설에 불과하기에 나는 한발 물러섰다.
    “물론 확실한 건 아니에요. 그래도 충분히 생각해볼 가치는 있어요. 우리가 다닐 수 있는 통로 내에서 방은 총 세 개고, 사람은 우리 둘이죠. 그것도 어쩌면 둘이 힘을 합쳐야 이곳을 나갈 수 있다는 뜻인지 몰라요. 우리를 가둔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요.”
    내 말이 끝나자 수정이 감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명씨는 그런 걸 잘도 생각해 냈네요. 꼭 이런 일을 겪어본 사람처럼. 정말 대단해요.”
    수정은 칭찬하는 뜻으로 한 말이겠지만, 그 순간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더니 정체불명의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산발적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이 방과 관련된 이미지들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것을 유의미하게 조합하진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았다. 내가 이 방에 온 건 처음이 아니었다.
    “무명씨, 괜찮아요?”
    수정의 목소리에 이미지의 파편들이 산산이 흩어졌다. 정신을 차리자 코피가 인중을 타고 흘러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소매로 코를 닦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피가 멎고 나니 아쉬우면서도 머쓱한 기분이었다.
    "많이 피곤했나 봐요."
    수정이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나는 손으로 콧잔등을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래도 나갈 수 있는 단서를 얻었다는 게 어딥니까.”
    “그렇긴 하지만…”
    나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나머지는 일단 잠부터 자고 나서 생각해요. 저도 그렇지만 수정씨도 안색이 별로 안 좋아요.”
    수정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우리는 스프로 배를 채운 뒤, 어제 말했던 대로 방에 있는 물건들을 확인했다. 극단적으로 단순한 구조의 방이었기에 어려울 건 없었다. 방에는 전등 스위치와 스프 투입구, 그리고 작은 수도꼭지가 전부였다. 우리는 그것들로 가능한 조작방법을 고민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수정이었다.
    “일단 전등 스위치는 on이나 off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에요. 그리고 수도꼭지도 물을 틀어놓느냐, 아니냐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스프는 먹느냐 아니냐겠네요?”
    따라서 세 개의 방을 돌아다니며 전등 스위치와 스프 투입구, 그리고 수도꼭지를 건드리다보면 유효한 조작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그 경우의 수가 무려 512가지나 된다는 점이었다. 통로를 한번 오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더구나 스프의 경우 튜브를 한 번 잡아당길 때마다 일정량이 나오는 구조였는데, 나는 한 끼에 보통 다섯 번을 잡아당겼고, 수정은 세 번 정도였다. 단지 먹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몇 번 잡아당겨야 하는 지까지 맞춰야 한다면 시도해 볼 경우의 수는 무한정 늘어난다. 터무니없다는 생각에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지만,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손가락으로 셈을 헤아리던 수정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되든 안 되든 시도해 봐요. 어차피 시간은 우리 편이니까."
    내 생각에도 그게 최선이었다. 우리는 세 개의 방을 돌며 전등 스위치와 수도꼭지 그리고 스프 투입구를 차례로 조작해 탈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방의 구조가 조금씩 달라지는 걸 확인한 우리는 당장이라도 나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정작 중요한 통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열리지 않았다.
    각각의 방으로 찾아가는 일부터 고역인대다가 애써 해놓은 조작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엔 기운이 쭉 빠졌다. 게다가 나는 발톱을 다쳐 통로를 오래 다닐 수가 없었기 때문에 수정의 부담이 커졌다. 넘치던 의욕은 시간이 흐를수록 차츰 사그라졌다. 나중엔 과연 이 방법이 맞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우리는 체력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몰렸다. 그날 밤 나는 수정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내가 놓친 게 무엇인지 생각했다.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를 가둔 자의 목적은 무엇일까?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에게 원한이라도 산걸까? 그 자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려고 이런 방에 가둔 걸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잡아다 고문을 하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그리고 간간이 떠오르는 기억을 조합한 결과 나는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뭘까?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 잠든 줄 알았던 수정이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며 스프 투입구로 걸어갔다. 접시를 집어 들더니 바닥에 내려쳤다. 유리접시는 산산조각이 났다. 수정은 그 중 뾰족한 부분을 집어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뭐하는 거예요!”
    나는 황급히 달려가 수정의 손을 붙잡았다. 수정이 몸을 버둥거리며 울부짖었다.
    “놔요! 어차피 우린 못나가. 여기서 죽을 거라고요.”
    “그렇지 않아요. 나갈 수 있어요. 내가 장담할 게요.”
    한참을 실랑이한 끝에 수정은 몸에 힘을 뺐다. 나는 그녀를 보듬어 안고 등을 쓸어주었다. 시간이 지나자 수정의 흐느낌도 잦아들었다. 수정을 달래 재우고, 나는 깨진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커다란 파편을 주우려고 허리를 굽히는 순간 어떤 예감이 머릿속에 번뜩였다. 나는 유리조각의 깨진 부분을 집어 들고 유심히 살폈다. 전체와 어우러졌을 땐 형이상학적인 무늬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알파벳 F처럼 보였다.
    “혹시…”
    나는 깨진 유리조각을 모아 원래대로 맞추기 시작했다. 접시가 온전한 형상을 갖추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접시에는 'OFF, X, 7'이라는 기호가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추측대로라면 OFF는 스위치를 끄라는 뜻, X는 물을 틀지 말라는 뜻, 그리고 숫자 7은 스프의 튜브를 7번 당기라는 뜻이 된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어째서 전에는 못 봤을까?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잠든 수정을 보고 애써 입을 다물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깨워서 이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지만, 수정에겐 휴식이 필요했다. 그리고 또 어떤 변수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경거망동은 그만두자.
    바닥에 누워 뒤척이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수정이 머리맡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잠을 자서인지 어제와 달리 안색이 한결 밝았다.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제 미안했어요.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져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 수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알아냈어요. 조작방법.”
    순간 수정이 동작을 멈췄다.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그녀에게 나는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했다. 수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농담하는 거죠?”
    그녀의 손을 잡고 깨진 접시를 맞춰둔 곳으로 이끌었다. 내가 알아낸 것을 설명하자 수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기대 안 할래요. 그랬다가 또 아니면 어떡해요?”
    “네, 우리 기대하지 말고 한 번 해봐요.”
    그녀도 나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찾아낸 것이 정답임을 믿었다. 접시에 나온 대로 방안의 물건을 조작한 뒤 각자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그 동안 발톱의 상처가 거의 아물어서 나도 움직이는 건 별로 지장이 없었다.
    처음 내가 있던 방으로 돌아가 살펴보니 역시 접시에 기호가 있었다. 'ON, O, 3' 조작을 마치자 먼 곳에서 기계음이 나며 방이 부르르 진동을 했다. 구멍으로 들어가 중간 방으로 돌아왔을 때 수정이 먼저 일을 마치고 도착해 있었다. 나는 수정의 눈치를 살피며 통로를 빠져나왔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안 됐어요?”
    수정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됐어요. 열렸어요.”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근데 왜 울어요?”
    “기뻐서요.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무명씨랑 같이 가려고 돌아왔어요.”
    수정의 말에 나는 묘한 감동을 느꼈다. 참을 수가 없어서 수정을 힘껏 끌어안았다. 수정도 나를 마주 안았다. 이곳에서 나가더라도 이 여자를 계속 만나고 싶었다. 그녀도 같은 생각이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아직 마음을 놓을 단계는 아니었다. 나는 애써 감정을 갈무리하고 그녀와 떨어졌다. 어찌됐든 탈출이 먼저다.
    또 다시 막다른 길이 나올지 몰랐기 때문에 내가 앞장서서 구멍으로 들어갔다. 수정이 그 뒤를 따랐다.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통로는 열려 있었다. 이 앞은 출구일까? 아니면 또 다른 미궁일까? 미래는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1부 마침
     
    전에 제컴에 저장하길 잘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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