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피겨 스케이팅이라고 하면 귀족 스포츠...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의상비, 안무비, 분 단위로 나가는 코치비에 링크 사용료....
이렇게 저렇게 하다보면 일년에 5000만원이 넘게 드는 운동인데, 국제 대회에서 몇번이나 우승을 한
연아양에게 아직도 기업 스폰서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네요.
연아양 아버님이 하시는 개인사업이 안좋아서 연맹 차원의 훈련비 지원만으로는 너무 힘이 든답니다.
그럴 법도 것이, 연아양 같은 경우 일년에 국제대회를 5개 정도 나가는데,
선수 본인의 비행기 티켓과 숙소는 지원이 되지만 동행하는 코치 선생님 앞으로 나가는 돈은
모두 선수가 지불하게 되어 있거든요.
대회가 일본이나 중국 같은 곳에서만 열려도 좋지만... 대부분 유럽과 북미 쪽입니다.
이 돈만 한 해에 천만원이 가뿐히 넘습니다.
또 피겨 강국이 아닌 나라 선수들은 보통 유럽이나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가게 되는데요.
일본처럼 돈 많고 연맹 지원이 확실한 나라 선수들은 3개월에서 6개월(아예 체류하는 경우도 많아요) 동안
그곳 안무가와 작업을 하고 세계적인 코치 밑에서 프로그램을 점검하는데,
연아양은 올해 딱 6주 전지 훈련을 다녀왔다네요.
피겨 스케이팅 안무비는 안무를 한번 짜주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선수와 안무가가 음악에 맞춰서
몇번이고 고쳐가며 다듬는 것인데, 그러는 동안 또 시간당 페이를 지불해야합니다.
구체적인 액수는 정말 놀라실 정도에요.
그렇다보니 이번 시즌에도 김연아선수는 쇼트 프로그램만 겨우(그것도 일류라고는 할 수 없는 안무가
들에게) 지도받고, 정작 중요한 프리 프로그램은 작년 것을 재탕했습니다.
한창 성장하는 선수에게 프로그램 재탕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시겠죠.
이건 일년에 10센티씩 크는 아이에게 작년 옷을 입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심판들에게도 무성의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점수에 불이익을 받기도 쉽습니다.
연아양의 유일한 라이벌인 일본의 아사다 마오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그 선수는 이번 시즌을
시작하기 전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의 안무를 맡는 미국 안무가에게 프리 프로그램 안무를 받고도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바로 폐기 처분하고 다시 새 안무를 의뢰했습니다.
한마디로 연아양은 출발선부터가 압도적으로 불리하다는 거죠.
지금 기업들이 스폰서를 서지 않고 주춤하고 있는건 아무래도 남나리 선수 때의 실패 때문인 것
같아요. 워낙 센세이션이어서 LG에서 지원을 했건만 이듬해부터 바로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으니까...
개인적으로 남나리 선수의 99년 경기는 지금 봐도 감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재기하기를 간절히 바래요. (남나리양은 페어 선수로 전향했는데 얼마 전 지역대회에서 좋은 성적으로 통과해서
전미선수권 출전권을 얻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은 좀 원망스럽습니다. 참 이상한게, 골프도 그렇고 피겨도 그렇고 남의 나라
국적 교포 선수한테는 그렇게 퍼다주면서 이 열악한 환경에서 혼자 힘으로 저기까지 올라간 우리
선수에게는 이렇게 깐깐하냐는 거죠.
저는 개인적으로 김연아 선수는 남나리 선수의 전례를 밟지 않을거라고 생각해요.
남나리선수의 경우 13살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됐고, 바로 성장기가 찾아오면서 몸에 무리가 생겼습니다. 여자 선수들은
초경을 기점으로 해서 체중이 급작스럽게 불고, 체형이 바뀌는 일이 많거든요.
그 때문에 점프 테크닉이 망가지는 건데... 연아양은 그 시기를 무사히 넘겼죠.
작년에 비해 키도 5센티나 자라서 160센티가 넘는데 체중은 여전히 40킬로그램 미만이라니까요.
제가 처음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본 것은 2002년 겨울이었습니다. 그때도 굉장한 점프 테크닉을
보여줬지만, 사실 저는 김연아 선수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어요.
무표정한 얼굴과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듯한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긴 글을 쓰고 있는 건, 단순히 연아양이 국제 대회에서 우승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소녀가 3년 사이에 얼마나 엄청난 성장을 했는지를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연아양이 국제대회에 나갔을 때, 해외 팬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테크닉은 좋지만 피겨를 전혀 즐거워하지 않는 것 같다,
아사다 마오에 비해서 표현력도 떨어지고 관중에게 어필하는 법도 모른다.
심지어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하고 싶지 않은 아이에게 부모가 돈과 명예를 기대하고 억지로 스포츠를 강요하는 일이
많다더라, 거의 학대 아니냐는 식의 이야기까지 있었습니다.
연아양이 무표정했던 것도 사실이고, 관중들과 소통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요. 그때까지 연아양은 관중 앞에서 경기를 해본 적이 없는데요.
태릉의 아이스링크가 얼마나 살풍경한 곳인지 직접 보면 놀라실 겁니다.
그런 허름한 링크장의 텅빈 관중석만 보면서 경기를 해온 13살 소녀가 환하게 웃으면서, 정말 즐겁다는 듯이 연기를 한다면
아마도 그게 더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연아양은 국제대회에 나가면서 비로소 자신의 경기를 지켜보고 응원해주는 관중들과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나는 동안, 이 소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여전히 수줍음이 많고 표정이 다양하지는 않지만 피겨 스케이팅이 기술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까지
전달하는 스포츠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나이 또래 누구와 비교해도 지지 않을 정도로요.
해외 팬들의 반응도 완전히 달라졌어요. 열 다섯 나이에 그만큼 깊이 있는 표현력을 보여주는 선수는
없다고, 아사다 마오가 트리플 악셀(3회전 반) 을 뛰는 것을 보면서 감탄을 하다가도 진짜 감동을 주는 것은
김연아라고 말합니다.
전미 선수권을 두 번이나 제패한 피겨 스타 조니 웨어는 팬채팅에서 주니어 선수 중에 누가 좋냐는
질문을 받자 김연아 선수의 이름을 제일 먼저 언급했습니다.
아사다 마오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어요.
남자선수로는 드물 정도로 우아한 경기를 하는 조니 웨어의 취향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요.
연아양의 놀라운 점은, 무엇이든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쉬운 점은,
연아양이 흡수하도록 주어진 것들이 절대 일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류 안무가의 프로그램과 국제적인 코치의 지도. 이 두 가지 없이 개인의 재능과 노력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은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피겨스케이팅 관계자들이 지원을 호소할 때마다, 연맹이나 기업 쪽에서는 메달을 먼저 따와라,
그러면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다더군요.
기존의 강대국들이 확실히 자리매김한 피겨 종목에다 대고, 메달을 따오면 지원을 해주겠다고
말한다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명맥만 유지하라는 이야기밖에는 안돼는거죠.
그렇게 쇼트트랙 선수들에게 치이고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들에게 치여가며 눈치밥을 먹어온 피겨
스케이팅에서 정말 기적 같은 금메달이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기업들은 무관심하네요.
금메달은 금메달인데, 올림픽 금메달이 아니라서 문제인걸까요?
정말 그런거라면, 참 염치도 없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나무를 키울 생각은 하지않고 열매만 얻으려고 하는데, 그걸 달리 뭐라고 표현하겠습니까.
2006년 토리노 올림픽이 석 달 앞으로 다가 왔습니다.
아쉽게도 연아양은 선수 보호를 위한 나이 제한에 걸려서 출전하지 못합니다. (그해 7월을 기준으로
15세가 되는 선수에 한해서 올림픽 출전이 가능합니다. 연아양은 9월 생이에요.)
저는 어떤 의미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해준 것 하나 없던 나라가 갑자기 돌변해서 온갖 부담을 안겨주고 메달을 못따면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어린 선수를 압박하고, 기대에 못미치는 결과가 나오면 바로 폐기처분 하는 꼴을 보느니,
4년 간의 유예기간을 갖는게 낫다고 생각하니까요.
동계 올림픽의 꽃을 피겨 스케이팅이라고 하죠.
중계권이 가장 비싼 종목이고, 티켓 값도 가장 높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욕을 먹을지 모르지만 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2002년 솔트레이크 올림픽
쇼트트랙 금메달리스트는 기억하지 못해도, 1988년 캘거리 올림픽 여자 싱글 금메달리스트 카타리나 비트는
기억합니다. (쇼트트랙 선수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쇼트트랙 역시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정말로 열악한 환경에서 그런 성과를 얻은 것이니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2006년 동계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에 한국 선수는 단 한명도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세계 선수권에서 24위 안에 들지 못해고, 그 후 출전권을 배정받지 못한 국가 선수들을 대상으로 열렸던
퀄리파잉 대회에서도 6위 안에 들지 못했으니까요.
같은 대회에서 북한 선수들은 남녀 싱글 모두 출전권을 얻었죠.
사실 피겨에 한해서는 북한 선수들이 남한 선수들보다 상황이 좋아요.
국가적인 지원을 받고 국제대회도 매년 개최하고 있으니까요.
2006년 동계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4개 부문 출전 티켓 0. 사실 이게 당연한 거에요.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한국은 이런 상황에서도 한 번씩 진짜 천재가 나타나더군요.
일본에서 아사다 마오 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송할 때 그 제목이 '천재 소녀의 1000일'이었다는데요.
저는 진짜 천재는 김연아 선수라고 생각해요.
아사다 마오는 공중에서 3회전 반을 돌 수 있고, 연아양은 아직 3회전 연속 점프까지만 합니다.
하지만 도약하기 전부터 이미 빙판에서 회전을 시작하고, 착지 후에 모자란 회전을 하는 누구의 눈속임과는
달리, 연아양은 가장 정확하고 아름다운 교본같은 동작들을 보여주고 있죠.
ISU 심판들의 기술 세미나에서 정확한 채점을 위한 시범 영상으로 연아양의 경기 테입을 돌려본답니다.
트리플 악셀을 뛴 아사다 마오와 트리플-트리플 연속 점프로 그친 연아양의 최종 점수에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은, 마오는 배점이 높은 점프를 하고도 완벽하지 못해서 감점을 당하고, 연아양은 배점이
다소 낮더라도 그 동작이 원래 보여줘야하는 것을 완벽하게 해내기 때문에 가산점을 받기 때문입니다.
피겨 스케이팅 계에서 일본과 한국에 대한 인식차이는, 일본과 한국의 경제력 차이X5 라고 생각하면
정확할겁니다.
일본에 대한 이미지는 경제대국, 세련되고 친절한 나라지만,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없거나, 있어도
부정적입니다.
지금도 해외 포룸에서는 아사다 마오와 연아양을 비교하는 글들이 종종 올라옵니다.
마오는 언제나 웃고 피겨를 즐기는 것 같지만 김연아는 여전히 무표정하다고.
마오는 사랑스럽지만 김연아는 너무 차가워보인다고요. 그런데요, 저는 엄청난 지원을 받는 최적의
상황에서 웃고 즐기며, 줄넘기 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트리플 악셀을 뛰는 아사다 마오보다,
해외 피겨 팬들은 상상도 못하는 악조건에서 마음처럼 트리플 점프를 뛸 수 없는게 속상해서 울면서
연습을 한다는 김연아 선수가 만 배는 사랑스럽습니다.
차가운 빙판 위에서 만 번을 넘어지면서 점프 테크닉 하나를 익히는 동안, 연아양은 혼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죠.
누가 훈련을 대신해줄 수 있겠어요.
하지만 혼자 애쓰는 그 길에 지속적인 애정을 보내줄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이번 대회 이후에도 연아양을 기억하는 국민들이 많아지고, 그래서 스폰서가 생긴다면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진심으로 바라는 건 다른 것입니다.
이 열 다섯살 소녀가 혼자 감당하고 있는 만 번의 실패를 모르면서, 앞으로 혹시 슬럼프를 겪게
되었을 때 그럴 줄 알았다느니, 반짝하다가 뜨니까 정신력이 해이해져서 저렇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제발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겁니다.
당장 오는 3월에 2006년 주니어 세계 선수권이 열리고 그때는 아사다 마오도 출전을 합니다.
우승을 한다면 정말 좋겠지만, 혹시 은메달이라고 해도, 제발 은메달에 그쳤다.라는 이야기는
없었으면 합니다.
대한민국의 누구에게도 김연아양에게 '아쉬운 은메달' 같은 표현을 쓰면 안된다고 봅니다.
전 국민이 피겨 팬이 되어야할 의무 같은 것은 당연히 없어요.
제가 무슨 모금 운동을 하자고 선동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연아양의 우승 소식이 기쁘셨다면,
그 뉴스를 보고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면, 한번쯤 생각해 달라는 것입니다.
연아양을 한국 피겨계가 100년동안 기다려온 요정이라고 하더군요.
100년만에 한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으로 끝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열 다섯 살, 최소한 앞으로 10년동안은 동계 올림픽의 꽃이라는 종목을 강 건너 남의 잔치로 부러워
하면서 보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김연아양을 보면서 자란 노비스선수들 중에, 두번째 기적이 나올 수도 있겠지요.
고작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 정도로 지원을 할 이유는 없다,
시니어 대회에 나가서도 잘하면 그때 국가나 기업에서 지원을 해줘도 되지 않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차가운 빙판 위에 핀 가련한 꽃을 상상해보세요.
이제 겨우 꽃잎 몇 장을 폈을 뿐이니 제대로 잎도 피우고 열매도 맺히는 것 같으면 그 때 물도 주고
거름도 주겠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작고 약해보여도, 그 꽃은 지금 얼음을 뚫고 뿌리를 내린 겁니다. 그 사실을 기억해주세요.
그리고 혹 그 어린 꽃이 기대만큼 빨리 만개하지 못하더라도, 믿었던 것만큼 눈부시게 화려한 꽃이
되지 못해도, 한가지만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얼어붙은 땅에 혼자 뿌리를 내리기 위해, 꽃이 견뎌야했던 것들을요.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이 아직 어린 싹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지켜봐온 사람의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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