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이 우리처럼 절박한가”
[인사이드]출자총액규제-재계의 항변 ②
성화용 기자 | 08/31 09:05 | 조회 1598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는 정미소와 양조, 무역으로 기업을 일으켰고 제당과 모직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지금 삼성은 반도체와 정보통신이 주력이다.
그가 제당과 모직 공장을 설립하던 1950년대나, 반도체를 시작한 1980년대 초반에나 주변은 온통 ‘불가론’ 일색이었다. 그걸 뚫고 투자를 해 삼성은 변신에 성공했고 결국 50여년만에 한국경제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기업군으로 성장했다.
삼성전자 뿐 아니라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현대자동차, SK텔레콤 등 한국의 간판 기업들은 하나 같이 의표를 찌른 과감한 투자를 성공시킨 선례로 남아 있다.
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50년은 무한 세월이다. 그러나 기업은 100년 앞을 보고 변신하려 한다. 설탕을 만들어 거부를 일군 삼성이 반도체로 세계시장에 우뚝 서게 될 것을 누가 예측이나 했을까.
재계가 출자총액 제한을 풀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또 다른 이유는 기업 생존의 전제인 ‘역동성’을 해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계열사 출자가 봉쇄돼 새로운 사업 구상을 접어야 했던 사례가 적지 않다.
A사는 지난 2002년 발전소 인수에 나섰다. 공정거래법은 동종 또는 밀접한 관련업종 출자에 대해 예외 인정요건을 두고 있지만 정유업을 하는 이 회사는 한국표준산업분류(중분류)상 발전소와 동종업종이 아니어서 결국 예외 조항을 적용받을 수 없었다. 당시 이 회사의 상호출자 비율은 40.53%. 결국 출자총액 규제에 묶여 사업확장을 포기하고 말았다.
B사는 지난 2003년 회사내 사업부 형태로 있던 연구소를 분리해 별도의 법인화를 시도했다. 생명공학 분야의 특성상 워낙 막대한 초기 자본이 들어 회사 내에 둘 경우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 외자유치 등을 통해 미래 신수종 사업으로 육성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회사 역시 신수종 사업 계획을 초기에 포기했다. 공정거래법은 신기술을 활용해 생산한 제품의 최근 1년 매출이 회사 전체 매출의 50% 이상을 차지할 경우에만 출자총액 한도의 예외를 인정해 주기 때문이다. 당시 이 회사는 80%대의 출자비율로 규제에 묶여 예외가 허용되지 않는 한 방법이 없었다.
정부는 ‘출자총액 제한 예외 인정 조항(동종 또는 밀접한 관련업종 및 신산업 출자의 인정요건)’이 있으니까 괜찮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사업의지가 꺾여 본 경험이 있는 기업들은 ‘가당치 않다’고 코웃음을 친다.
지난해 기계부문 사업 강화를 위해 회사 인수를 검토했던 C사의 한 관계자는 “조선·해운업을 주력으로 했던 탓에 결국 M&A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며 “출자비율이 60%에 달해 예외인정 요건에 기댈 수 밖에 없었지만 기계부문 매출이 전체 사업 가운데 세번째에 불과했고 매출비중도 낮아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공정거래법만 생각하면 지금도 답답해진다”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체념하려고 해도 아쉬울 때가 많다”고 털어놓았다.
이처럼 공무원들이 탁상에서 머리를 굴려 만든 예외 조항과 기업의 현실 간에는 가공할 정도의 괴리가 있다는 게 재계의 인식이다.
다수의 기업집단이 이미 출자총액한도에 묶여 있고 현실적으로 출자비율을 낮출 방법은 없다. 아이디어와 비전은 있는데 규제가 가로막고 있다.
공정위는 11개 기업집단의 예외인정 출자액이 1년 동안(4월 1일 기준) 1조4800억원에 달해, 일반 출자액(7600억원)의 두 배나 된다고 반론을 편다.
그러나 재계는 출자를 시도했다가 뜻이 꺾인 규모가 그 10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왜 외면하느냐고 되묻고 있다. 일반 출자가 막혀 예외 인정의 구멍을 찾아 헤매야 하는 절박함과 궁색함이 기업을 얼마나 위축시키는지 알고나 있느냐는 것이다.
정부가 못 믿겠다고 하니 재계의 항변은 동어 반복이 될 수 밖에 없다.
‘왜 정부가 만들어 놓은 틀 속에 기업을 가두려고 하나. 문어발 다각화는 안된다고? 같은 업종만 깊이 파서 먹고 살라고? 한보나 삼미가 전문화가 안돼서 무너졌던가. 왜 검증도 안된 ‘업종 전문화 모형’을 금과옥조로 숭배하나.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이 우리 처럼 절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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