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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의 남편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의 비극적인 일생에 가려져있던 인물이다.
아니 오히려 덕혜옹주와 정략결혼한 일본인이라는 편견 때문에 한국에서 부당하게 욕을 먹는 인물이다.
꼽추네 추남이었네 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아내를 학대하여 정신병원에 감금시키고 멋대로 이혼하고 다른 여자 찾아 결혼한 희대의 나쁜놈이라고....
과연 소 다케유키는 천하의 나쁜놈이었을까?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사랑했을까?
소 다케유키는 대마도 번주 집안인 소 가문의 37대 당주로, 임진왜란때 조선을 침략한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자 부장인 소 요시토시의 직계 후손이며 작위는 백작이었다. 영어학자이자 시인이며 화가로서 말년에는 레이타쿠 대학(麗澤大学)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도쿄시 요츠야구 텐마쵸 신1쵸메 20반치에 위치한 구로다 가의 저택에서 4남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8살때 사망하였고 어머니도 그가 고등학교에 있을때 사망하여 어린나이에 그는 양친을 잃는다. 그뒤 1928년 도쿄대문학부 영문과에 진학하였다.
처음 덕혜옹주를 만난건 2년뒤 1930년이었다. 구조 공작의 저택에서 덕혜옹주와 첫 선을 보았다. 다음 해인 1931년 다케유키가 도쿄대를, 덕혜옹주가 여자 가쿠슈인 본과를 각각 졸업하자 같은 해 5월 8일 소 가문의 도쿄 저택에서 일본식으로 혼례를 올렸다.
사실 대마도 번주가 그렇게 일본에선 그렇게 높은 위치도 아니었고 실제로 이 가문은 일본과 조선사이에서 열심히 고개를 조아리며 중재를 담당한 가문이니 아무리 망했다라고 하더라도 조선황실의 공주와 결혼하는건 절대 나쁜일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대박이라면 대박이라고 할까... 물론 조선황실의 입장에선 그게 아니었겠지만...
그렇게 본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본정부에 의해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는 결혼하게 된다.
결혼 뒤 2년후 덕혜옹주와의 사이에서 장녀 마사에(正惠)를 얻었다. 다케유키는 이에 1932년 11월 생후 3개월인 마사에의 얼굴을 직접 그린 유화를 남겼다.
이때까지만해도 둘의 결혼생활은 순탄해보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덕혜옹주는 결혼하기 이전에 이미 정신병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1929년 모친 귀인 양씨가 사망하고 덕혜옹주는 1930년 봄 무렵부터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여 영친왕 저택과 별장에서 요양을 하였으나 결국 조발성치매증(정신분열증) 진단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소 다케유키와 결혼하여 증상이 호전되는가 싶더니 출산에 따른 우울증이 겹쳐 다시 정신분열증이 악화되었다.
소 다케유키는 그런 아내를 집안에서 간호하였다. 백작의 부인이 정신병이라는게 소문이 나면 곤란하니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집에서 간호하였는데 이게 한국으로 와서는 남편이 아내를 감금시키고 학대했다라고 와전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실제로 정신병을 앓고 있는 가족이 있는 경우 그 가족을 간호해야 할 사람의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닐것이고 소 다케유키 역시 말못할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 다케유키는 대외적으로 이구의 생일 축하연, 이은 부부의 은혼식과 같은 대한제국황실의 집안 행사에는 딸 마사에를 동반하여 지속적으로 출석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한뒤 1946년 일본에서 재산세법이 시행되며 다케유키는 카미메구로의 저택을 비롯한 자산 대부분을 처분하였고 귀족에서 일반인으로 돌아오게 된다. 더이상 자신의 아내를 집안에서 간호하기 힘들어지자 그는 아내를 도쿄 도립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뒤 딸 마사에가 1955년 결혼하여 분가하자 아내와 이혼하게 된다. 이 이혼은 영친왕부부와 협의하에 이루어진것으로 그 뒤 소 다케유키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 다른 일본 여자와 재혼 자신의 뒤를 이을 장남을 얻는다.
하지만 소 다케유키의 불행은 끝나지 않아 그의 장녀 마사에는 1956년 산에서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뒤 아직까지 실종상태다.
가족이 정신질환일 경우 그 주변사람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수 없다. 특히 아내의 정신분열증을 지켜보는 남편의 입장에선... 거기에 정신분열증인 어머니는 딸의 양육을 제대로 할수 없었을것이고 딸의 양육역시 온전히 그의 몫이었을것이다. 하지만 그 딸 역시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사라져버린다. 소 다케유키는 엄청나게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소 다케유키는 그가 죽을때까지 딸 마사에의 사망신고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전력으로 수색하였다. 하지만 마사에를 찾을수는 없었고 마사에의 장례식은 작은 항아리에 한 알의 진주를 넣고 그것을 상자에 담아 치렀다고 한다. 1976년에 발표된 그의 시는 딸에 대한 그리움과 애잔함을 담고 있다.
진주 (혼마 야스코: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여름 산 푸른 잎 우거진 길을 넘어갔음에 틀림없다.
바위가 많은 곳을 지나감녀
작은 돌들이 뒹구는 강가
그날 그 언저리는
비가 내렸을 것이라 한다.
조금만 더 가면 길은 끊겨버린다.
하늘로 나느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하늘로 날아가 버린 걸까 하얀 비둘기처럼
(일부러 버렸을까 젊은 날의 갈피를)
납골당의 장은 항아리에
면으로 휘감겨 있는 작은 진주여!
후에 소 다케유키는 자신의 전부인이었던 덕혜옹주를 만나기위해 덕혜옹주가 기거하던 낙선재를 방문한다. 하지만 덕혜옹주의 가족들에 의해 제지당하고 하릴없이 일본으로 돌아간다. 자신이 25년간 부부생활을 한 부인을 만나고 싶었지만 결국 거절당했다.
그리고 소 다케유키는 그가 1985년 죽을때까지 자신의 불행한 결혼생활, 딸 마사에의 자살등에 대해 끝까지 침묵했다.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만나러 와 거절당했고, 거절을 당하면서도, 한국측으로부터 이유없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 어떤 변명도 자기자신을 변호하는 말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딸의 죽음 후 그 죽음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 제발 아무것도 묻지 말아달라 "
이 말만을 할뿐이었다.
그는 노인이 되었을 때 '슌 다이라쿠' 라는 수필집을 내었는데 그 수필집에는 그의 어린시절, 가족관계, 그리고 그의 인생에 대한 기록이 담겨있다. 하지만 덕혜옹주와의 결혼생활, 1931년 부터 1956 년 25년 동안은 그는 단 한줄
' 그 25년은 내 인생의 공백기이다 '
라고썼다. 단 한마디도 덕혜옹주와 딸 마사에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다시는 되새기고 싶지 않은 말못할 고통이 있었던것이다.
하지만 그는 죽기 몇년 전 1980년도에 동경의 백화점에서 자신이 그린 미술작품들을 전시하는 전시회를 가졌는데 그곳에서 딸 마사에의 초상화 4점이 출품되었고 전시회의 팜플렛의 표지 또한 딸의 사진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소 다케유키는 주변의 이야기에 의하면 주변사람에 존경을 받는 인격자였다.
그의 제자였다고 생각되어지는 레이타쿠 대학의 영어학 교수였던 타나카 씨가 은퇴할 당시 남긴 글에 따르면 (http://www.fl.reitaku-u.ac.jp/EnglishDept/Newsletter/NLno.19.html 새창에서 열기)
레이타쿠 대학, 특히 영어학과의 원점을 되돌이켜 보면, 소 다케유키 선생님의 존재가 가장 먼저 머리속에 떠오른다. 구 대마도 번주, 백작가 당주였던 그는 영국인도 반할만한 영어 수준은 물런, 동서고금의 몇개의 언어구사가 가능하고 아주 똑똑하고 게다가 시인, 수필가, 화가로서의 재능을 갖추신 분이었다.. (중략) 우리들의 선생님이라고 하면 그 누구보다도 소 다케유키 선생님이었다. 여러가지 면에서 정말로 큰 존재감이 있는 분이셨다.. (중략)..
또한 소 다케유키씨와 가까이 지낸 것으로 생각되어 지는 일본의 문학자, (한국의 역사에 관심이 많다고 나와있다) 의 소 다케유키씨에 대한 인상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http://gokichikai.on.coocan.jp/essay-heta-tosa.html 새창에서 열기)
내가 가지고 있는 소 다케유키씨의 이미지라고 하면 항상 온화하고 미소를 띄고 계신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림, 서예, 시, 문학, 영문학, 그리고 도덕교육의 강의에도 종사하고 계시던 분입니다. 본직은 대학교수입니다. 영어실력은 중학교때부터 뛰어났던 것으로 보여지며 나가사케현이ㅡ 중학교 영어웅변대회에서도 우승한 적이 있으십니다. 그 후 동경대영문학과를 졸업하셨습니다.
소 다케유키씨는 마음 깊은속에 크고 깊은 상처를 가지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그 누구도 그 마음속에 들어갈수 없는, 그리고 구원받지 못할 상처를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계셨습니다.
[출처]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이야기. (사미시라 - 환상 속의 아내를 그리워하는 노래)|작성자 강곰정뽀로로
http://blog.naver.com/sayaka0231?Redirect=Log&logNo=20171693606 새창에서 열기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하게 된 결혼이었지만 소 다케유키는 자신의 결혼에 충실했고 정신질환이있던 아내에 대해 남편으로서의 도리를 다했다. 최대한 간호하려고 애썼으며 그녀와 이혼한것도 딸 마사에가 20살이 넘어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할때까지 기다린후 이혼하였다. 그뒤 그는 그녀를 다시 보기위해 한국을 방문했지만 거절당했다.
일제의 강압적인 결혼에 의해 두 남녀는 서로 고통받고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 힘없는 개인이 선택할수 있는 일은 그냥 말없이 침묵하며 따르는 것일 뿐이었다. 그 점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과연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사랑했을까
후에 소 다케유키는 사미시라 환상속의 아내를 그리워하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시를 남긴다.
이 시를 보고 충분히 소 다케유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볼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미시라
미쳤다 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
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혼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구완으로
잠시 잠깐에 불과한 내 삶도 이제 끝나가려 한다.
젊은 날에 대한 추억은 무엇을 떠올릴 것이 있어 떠올릴까.
날밝는 것도 아까운 밤 굳게 먹은 맘이 흔들릴 것인가.
꽃이 아름답게 핀 창가에 등을 대고
썼다가 찢어버린 당신에게 보낸 편지 조각인가.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로 생각할 정도로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
두릅나무의 새순이 벌어지는 아침.
옷이 스치는 소리의 희미함과 닮아있다.
떡갈나무 잎에 들이치는 소낙비와 함께 저물었다.
사람이란 젊었거나 늙었거나
애처러운 것은 짝사랑이겠지.
지금 감히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아직 늙기 전의 탄식이라고 해두자.
이 세상에 신분이 높건 낮건
그리움에 애타는 사람의 열정은 같을 거야.
그래도 대부분은 식어버리겠지.
새벽 별이 마침내 옅어지듯이.
빛 바랠줄 모르는 검은 눈동자.
언제나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것은 환상 속의 그림자.
현실 속의 자신이 어디있는 지도 모르네.
물어도 대답없는 사람이여.
사미시라는 영혼과 비슷해서
사람의 숨결로 타고 온다한다.
한번사람 맘속에 들어가면
오래 눌러 앉아 나가지 않는다 한다.
호적이라는 종이 한 장으로
누구나 부부라고 하지만
할 일을 해내지 못하는 괘씸한 아내여.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남편도 있겠지.
이름도 모르는 아비의 아이를 가져
어미가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어깨를 서로 맞댈 기회조차고 없을지라도
서로 통하는 영혼도 있다고 한다.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이 된지
이미 봄 가을이 손가락으로 세고도 남을 정도로 지났다.
귀엽다고도 사랑스럽다고도 보았다.
그 소녀는 이름을 사미시라라고 한다.
나의 넓지 않은 가슴 한편에
그 소녀가 들어와 자리 잡은지 이미 오래인것을,
마치 마음 놓고 쉴 틈도 없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신하게 무릎을 딱 붙이고 앉아 있다.
하룻밤도 침실로 들이지 않고
꽃잎같은 입술도 훔치지 않지만
아내라고 부를 것을, 내게 허락해다오.
나이먹지 않고 언제나 어린 아름다운 눈썹의 소녀여.
어떤 때는 당신이 가리키는 입술을
저녁 노을 구름 사이로 보이는 붉은 색의 요염함에 견주었다.
네 눈동자가 깜빡거릴 때의 아름다움은
칠월 칠석날 밤에 빛나는 별 같았다.
동그랗고 달콤한 연꽃씨를
눈물과 함께 먹는 것은 재미가 없다.
연꽃 씨의 주머니가 터지는 것 처럼
내 마음은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말았다.
근심이 있더라도 마음을 찢기는 일 없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깨달음을 얻은 성인이겠지.
나의 탄식은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말았다.
내 몸도 또 언젠가는 죽어가겠지.
아아, 신이여, 그리움의 처음과 끝을
그 손으로 주무르실 터인바.
수많은 여자 가운데서
이 한사람을 안쓰럽게 여겨주실수 없는지요.
내 아내는 말하지 않는 아내.
먹지도 않고 배설도 안 하는 아내.
밥도 짓지 않고 빨래도 안 하지만.
거역할 줄 모르는 마음이 착한 아내.
이 세상에 여자가 있을 만큼 있지만
그대가 아니면 사람도 없는 것처럼.
남편도 아이도 있을텐데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나는 계속 찾아 헤맨다.
산은 낮은 곳에서 올려다 보고
바다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거라고 생각하여
어느 날 후지산 꼭대기에 올라
쯔루가의 여울이 빛나는 것도 내려다봤다.
또 어느 날은 파도치는 해변가에 나와
하늘을 가는 구름을 올려다 보았다.
그렇지만 마음은 달래어 지지 않고 바위를 끌어안는 것처럼
애처로운 가슴을 쥐어뜨는 것 같았다.
개미가 모여드는 계곡의 깨끗한 물을
손으로 퍼올리는 사람은 그 맛을 알고 있겠지.
높은 산 봉우리 봉우리에 피는 꽃 향기는
볼을 가까이 대야지만 비로소 맡은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너를 만나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내세를 기약할 수 있을까.
환상은 마침내 환상에 지내지 않으며
꿈은 꿈으로 깨어나지 않을 뿐이라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도 별것 아니야.
죄라고 해도 좋아. 벌도 받지 뭐.
유괴도 좋고 함께 도망을 갈 수도 있어.
함께 죽는 것도 주저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뿐인 생명을 받았다.
이 세상을 감히 저주한다는 것일까.
나는 이미 미쳐버렸는가. 아니 아직 미치지 않았어.
지금 내리기 시작한 것을 싸라기 눈인가.
무거운 짐차를 끄는 사람은
가끔씩 쉬면서 땀을 훔친다.
얼마간 돈이 생기면
맛있는 술로 목을 축이겠지.
역에 내려 선 사람들은
각각의 걱정거리를 가슴에 안고
빠른 걸음으로 묵묵히 여기 저기로 흩어져 간다.
집에는 불밝히며 기다리는 아내가 있으니까.
거리에서 광고하는 사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애처롭다.
볼에 빨갛게 연지를 칠하고 거리에 서서.
간판을 걸치고 손짓발짓으로 손님을 청한다.
되돌아 나의 처지를 생각해본다.
어린 여학생의 무리는
내게 가벼운 인사를 한 후 느닷없이 명랑하게들 웃더니
무리지어 화려하게 사라져버렸다.
나는 한숨 휴식 어디로 가면 좋을까.
남모르는 죄를 진 사람이
정해진 대로 길을 가는 것처럼.
언젠가 너를 만나고 싶다고
정처없이 나는 방황하고 있다.
봄이 아직 일러 옅은 햇볕이
없어지지 않고 있는 동안만 겨우 따뜻한 때.
깊은 밤 도회지의 큰 길에 서면
서리가 찢어지듯 외친다. 아내여, 들리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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