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영화 '황해' 개봉이 끝나고 얼마 뒤에 나홍진 감독의 가까운 가족이 유명을 달리했다. 죽지 않아야할 상황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충격을 받은 나 감독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유를 찾기 시작했고, 그 이유가 이야기로 확장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곡성'이다.
=> 감독의 지인이 사스, 메르스와 같은 역병에 의해 죽었다. 기독교 신자인 감염으로 고통스러워했던 환자를 위해 기도를 했으나 결국 운명을 달리 했다. 왜 신은 감독의 기도를 외면하였는가.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는 기독교의 교리에 부응하여 믿음의 기도를 바쳤으나 의심만 남았다.
"인간이 존재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데, 죽는 데는 이유가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는 이 영화는 개봉 후 일주일이 채 안된 상황에 300만 관객에 육박하고 있다. 엑소시즘과 오컬트 등의 대중적인 장르와도 거리가 먼 '곡성'은 평단과 관객의 호평 속에 연일 승승장구 하고 있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하고 일주일이나 지났음에도 일부 관객들은 아직도 나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일본인을 일본군, 종구(곽도원 분)을 피해자, 무명(천우희 분)을 독립군으로 해석하는 등 정치적인 의도가 분명하다는 예상 밖의 시각도 내놓고 있다. 네티즌들 역시 저마다 다른 해석을 내놓는 등 온라인 안팎으로 설왕설래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최근 삼청동 한 커피숍에서 나 감독을 만났다. 연일 쏟아지는 호평에 여유를 드러낸 그는 "이 영화는 신에 대한 불신으로 출발한 영화"라며 "신에게 질문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 기독교 신자인 감독은 질문한다. 왜 믿음으로 기도를 했는데 지인은 죽었는가. 믿음을 져버린 이유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당신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나홍진 감독. 사진/이십세기폭스코리아
다음은 일문일답.
- 영화가 베일을 벗자마자 평단의 호평이 쏟아졌다. 기자나 관객들의 호평을 예상했는지. 어떤 느낌이 드나.
▲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절대 못했다. (생각) 저보고 이제 영화 찍지 말라는 얘기로 해석하면 되나. 이건 뭐 영화 그만 찍으라는 얘기다. 사실 정말 긴장을 많이 했다. 오랫동안 준비해서 그런지 긴장이 심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칭찬을 해주니까, 갑자기 다크해지는 게 '다음 작품은 뭐하라고 이러시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 관객들 반응은 살펴보고 있는지.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이 가능한 영화다. 그 중 누군가는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영화라고도 하더라. 정치적인 의미를 담은 부분이 있나.
▲ 일제강점기라고 말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기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의도는 없었다. 특정 정치인을 의식하게 하려는 의도도 없었다. 이렇게 말을 해야 되는 거 아니냐.
- 사람들이 왜 이렇게까지 다양하게 해석하는 것 같나.
▲ 그 이유는 내가 그렇게 해석하면 되는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표면적인 플롯은 명확하다. 뭔가를 계속 심어두니까 '저 놈이 무슨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그게 뭐냐'고 계속 의심하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 생각도 있다. 다만 나는 공식을 만든다는 태도로 임했다. 어떤 해석이 가능하게끔 말이다. 관객들이 어떤 해석을 하든 나는 그 해석 모두를 지지한다. 하지만 내게 정치에 해당하는 메시지를 던진다는 의도는 없었다.
=> 플롯은 명확하다. 마을에 역병이 돌았고 사람이 죽었다. 역병이 악귀의 소행이면 기도와 굿으로 해결이 되었을 수 있으나, 굿과 기도는 통하지 않았고 신앙인들은 좌절하였다.
- 엔딩이 달라졌다. 본래 시나리오에는 운전하는 일광(황정민)의 몸 속에 일본인(쿠니무라 준)의 혼이 들어가고, 차가 천우희를 지나치면서 갑자기 전복되는 것으로 나와있다. 하지만 영화는 달랐다. 시나리오에 해당하는 엔딩을 실제로 찍었다고 들었는데 통편집한 이유는 무엇인지
▲ 시나리오부터 반전이냐 아니냐 말이 많았다. 내가 내용을 복잡하게 섞어놓기는 했지만 반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많은 분들이 시나리오의 엔딩 같은 반전이 필요한 거 아니냐는 식으로 얘기를 했다. 결말이 너무 열려 있어서, '보험'으로 찍어둔 장면이다. 편집실에서 최종 결정할 생각이었다. 필요하면 넣고, 중언이면 빼겠다고 공지했다. 어떤 엔딩을 선택했든, 아마 호불호의 퍼센티지(%)는 비슷할 거다. '좋았다'와 '나빴다'는 반반일텐데, 나는 빼는 것을 선택했다.
=> 이성과 신앙, 종교와 과학은 서로 갈등하며 배척하기도 한다. 본인도 신앙에 대한 의구심이생겼는데,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닫힌 결말을 낼 수 없을 뿐더러, 관객들 각자에게 맡길 부분으로 봄.
- 이 영화의 플롯이 명확하다고 했다. 엄청 꼬아놓은 이 영화를 두고 어째서 플롯이 명확하다고 하는 건가.
▲ 일본인과 부제(김도윤 분)의 이야기만 버리면 된다. 이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다른 얘기다. 연관이 아주 없진 않지만, 메인 플롯과는 연관이 없다. 내가 교차만 시켜놨을 뿐이다.
=> 사스는 홍콩에서 건너왔고, 메르스는 중동에서 건너왔다. 일본에서 온 전염병이든 최초 전염자가 누구인지 찾아서 응징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발병자를 격리하고, 감염경로 및 잠복기를 파악하는 등의 역학조사를 하고. 백신을 개발하는 것이 주요 후속조치이다. 최초 전염자 일본인 무당의 행보나 부제는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그 장면은 일종의 보너스 영상이다. 관객들에게 던져놓은 미끼이자 선물이다. 관객에게 묻는 거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코스프레를 하는 듯한 악마의 형상을 한 이가 있는데 당신이 부제의 입장이라면 이 악마로 보이는 것을 신으로 경배하겠느냐, 아니면 다른 하늘을 보고 '주여'하며 읊조리겠느냐라고 묻는 거다. 아예 다른 영화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럼 플롯이 명확해진다.
=> '악마로 보이는 것'과 '악마'는 다르다. 바로 원시신앙주의적 시각에서 역병의 근원이 보이면 악마로 보는 것과 같다. 많은 관객들은 누가 악마인지 찾고나 있으니 플롯이 불명확한 것이다. 인류 최초의 전염병 천연두를 대하는 전근대적 시각도 악마의 소행이었는데, 신종전염병을 악마로 보는 것은 신앙적 믿음이 남아 있는 것이고, 당신이 치료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릴 것인지 묻는 것이다.
- 그럼 천우희는 신으로 염두에 둔 건가.
▲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박아놓고 시작했다. 한국의 신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성경적으로 해석한 게 아니라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한 거다. 딱 천우희처럼 생겼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한국의 신이 있다면, 종구가 일본인을 유괴하는 모습을 산 위에서 바라보는 무명의 얼굴이 신의 형상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신이다.
=> "Science is god" 악마를 몰아내는 것이 신이라면, 천연두를 종식시키고 몰아낸 과학은 무엇일까. 니체는 '신은 죽았다'고 표현한다. 합리주의적 철학자인 그는 인간의 이성이 신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마을을 떠돌며 전염병의 역학조사를 하여 잠복기간과 발작시기를 알았다. Is God Real? Does Science Answer "Is There a God?"
- "이 영화는 신에 대한 불신으로 출발했다"고 말했었다. 가족의 죽음으로부터 질문이 생겼고, 질문을 거듭하다 끝내 영화로 만들어진 거다. 결국 답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신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것인가.
▲ 그렇다. 이 영화는 말했듯이 플롯이 명확하다. 동네에 이상한 현상이 생기는데, 일본인 하나가 의심스럽다. 그 와중에 내 딸이 아프게 된다. 그리고 죽도록 방어하는 영화다.
=> 영화에서 일본인 무당이 전염병을 곡성이라는 마을에 전파하였고 딸까지 감염되었다. 그는 이성을 잃고 신앙주의적 시각으로 악마를 사냥하러 간다. 이는 현실에서 기독교 신자인 감독이 겪었던 전염병에 의한 지인의 죽음에 대한 일과 동일하며, 플롯이 명확하다. 그는 제작기간 4년 동안 고향인 곡성에 다서 영감 얻었을 것이다. 어린시절에는 없었던 곡성도깨비 마을이라는 것이 2005년 즈음에 생겼으니 들렀을 것이다. 도꺠비에게 혹을 붙였다 떼던 혹부리 영감이 일본인이었다는 사실도 그 때 알게되었을 것이고, 일본의 괴물인 도깨바에 대한 연구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남는 게 무명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무명에게 질문을 던질 것이다. '신이냐 악이냐', '누가 죽인거냐', '사람이냐 귀신이냐', 뭐 이런 것들일 거다.
=> 이성과 과학은 신인가, 악마일까. 종교의 입장에서 과학은 신에게 위협을 가하는 악마와도 같은 존재일 수 있다. 천연두를 종식시킨 신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
만약 신이라면 '왜 아무 것도 안해', '왜 방관하고 있냐', 이런 질문도 할 것이다. 관객들이 무명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 곧 내가 신께 여쭙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 이성과 과학지식은 능동적 행위체가 아니다. 과학기술에 대한 철학적 윤리적 시각과 관련한 오랜 논쟁에 감독이 마주했고, 이를 관객과 나누고자 했다.
- 무명이란 인물을 신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는데, 종구를 구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무명은 종구의 가족을 구할 의지가 있었던 것인가. 만약 구할 의지가 있었다면 종구에게 책임을 묻거나, 의심을 사는 발언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 그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다. 신이 있다면 진짜 구할 의지가 있기는 한 거냐는 거다. 지금까지 뭐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구하려는 척 하는 거냐는 거다. 내가 바라본 신이란 그렇다.
=> 과학기술은 신에 비견되지만, 악마를 처단하는 신과 같은 능독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 악마와 같은 전염병을 몰아낼 힘이 신에게는 있었다면 능동적 처단을 했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했다.
내가 처음 물었던 질문은 인간이 피해자가 되는 데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 피해를 입었는지는 알겠는데, 왜 피해를 입었는지는 모르겠더라. 이건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데, 내 존재와 직결된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 사스, 메르스에 전염돼 죽었던 한국인 수십 수백명의 피해자. 그리고 그 중 하나의 지인인 감독.
그 때 신에게 물었다. 선입니까, 악입니까. 진짜 존재는 합니까. 존재한다면 왜 방관합니까. 여러 참사나 이유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피해를 당하는 겁니까. 그 질문을 이 영화를 통해서 하고 있는 거다. 누구나 종구가 될 수 있다.
=> 전염병은 창궐하고 전파되며 사람들이 죽는다. 신앙적 불분물을 모두 털어낸 시각에서는 인류역사에 기원전 부터 있었던 일이다. 공포심에 신앙에 기대면 그때 선,악의 개념이 생긴다. 누구든 종구처럼 굿을 하고 기도하고 원망감에 전파자를 처단하러 갈 수 있다.
- 그렇다면 이 영화를 보고 누군가가 희망을 느꼈으면 하는 의도도 있었나.
▲ 희망이라기 보다는 위로를 드리고 싶었다. 종구를 보면서 누군가를 떠나 보내고 남은 가족들이 위로를 받았으면 했다. 나약한 한 인간이 얼마나 최선을 다해 지키고자 했는지 다 보셨을 것 아니냐. 딸을 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종구의 얼굴을 통해 남은 분들이 위로받았으면 한다.
=> 이 영화에 희망의 메시지는 없다. 영화에서 보이는 광경은 천연두를 대했던 예전 사회의 모습과 똑같고,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을 했던 중세유럽의 상황과도 다를바 없다. 비극에 대한 위로를 줄 수 있을 뿐이다.
-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치열하게 영화를 만들면서 신에게 질문을 했다. 그런데 그 대답을 못 들을 가능성이 높지 않나. 이렇게 힘들게 질문을 했는데, 죽을 때까지 대답을 듣지 못하면 어떡하나.
▲ (답을) 하셔야 한다. 지금 신이 존재의 위협을 받고 있고, 세상도 많이 바뀌었지 않나. 어떤 대형사고가 터져도 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나는 신이 무명 같다. 때론 초라해보이기도 하고, 실패한 자 혹은 고독한자, 외로운 자 같다. 저 멀리 어디 구석에 쭈그린 모습이 아닐까 싶다.
=> 전염병으로 지인을 잃고 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이 들은 감독은 지금 당장 답을 원한다. 당신은 존재하기라도 하는지. 철학자 니체는 수 백년 전에 신을 죽었다고 표현했고, 유전자 조작과 인공지능의 개발 등 과학기술의 발전은 수차례 신을 능멸하였다. 감독은 차라리 신은 과학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만큼 기독교 신자인 그는 궁지에 몰려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회적 분위기는 어떤 하나의 이유로 만들어진 게 아니지 않나. 선량한 사람들이 더 힘들고 다치는 세상이다. 이럴 때일수록 필요한 게 신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힘든 상황이 긍정으로 나아가고 더 나아지려면 신이 컴백을 해야된다고 생각한다.
=> 중산층과 서민의 몰락으로 암울해진 사회에 신은 기도를 듣고 있는지 감독은 의문한다. 종교한 것이 나약한 인간이 의지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라면 그에 대해 신은 충실한 역할이 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신은 간 적도 없고, 컴백할 일도 없다. 아마. 그것이 감독을 계속 괴롭힐 것이다.
-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 그렇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 줄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 나는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이다. 선을 지향한다. 영화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다. 영화가 어둡다고 나까지 오해하지는 않길 바란다.(웃음)
=> 기독교 신자들이 믿음이 흔들리는 시점에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들이다. 교회를 완전히 나오기 전까지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 정말 힘들었다. 감독은 정말 외롭고 고독한 자리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칭찬 덕분에 기운을 얻었다. 감독으로서 길을 잘 걸어가고 있다면서 등을 두드려주며 격려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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