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어떤 분이 과학 게시판에 언어학 관련 게시물을 올렸기에 "사회과학"도 취급해 주는구나! 하고 조심스럽게 게시물을 올려봅니다. 물론 진지한 글이다 보니 내용은 노잼입니다.
제가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글자나 언어에 대해서 평가할 때 대부분 "그 언어 자체의 특성"에 대해서만 판단한 후 그것에 대한 우열을 가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우열을 가리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드렸기 때문에 그 부분은 생략하고 왜 "그 언어 자체의 특성만 비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말해보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언어에 대해 어떠한 판단을 내릴 때는 비언어학적인 요소도 판단하라"라는 것입니다.
예시 1. 중국은 왜 비효율적인 한자를 사용하는가?
먼저 친숙하게 중국어의 한자 표기를 예시로 드려고 합니다. 제 주변의 많은 분들이 중국어가 세계 주요 언어중에서는 유일하게 음을 나타내는 표음문자가 아닌 표어문자(표의문자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엄밀한 정의로는 표어문자가 맞는 표현입니다)이고, 이 덕분에 뜻이 달라지면 글자의 생김새도 달라지고, 결국 제대로 된 언어 생활을 위해서 몇만자나 되는 글자를 외워야 한다는 점에서 왜 쓸데 없이 그러한 구세대적 표기법을 유지하고 있냐는 지적을 합니다. 확실히 중국어의 한자 표기는 언어학적인 부분으로만 보면 상당히 비효율적입니다. 중국어의 음운의 개수는 제한되어 있고, 여러가지 성조를 통하여 그러한 음운들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어에 맞는 표음문자(대만에서는 제한적인 용도로 "주음부호"라는 것을 만들어 쓰기도 합니다)를 만들어서 쓰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중국 대륙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중국은 대륙의 특성상 한자를 쓰는 것이 더욱 효율적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방언의 차이입니다.
보통화: wǒ ài nǐ
광동어: ngóh oi néih
-난 널 사랑해
보통화는 아시다시피 중국의 동북부에서 사용되는 방언을 기초로 한 표준이고, 광동어는 중국 동남부의 홍콩과 그 주변 지역에서 쓰이는 방언입니다. 아주 간단한 문장이어서 느낌이 제대로 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보시다시피 같은 표현이여도 전혀 다른 소리가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기초 문장부터 이러한데 제대로 대화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이 경우 표음문자를 쓴다면 한 쪽이 다른 쪽의 말을 배우지 않는 이상 서로 의사소통은 불가능합니다. 반면 이것을 한자를 사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통화, 광동어: 我爱(愛)你
뜻글자가 가진 특성을 통하여, 음성으로는 전해지지 않던 의미가 글로는 전해집니다. 중국의 크기상, 방언차는 심하고, 또 도시에서 먼 지역에 대한 국가의 교육이 다른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보통화의 음성을 통해서는 각 지역의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데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보통화의 표기를 표음문자로 했다면 다수의 방언 사용자가 문맹이 되는 결과가 나옵니다. 한자가 익히기는 힘들더라도 한번 익히면 방언을 초월해서 글로써 사람들이 대화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 정부는 한자를 폐기시키는 대신 한자를 간소화해서 활용하는 방안을 택하게 됩니다.
예시 2. 이란은 왜 자국 언어도 제대로 표기하지 못하는 표기법을 고수하는가?
이란의 언어사정에 대해서는 모르시는 분이 많을 것 같아서 설명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이란의 주요민족은 "페르시아족"으로, 이들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합니다. 페르시아어의 화자는 대략 5~6천만명으로 이란의 인구가 약 8천만명이니 적어도 2~3천만명은 페르시아어가 모국어는 아니지만 국가 의무교육을 통해 절대다수는 페르시아어를 구사할 능력이 있습니다. 이 외에 페르시아어는 타지키스탄의 국어로 사용되고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언어이기도 합니다.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아랍 문자에 몇가지 자음을 추가한 "페르시아식 아랍 문자"를 사용하고 있고 타지키스탄에서는 러시아어에서도 쓰이는 키릴문자를 빌려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페르시아식 아랍 문자"는 페르시아어를 표기하는 데 적절한 표기법이 아닙니다. 아랍 문자가 표의문자거나 그런 것도 아닙니다. 표음문자입니다. 문제는, 아랍 문자가 우리가 아는 평범한 표음문자가 아닙니다.
여기서 모음표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신다면 정상입니다. 아랍 문자는 애초에 자음에 의한 자음을 위한 자음의 문자입니다. 처음 만들어 질 때 부터 모음 표기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진 문자입니다. 물론 이 시스템은 아랍어를 표기할 때는 정상적으로 돌아갑니다. 아랍어의 문법 특성상 모음이 단어의 뜻을 결정하는 데 보조적인 역할만 하기 때문에 대부분 문맥상으로도 충분히 모음을 유추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문제는 이걸 페르시아어의 표기에 사용했다는 겁니다. 페르시아어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와 같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합니다. 아시다시피 이쪽 언어는 모음이 무지무지하게 중요합니다. 모음이 바뀌면 다른 단어인 겁니다. 그런데 표기할 때는 모음 표기가 비정상인 겁니다! 페르시아어에는 단모음(짧은 모음) 3개와 장모음(긴 모음) 3개, 그리고 이중모음 2개가 있습니다. 이 중 단모음 3개는 전부 표기하지 않고 장모음 3개와 이중모음 2개는 자음 글자를 빌려서 사용합니다. 그나마도 이중모음 2개 (ei, ou)와 장모음 2개 (i, u)는 자음 글자를 가지고 억지로 표기하려다 보니 표기가 같아졌습니다. 즉, 하나의 표기를 보고도 여러가지로 발음할 가능성이 생긴다는 겁니다.
تن : [tan], [ton], [ten], [tana], [tano], [tane], [tona], [tono], [tone], [tena], [teno], [tene]
بو : [bav], [bov], [bev], [bava], [bavo], [bave], [bova], [bovo], [bove], [beva], [bevo], [beve], [bu], [bou]
정말 막장의 극치를 달리고 있습니다. (물론 페르시아어 화자라면 어떤 조합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수 있기 때문에 선택지를 좁힐 수는 있습니다)
반면, 타지키스탄은 로마자와 시스템이 유사한 러시아어에서도 쓰이는 키릴문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타지키스탄에서 페르시아어 (타지키스탄에서는 "타지크어"라고 합니다만 거의 같은 언어입니다. 북한에서 한국어를 "조선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표기할 때 쓰는 키릴 문자입니다. 위의 페르시아식 아랍 문자에 비해 모음 표기가 정확하게 이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란 정부는 왜 저런 비효율적인 표기법을 그대로 놔두는 것일까요? (아프가니스탄도 아랍 문자를 사용하지만 거긴 정부 사정이 그러하므로 논외하겠습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상황을 봐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이란은 이슬람교가 국교입니다. 애초에 이란의 정식 명칭이 "이란 이슬람 공화국"입니다. 이슬람교에서 쓰는 경전중 가장 중요한 것이 쿠란이고, 쿠란은 아랍어 이외의 언어로 번역할 수 없습니다. (번역하면 죽인다 이런건 아니고 번역하면 번역본은 쿠란의 자격을 상실합니다) 이런 이유로 "아랍 문자"를 쓰는 것을 "자신이 이슬람교도이다"라는 것을 나타내는 일종의 지표로 사용됩니다. 이슬람교도가 절대다수인 나라 중에 아랍 문자를 쓰지 않는 나라는 "국가 핵심 정책으로 이슬람 극단주의를 배척하는 나라"밖에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이슬람 문화권임을 나타내려 하는 이란의 입장에서는 아랍 문자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른 문자로 갈아타는 것은 일종의 이슬람교로 형성된 정체성을 훼손하는 행휘입니다. 위에 나온 타지키스탄은 구 소련의 일원으로, 공산주의에 따라 철저한 종교 배척주의로 인해 "이슬람교라는 기존의 정체성을 없애는 과정"에서 문자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본 예시들은 모두 문자에 관련한 내용이고, 또 사실관계가 명확한 것만 간추리다 보니 정작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기 쉬운 예시 (일본어, 영어 등)은 무시된 감이 있긴 합니다만, 저러한 예시로만 보아도 언어에 관한 문제를 언어학적 논리성이다 효율성으로만 접근하려는 생각은 언어와 관련된 사회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는 순수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어를 볼 때는 단순히 그 언어의 문법이 어떠한지, 발음이 어떠한지만을 보지 않고, 그 언어를 쓰는 사회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