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구름~~
작성일: 2014-04-25 (금) 01:56
통일대박론의 허구성에 대하여 5
맑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것으로 계급간의 적개심을 고취하여 계급투쟁을 선동하기 이전에는 상대방을 절멸시키는 전쟁은 그리 흔치 않았다. 왜냐하면 정복전쟁을 하더라도 피정복민은 생산력으로서 필요했기 때문에 노예로 끌어다가 일을 시킬지언정 전부 다 죽일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피정복민들을 모조리 죽여서 없애는 일이 정복자에게 이익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정복전쟁에서 어떤 종족이 절멸되어 사라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징기스칸이 서하를 정벌한 후에 고려 접경인 압록강 유역으로 피신한 서하인들을 고려과 연합하여 진압했을 때 모든 서하인을 살륙했는데, 한때 요나라를 세웠던 서하족은 그 이후로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아주 드문 예의 하나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인종 청소가 훨씬 더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사례이지만 이것도 드물게 볼 수 있는 사례이며, 인류 역사에서 일상화된 사건은 아니었다.
상대방의 완전한 절멸이 투쟁의 목적으로 부각되고, 이것이 일상화되기 시작한 것은 공산주의가 태동한 이후부터이다. 이때 절멸의 대상은 다른 나라나 민족 또는 종족이 아니라 다른 계급의 사람이었다. 즉 타도의 대상이 외국이나 외부의 적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의 다른 계급으로 바뀐 것이다. 인류가 기나긴 역사 동안 다른 나라, 다른 종족에게도 쉽게 하지 않았던 완전한 절멸전쟁을 같은 민족, 같은 동포에게 자행하게 만든 것이 바로 맑스가 인류사회에 뿌린 더러운 독소이다.
공산주의라는 사악한 이념에 물든 인간이 어떻게 변하며 무슨 짓을 저지르는가를 처음으로 목도하게 된 사람들이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집권한 공화정부의 인민전선은 개혁을 명분으로 지주와 카톨릭 교회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스페인 전국의 교회와 성당들이 파괴되고 성직자들이 학살되었으며, 수녀들이 무차별 강간되었다. 물론 당시 스페인의 교회가 토지의 상당부분을 소유한 지주계급의 일부이며, 부의 대부분을 교회가 독점하여 민중의 삶이 극도로 피폐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카톨릭을 말살하겠다는 인민전선의 광기는 도를 넘은 것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이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스페인 사람이 아니라 다른 별나라에서 온 외계인이나 다름없었다. 스페인 사람이 어떻게 같은 스페인 사람인, 그것도 성직자와 수녀들을 그렇게 학살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라는 이 돌연변이 인종들의 정체에 한동안 헷갈렸지만 곧 그 본색을 알 수 있게 됐다. 이런 민심을 살핀 군부가 인민전선의 공화파 정권에 반란을 일으켰고 프랑코의 반란군이 공화파 정권을 무너뜨리게 된다. 스페인의 공산주의자들은 패전 후에 자기들의 죄값에 대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루게 된다. 5만 명에 가까운 공산주의자들이 처형되었고, 5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도주했다.
스페인 내전의 본질은 땅따먹기였다. 토지를 지주와 교회가 가질 것이냐, 농민들이 가질 것이냐가 내전의 원인이었다. 땅을 두고 지주계급과 소작인 계급이 피터지는 전쟁을 한 것이다. 이 내전으로 5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전쟁도 본질에 있어서 스페인 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전쟁의 씨앗은 이미 해방 전에 싹트고 있었다. 곰팡이가 습하고 어두운 곳에서 번창하듯이 좌익은 불공평한 사회의 모순 속에서 움트게 된다. 일제시대는 빈부의 격차가 대단히 컸다. 그리고 부와 가난의 대물림이 거의 고착되어 있었고,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신분의 상승은 거의 불가능했다. 특히 농촌의 경우, 지주들의 횡포가 심해서 소작인들은 단 한 평의 토지도 자기 것으로 만들 재간이 없었다. 소작농으로 태어났으면 죽을 때까지 소작농이었고, 자기 아들도 역시 소작농이었다. 그것은 피할 길 없는 운명이었다. 소작농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방이 곡창지대인 호남이었고, 이곳에는 특히 일본인 지주들이 많았다. 가혹한 소작조건에 대한 쟁의가 가장 많이 발생한 것도 호남지방이었다. 그런데 소작쟁의는 법적으로 불법이었고, 대개 쟁의를 시작한 소작인들은 일방적으로 지주들을 감싸고 도는 편파적인 법에 의해서 엄한 처벌을 받는 것이 상례였다. 법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는 그들은 소작쟁의에 대한 처벌을 받거나 도망을 가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이들이 도망을 갈 곳이라고는 지리산밖에 없었다. 지리산에 숨어든 이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항일 빨치산이 되고 말았는데 이들을 구빨이라고 불렀다. 대부분이 무식한 농민들이었다. 맑스의 공산주의 이론을 이해할만한 교육을 받았거나 지성적인 바탕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였다. 이들에게 평등한 세상, 누구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은 사람이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호남을 중심으로 남한 사회에 좌익이 배양되었고, 그 수가 일제 말기에 이르러 급격히 증가했다. 남한 내의 항일운동가들은 대부분이 좌익이었다. 여기서 빨갱이=항일투사, 우익=친일파라는 등식이 나오게 된다.
해방이 되자 일제시대 때 도망다니던 범법자, 산에서 숨어살던 빨치산들이 대명천지에 활보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악귀나찰이나 다름없었던 조선인 순사들은 혹시 맞아죽지나 않을까 해서 숨도 못 쉬고 바짝 엎드려 있었다. 전국의 파출소는 텅 비었고, 각종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더러는 무장까지 해서 파출소들을 점거하고 자기들의 아지트로 삼았다. 소련군이 재빨리 접수한 북한과 달리 남한지역은 한동안 치안공백 상태가 이어졌다.
민중들의 생각은 당연히 이제부터는 친일파가 당할 차례이며 항일한 사람들이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그렇게 될 걸로 믿었다. 그러나 달콤한 꿈이었고, 김칫국물 마시고 헛물을 켠 꼴이 되고 만다. 미군이 상륙해서 군정을 하게 됐는데, 가장 시급한 것이 치안의 확보였다. 경찰조직의 재건이 군정의 최우선 과제였다. 한국사정에 어두운 미군정의 당국자들은 우선 손쉬운 방책으로 일제시대 때 순사였던 사람들을 다시 경찰로 복직시켰다. 잠시 잠깐 꿈에 부풀었던 이 땅의 순진한 독립지사들은 하루 밤새 다시 친일파의 세상이 되는 것을 목도하고 까무러칠 지경이 됐다. 어제까지 자기를 잡으러 다니고, 감옥에 처넣고 무지막지하게 고문을 해대던 그 친일파 순사놈이 해방된 조국에서 벌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더 높은 경찰나리가 돼서 째려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제 때 항일빨치산으로 산속에서 온갖 고생을 다했던 자기는 상은커녕 누구 하나 봐주는 사람도 없다는 현실에 이들은 분노를 넘어 돌아가실 판이었다. 세상에 이런 법은 없다. 그러나 그런 법이 있었다. 그게 군정이었다. 우리 힘으로 이룬 해방이 아니었고 우리가 쟁취한 독립이 아니었기 때문에 투덜거려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더 기막힌 사실은 토지 문제였다. 해방 후 가장 시급했던 것은 식량문제였으며, 이것은 토지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미국은 자기들이 접수한 한국민의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지원할 생각이 없었고, 한국 내에서 생산한 곡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미국이 그때 농산물 원조를 통크게 해서 지금 대한민국이 유엔평화유지군으로 파견나간 지역에서 해주듯이 아낌없이 퍼주고 원조쌀을 배터지게 나누어주고 해서 선심을 썼더라면 대한민국에 반미감정은 생기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당시 미국은 대단히 인색하게 굴었다. 우선 배고픈 한국인들을 먹일 생각보다는 대충 해놓고 손 뺄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일제시대나 미군정이나 별 달라진 것이 없다라는 것이 민초들의 소감이었고, 이것이 미국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친일파 일본넘들을 다시 요직에 앉히고, 왜넘 순사보 하던 넘들을 정식 경찰로 써먹는 것은 좋은데, 그럴러면 배나 부르게 먹여줘야 할 것이 아니냐 이 말이다. 그런데 미군정은 다시 친일파 세상을 만들어놓은 데다가 살림살이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기근은 더 심했다.
해방이 되었을 때 농민들의 희망은 ‘토지개혁’이었다. 일본인 지주들이 남기고 간 땅의 분배와 소작제도의 개선은 당연히 되어야 할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북에서는 이미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에 의한 토지개혁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마무리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에 더욱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미군정은 토지개혁에 손을 대지 못했고, 정부 수립 후 제헌국회에서도 토지개혁법은 차일피일 미루어지기만 했다. 그 와중에 반민특위는 해체되고 친일파 처벌은 물건너 가고 말았다.
만약 일제시대에 이승만박사나 김구선생이 연설을 하면서 ‘해방은 대박’이라고 말했다면 우리나라의 민중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래 해방은 대박이 틀림없지, 해방이 되기만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박이 터질거야.”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해방이 되고나니 대박은커녕 망통이요 삼팔따라지더라는 것이었다. 기근은 더 심해지고 세상은 더 엿같이 돌아갔다. 이게 해방된 세상이냐? 이런 꼴 보자고 해방됐더냐? 이런 불만은 남쪽만 아니라 북에도 팽배했다. 해방된 나라가 되어가는 꼴이 영 아니기는 남이나 북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북한에서는 서슬에 눌려서 입밖에 드러내어 말을 못했을 뿐이었다. 남과 북은 계급에 따라, 재산의 정도에 따라 불만의 크기가 달랐을 뿐, 해방이 대박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환상을 품게 했다가 막상 통일이 되었을 때 대박은커녕 망통이라고 느끼게 되면 그 결과는 해방 이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