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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이유도 발견하지 못한 채 세상으로 내 던져져 있는 인간으로써의 실존.
이것이 사르트르의 실존개념이고, 니체로 부터 비롯된 죽은 신에 의한 자연스러운 배리 이다.
그는 즉자와 대자 개념을 통해 이 실존의 배리성을 드러내려 한다.
즉자는 대자를 향해 투기한다. "개인" 으로써의 인간은 항상 자기를 벗어나서 자기가 아닌
'무엇'을 이해하고, 파악하고, 감정을 갖고, 어떠 어떠한 관계를 갖는다. 하지만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즉자와 대자는 절대 합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원인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원인적 존재 즉 '신'은 스스로의 존재가 스스로의 존재의 원인이 되고, 이는 곧 신에게 있어서
본질은 실존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신은 항상 본질적으로 실존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인간의 존재는 자기원인적이 아니고 '우연적' 으로 내던져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실존은
이 물음-왜 자신이 있는 것이냐-하는 물음에 대답하려 하면 할 수록 답에서 멀어진다.
즉자로서의 인간은 대자적 자연에 항상 투기하고 있지만 우연이라는 심연에 그 연결은 단절되고
말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인간의 수난성으로 표현한다. 이 질문을 물을 수 밖에 없지만 답을 구할 수 없는
배리성에 갖혀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존은 '구토'를 유발하는 것이고, 자유는 하나의 형벌이
되고 만다.
이 "우연성" 과 그로인해 파생된 "배리성" 이라는 개념이 이끌어낸 결론은 반드시 옳은 것일까?
인간의 실존이 우연적이기 때문에 즉자는 대자에 합치될 수 없고,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는 것은
타당한 결론일까? 그렇지 않다. 우선 이 '우연성' 개념은 토머스의 기독교교의학에서 이미 정초된 바가 있다.
기독교의 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의 신으로써, 그것의 실존은 세계 안의 눈에 보이는 본질 내용이
있는 것을 매개로 삼아서 간취할 수도, 또 읽어 낼 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창조된 창조물이
세계에 관해서는 그것이 신의 의지에 의하여 무에서 산출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창조된 세계에 관하여서도
역시 실존의 문제가 당연히 우위를 차지한다. 요컨대 신에게 있어서도 실존은 본질보다 우선적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실존은 본질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가 자기원인적임으로 인해 '이미' 그 실존은 본질적인
실존인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신이 창조한 세계는 배리적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세계는 신과 달리 자기원인적
이지 않고, '무'에서 창조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비논리적이고 배리적이다. 자기원인적이지 않은 존재가 스스로를
정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적 신앙과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우연성'과 '배리성'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냐의 차이이다.
토머스에서 사르트르로의 비약은 어떤 철학적 사유로부터 이끌어져 나온 것이 아닌 실존을 구역질 나는 것으로 보느냐
혹은 그것이 신이 창조행위에 포함되어 있는 선의와 완전성의 눈에 보이는 표식으로 보느냐의 차이이다.
이렇게 본다면 현대의 실존개념은 창조신앙을 제거한 기독교적 토머스학파의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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