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를 죽이고 있는 본질은 이명박, 박근혜 같은 자들이 아닙니다.
http://www.ppomppu.co.kr/zboard/view.php?id=issue&no=133395혹시 '구조맹(構造盲)'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아마도 저 말이 익숙한 사람보다는 생소한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구조맹'이라는 말은 신조어라고 해야할 듯 한데, 아직까지 널리 사용되는 말은 아닌 것 같고 일반적으로 문맹, 색맹 등의 단어에서 사용되는 장님이라는 뜻을 가진 '맹(盲)'이라는 말을 구조라는 단어와 결합시켜 만든 말입니다.
따라서 '구조맹'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구조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겠죠. 한걸음 나아가 거기에 살을 조금 더 붙여서 해석하자면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없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사람'이 될 겁니다. 그리고 제가 그동안 한국 사회의 가장 독(毒)같은 부류라고 생각해온 사람들을 단 한 단어로 표현한 말이 바로 이 '구조맹'입니다.
다음은 이들이 내뱉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노력도 하지 않은 놈들이 사회탓, 나라탓, 대통령탓만 한다."
"재벌, 대통령 같은 사람들 욕할 시간있으면 자기계발이나 해라."
"사회가 썩었으면 니가 출세해서 힘을 가진 뒤에 사회를 올바르게 바꾸면 되는 것 아니냐?"
"북한이나 아프리카 같은 곳을 봐라. 대한민국 정도면 충분히 살만한 나라 아니냐?"
"누구나 노력만하면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먹고 살기 어렵다고 불평하는 건 제대로 노력하지 않은 본인들 탓이지 그게 왜 나라탓이냐?"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나라가 모두를 다 책임지느냐?"
대충 생각나는 것들만 적어봤는데 여지껏 살아오면서 저런 뉘앙스의 말들을 인터넷 혹은 현실에서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혹은 본인의 입으로 저런 말들을 했을 수도 있겠죠. 실제로 한국에는 저 말이 문제있다고 여기는 사람보다 "저 말이 맞는 말 아니냐?" 혹은 "틀린말은 아니지 않냐?"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게 현실이니까요.
저 말들 중에는 일견 일리 있어 보이는 말도 분명히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공식적인 신분제 사회도 아니고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처럼 출신성분으로인한 공식적인 제약이 있는 사회는 아니니까요. 한국사회는 아무리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어도 열심히 공부만하면 누구나 서울대에 갈 수 있고 누구나 의사, 판검사, 변호사 등 소위 '사짜'라고 불리는 전문직을 가질 수 있으며, 공부가 싫으면 스포츠계나 연예계 등의 다른 분야로 나가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사회이니 말입니다. 소위 '개천의 용'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줄곧 있어왔고 심지어 한국은 고졸 출신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대통령까지 했던 나라아닙니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저 말들이 뭐가 잘못됐냐는 말이 나올 법도 합니다. 그런데 저 말들은 분명히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모든 말들을 관통하는 핵심 논리는 한마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
보통 성공이라는 건 어떤 분야에서의 성공이든 일정한 부를 수반하게 마련이고 따라서 성공한 사람이라는 건 보통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사는 사람을 뜻하죠. 때문에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저 말은 바꿔 말하면 누구나 노력만하면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살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일견 당연해 보이고 일리있어 보이는 저 말의 이면에 무서운 말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곤 하는데 그건 바로 "성공한 사람의 부는 보장하지만 그 외에는 알 바없다."라는 말입니다. 즉 저 말의 이면에 숨겨진 뜻은 성공한 사람이 풍요롭게 사는 게 당연한만큼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궁핍하게 살든, 노예로 살든, 비참하게 살든 그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는 뜻이죠. 오죽하면 과거부터 현재까지 "억울하면 출세해라."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는 사회가 바로 한국사회 아닙니까?
저런 인식이 상식으로 통하는 사회라는 것은 성공해야만, 출세해야만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인간다운 권리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라는 반증이 아닐까요? 과거부터 현재까지 인류의 역사에 존재한 그 어떤 사회든 출세한 사람은 그 사회에서 많아봐야 10%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 10%도 안되는 사람들만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인간다운 권리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사회보다 구할에 육박하는 성공하지 못한 보통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인간다운 권리를 누리며 행복을 추구하고 살 수 있는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 아닐까요?
그 어떤 사회든, 심지어 인간을 인간이 아닌 짐승처럼 취급하는 노예제도가 공식적으로 존재했던 수천년전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개천에서 용난' 케이스는 줄곧 존재해 왔습니다. 노예중에서도 신분의 격차를 딛고 출세한 사람들도 존재했고 공사판 출신의 서울대 수석도 존재했으며,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자 고졸 출신의 대통령도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1%도 채안되는 성공사례를 예로 들며 90%의 사람들에게 너희도 노력만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양심이 없거나 뇌가 없거나 아니면 둘 다 없는 것이겠죠.
구조맹에 장님을 뜻하는 맹(盲)자를 붙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눈이 있고 머리가 있고 양심이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 구조적인 문제를 보면서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맹인과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색맹이라고 하고 문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을 문맹이라고 하듯이 구조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을 구조맹이라고 부르는 건 지극히 적확한 표현이죠.
사회 구조를 비판하고 성공한 사람들, 속칭 기득권들을 비판하면 그게 노력하지도 않고 좋은 결과만을 바라는 염치도, 양심도 없는 사람이 되는 걸까요? 사회 구조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중동의 어느 국가처럼 모든 국민에게 국가에서 몇억씩 주기를 바랍니까, 아니면 그냥 놀고먹어도 국가에서 풍족하게 먹여살려주길 바랍니까? 저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이 바라는 건 다만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바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권리라는 것은 인류의 역사속에서 꾸준히 발전해왔고 우리보다 앞서간 서양에서 확립해 놓은 인간으로서의 보편적인 권리들을 말하는 것이죠. 대부분이 노동자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노동권,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아닌 그 어떤 누구라도 법앞에서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평등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 아닌한 그 어떤 것이라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권 등의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들을 제대로 보장해 달라는 게 몰염치하고 양심없는 짓일까요?
이렇게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들을 말하는 걸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빨갱이'라고 불러왔고, 너무 오래된 말이라 21세기에도 계속 쓰기에는 멋쩍었는지 요즘에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종북주의자'라는 세련된(?) 말로 부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못배워서, 즉 무지몽매해서 저런 프로파간다가 먹혔다고 쳐도 교육열이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서 대학진학률이 90%에 육박하는 고학력 시대인 지금도 여전히 표현만 달라진 저 구호가 잘 먹히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이 사회에서 구조맹이라는 부류가 한세대만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 되물림되는 지속적인 문제인 것 같아 마음이 갑갑합니다. 구조맹의 자식들이 구조맹을 만드는 가정 교육과 제도권 교육을 받아왔으니 그들 또한 구조맹이 되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한글만 겨우 깨친 기성세대가 아닌 고등교육을 받은 수많은 젊은 사람들이 구조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모세대와 같은 구조맹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걸 볼 때면 많이 아쉬운 게 사실입니다.
이러한 구조맹들은 사회 문제의 원인을 구조에서 찾는 게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 해석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세월호 사건'은 이준석의 잘못과 해경의 무능력이 원인이고, '세모녀 자살 사건'은 개인의 무능력 혹은 해당지역 복지담당자의 과실이 원인이고, '땅콩 회항 사건'은 조현아의 일탈이 원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앞에서 국가 시스템의 부재나, 대통령의 무능력, 재벌지배 시스템의 전근대성을 얘기해봐야 돌아오는 건 "그게 왜 나라탓이고 대통령탓이고 재벌탓이냐?"라는 반박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서 찾기 때문에 구조맹들은 필연적으로 문제의 해결책 또한 개인 차원에서 찾게 마련이죠. 때문에 이들은 '해경을 해체'하고, '이준석을 구속'하고, '조현아를 처벌'하면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러한 해결책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전혀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고 따라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와 비슷한 문제가 다시 발생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맹들이 얼마나 근시안적이고 미시적인 시야와 사고능력을 가졌는지를 우리는 그간의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뼈아프게 통감하고 있구요.
이런 사실 때문에 한가지 확실한 것은 구조맹이 많은 사회일수록 사회는 개선되지 못하고 정체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이는 그 사회가 필연적으로 점차 후진적인 사회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또한 이는 우리사회의 문제가 비단 소수의 기득권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려줍니다. 이명박, 박근혜와 같은 출세한 구조맹들이 이 사회를 죽이는 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거라면 이 사회의 수많은 평범한 구조맹들은 총을 만들어서 총알을 넣고 그들에게 총을 쥐어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총탄을 맞고 피흘리고 있는 이 사회가 확인사살되고난 후라면 이 사회에서는 더이상 그 어떠한 희망도 품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괴물들이 있기는 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인간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이자 작가인 프리모 레비가 한 말입니다. 이 말이 너무나도 뼈저리게 다가오는 요즘입니다. 적어도 이 글을 읽는 분들만이라도 부디 괴물들에게 총을 쥐어주는 구조맹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