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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홍진 감독 작품 그리고 곽도원, 황정민, 천우희로 이어지는 출연진. 여기에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10점은 관객의 관심을 집중시키는데 부족함이 없다.
영화를 보고 나온 나의 영화평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정말 잘 만들어진 장르 영화다. 공포 중에서도 오컬트를 좋아하는 내게, 작년 '검은 사제들'에 이어 놀라움의 연속이다. 공포 영화 자체가 빈약한 한국 영화계에서 반 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작품성이 있는 오컬트 영화를 두 편이나 만나다니!
공포 영화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거부감이 너무 심하지 않다면 볼 만 하다. 15세 관람가에서 알 수 있듯 잔인한 장면이 가득한 것도 아니고 갑툭튀로 공포를 쌓아가는 영화가 아니고 심리적인 압박이 주는 공포이기 때문이다.
특히 나무랄데 없는 연기와 더불어 감독의 연출력은 이동진씨가 왜 별 점을 그렇게 주었는지 이해하게 한다. 지옥도와 같은 풍경에서 천국과 같이 아름다운 컷 까지, 관객을 혼란에 빠뜨리는 정교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 하게하는 시퀀스 구성. 무엇보다 2시간 36분이라는 상영시간을 잊게 만드는 리듬감은 현재 국내 최고의 감독 중 하나인 봉준호와 비교하여도 뒤지지 않는다.
물론, 호불호가 생길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특히, 개연성은 무척이나 할 말이 많다. 어찌보면 이 영화는 개연성의 무시가 시작이고, 끝이기 때문이다. 이를 중요시 하는 관객이라면, 불만이 터져나올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볼 가치 또한 충분하다.
여기까지가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상태에서도, 읽으셔도 좋을 내용이다. 이후부터는 영화의 결말까지 전부 다 말하게 되므로 영화를 보지 않으셨다면 유의하시기 바란다.
곡성해석은 빈틈이 없을 수 없다
나는 곡성이라는 영화는 어떤식으로 해석해도, 모든 구멍이 다 메꿔지진 않는다고 본다. 이 영화는 애초에 개연성 무시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곡성에서 죽어 나자빠지는 사람은, 그냥 죽는다. 영화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동네 주민이 계속 죽어가는 이유, 딸이 목적이 된 이유.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 천우희의 말도 끝까지 노리는 이유가 될 지언정 목적의 이유는 아니다.
나는 감독은 처음부터 이유를 만들지 않았다고 본다. 일광의 대사 '미끼에 걸린 물고기'는 이를 드러낸다. 애초에 그들은 이유를 갖고 희생자를 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은, 곡성이라는 영화는 왜 사람이 죽고, 누가 죽였고 그런게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내용은 마지막에 쓰기로 하고, 그 내용을 말하기 위해 어쨌든 내 나름대로의 빈틈있는 영화의 줄거리를 써보겠다
대략적인 이야기
일본주술사와 황정민은 애초에 같은 편. 훈도시와 황정민의 배역 명 일광은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 결말을 보면 부정할 수도 없다. 둘 다 쉽게 말하면 흑주술사.
이들은 악마소환을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원하는 악마는 마지막에야 소환되고 그전에는 악령급 들이 주민의 몸 속으로 들어가는 듯, 이러한 과정에서 주민은 계속 죽어간다.
여기서 악마소환의 대상으로 곽도원의 딸이 선택되고, 곽도원은 딸을 살리기 위해 일본주술사를 협박. 일광이 딸을 구한다는 이유로 온다. 그리고 살 날리는 굿을 한다. 여기가 영화의 백미인데, 관객은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사랑의 짝대기도 아니고 살을 날리는 대상이 누구인지, 무슨 주술을 거는지는 어떻게 연결을 해도 다 말은 된다. 하지만 모두 다 확실치 않다. 영화 끝까지. 당연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개인적으로는 "일본주술사는 숨은 붙어있는 박춘배에게, 일광은 천우희에게, 딸은 기존의 씌인 악령의 영향 혹은 천우희에 대한 공격으로 딸을 보호하던 천우희의 힘이 사라져서" 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일본주술사가 박춘배에게 주술을 거는 것은 확실해 보이니 넘어가고, 일광이 천우희에게 한다고 생각한 이유는 (일본인 주술사는 같은 편이므로, 당연히 제외) 딸에게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일광이 그 자리에서 살을 날려 딸을 죽여서 남는 게 무엇일까? 없다. 영화에서 다른 악령씌인 주민이 보여주는 (가족을 살해하고 자신도 죽는) 패턴과도 다르고, 이미 악령걸려서 공격의지를 보이는 딸에게 살을 날려 죽을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상대방이 천우희라면? 천우희는 영화 속에서 일본주술사를 감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그 순간에도 천우희는 일본주술사를 방해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스쳐가서 정확히 봤는지 확실치가 않지만, 그때 천우희도 어딘가 다친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광은 자신들의 계획을 방해하는 천우희를 죽이려 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일광이 무언가를 찾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자신들의 주술을 방해하는 천우희'를 알게 되었고, 그녀를 막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더 결말과 연결지어 생각하면 말이 된다.
어쨌든 다음 날, 곽도원은 친구들과 일본주술사를 찾아가고 일본주술사는 박춘배를 찾아간다. 이때 일본주술사가 놀라는 건, 어제 천우희의 방해로 박춘배에게 행한 어떠한 의식이 실패 (악마를 불러들이는 것이라 생각)했고,그 결과는 일본주술사도 예상하지 못 한 것. 그리고 박춘배는 곽도원과 친구들이 퇴치!
여기서 또 한 번 관객을 혼란시키는 장면이 등장한다. 인간적인 모습의 일본주술사. 나는 일본주술사가 여기까지는 그저 법력 강한 흑주술사 정도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능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당당했지만, 실패한 흑마술 (박춘배 실패) 자신보다 능력이 커 보이는 방해자 (천우희) 자신에게 살의를 품은 인간들로 인해 약한 모습이 들어난 것이라 본다.
문제는 천우희에게 쫓기다 곽도원의 차에 치이고, 악마로 화한 결말이다.
나는 (이게 맞다고 주장하기 어려울 정도운 추측이지만) 일본주술사는 처음부터 악마였던 것이 아니라 인간. 그러다 자신의 죽음과 모종의 규칙이 맞추어지며 악마로 화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완전히 개인적인 추측은?!
영화 결말은 물론 오컬트 영화 전통적으로, 악마는 신을 흉내 낸다. 나는 악마가 세상에 화하는 것도 예수님을 따라하려 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자신을 팔아넘기는 자, 죽음 그리고 부활. 그리고 일련의 사태에서 위의 조건이 충족되어다고 본다. 그래서 곽도원이 일본주술사의 시체를 버릴 때, 일광은 미끼를 물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것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악마가 세상에 나타나기위한 조건을, 곽도원이 채웠다는 것!
그리고 결말. 천우희는 곽도원의 딸을 구하기 위해 우선 일광을 내쫒는다. 그리고 곽도원을 붙잡아 두려고 한다. 하지만 일광과 일본주술사는 곽도원을 집으로 들여보내야 한다. 하지만 일광은 도망친 상태. 이에 이미 악마가 된 일본주술사는 기적 같은 것을 일으켜 일광을 다시 곡성으로 불러들인다. ( 여기서 일광이 이게 뭐냐고 상당히 놀라는데, 이는 자기가 알던 일본주술사의 법력 수준을 넘어선 것이라 그렇다 생각한다, 일본주술사는 그때 시점에서는 악마의 능력을 가졌음으로 )
일광은 계속 천우희를 믿지 말라고, 방해를 하고 곽도원을 결국 천우희를 뿌리치고 딸에게 가고. 엔딩
개연성 없는 것은 감독의 의도
영화를 봤다면 알겠지만, 개연성이 상당부분 가려져 있다. 왜 두 주술사가 곡성을 택했는지, 주민은 왜 죽는지, 딸이 왜 목표가 되었는지, 천우희는 무엇인지, 어떻게 천우희는 딸을 구하려 했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더구나 극중 일광의 대사는 그냥 그렇게 된거야. 특별한 이유 없어. 라는 이야기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개연성 없음이 감독이 의도한 바라는 것이다. 감독이 역량비달로 개연성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감독 스스로가 그것을 노리고 만들었다. 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장면 하나가, 바로 벼락씬이다. 사람이 벼락은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장면이 영화에서 등장하려면, 앞뒤에 무슨 맥락이 있어야 한다. 근데 맑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더니, 벼락이 극 중 인물 중 하나에게 떨어진다. B급 영화도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벼락을 인물에게 내려 꽂지 않는다.
감독은 아무런 이유 없는 죽음과 사건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닌가 싶다. "세상의 일들이 꼭 원인이 있어야 생기는 건 아니야. 잘 살다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큰 병이 걸려 죽을 수도 있어"
"그렇다면 너에게 너는 절대 해결 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공포의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래?"
거부된 데우스엑스마키나
처음 곡성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잡았던 원제는 거부된 '곡성, 거부된 데우스엑스마키나 인간은 자신의 두발로 서야한다' 였다. 뜬금없이 절대자가 나타나 모든 사건을 해결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데우스엑스마키나.
마지막 천우희의 말을 곽도원이 따르고, 닭이 3번 울기를 기다렸다면 나는 이게 '데우스엑스마키나'와 다름이 없다 생각한다. 천우희가 어떻게 딸을 구할 수 있는지, 그에 대한 복선은 전혀 없다. 너무나 뜬금없이 나타나 말하는거다. 내가 해결하겠다고.
더구나, 곽도원 입장에선 일종의 게임이론상 '천우희의 말을 듣는 것이 무조건 유리'하다.
1. 천우희의 말이 거짓말_ 딸이 집에 있다는 말도 거짓. 그렇다면 당연히 집으로 가는게 아니라 계속 딸을 찾아야 한다. 딸이 집에간 것은 사실이나, 집으로 가지 못 하게 하려고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곽도원이 집에 못 가게 하려 했다면, 딸이 집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하는것이 맞다.
2. 천우희의 말이 사실_ 기다려야 한다. 딸이 집에 없다면, 어차피 집에 가도 곽도원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즉, 곽도원은 두 개의 선택지 중 자신의 선택이 틀려도 잃을 것이 없는 선택 대신, 자신의 판단이 틀리면 모든 것이 망가질 선택을 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만약 영화에서 곽도원이 천우희의 말을 들었고 딸이 구원을 얻었다면. 데우스엑스마키나. 외에는 설명할 게 없다. 천우희가 딸을 구할 방법 따위는 영화 상에서 단 한번도 묘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감독은 개연성, 명확한 이유가 없는 과정으로 주인공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 가장 중요한 선택지에서. 의도적으로 위와 같은 상황을 만들었고, 주인공이 거부하게 만들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진짜 중요한게 뭔지도 모르면서
영화 속에서 곽도원은 딸에게 일본인과 어떻게 연결이 된건지 그것을 계속 묻는다. 그때 딸은 가만히 있다가 욕과 소리를 지르며 대드는데, 그때 나온 대사가 '진짜 중요한게 뭔지도 모르면서" 이다.
나는 이 대사가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나 중요한 순간에, 너무나 의미심장한 대사이기 때문이다. 각본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가는 감독이 아무 이유 없이 저 중요한 상황에서 대사를 저렇게 넣을리가 없다. 도대체 딸이 말하는 "진짜 중요한게 무엇일까?" 그리고 그 말은 무엇을 말 하는 것일까?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두 발로 서야한다
나홍진 감독은 혹시 이런 의도가 아니였을까 나는 짐작한다.
'너에게도 엿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어. 말도 안되는, 억지로 맞으려고 해도 맞기 힘든 벼락을 맞는 것 처럼. 말도 안되는 일이 네게 벌어질 수 있어.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너는 어떻게 할거야?'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그 이유만을 찾아다닐거야? 아니면 절대자의 구원을 기다리며, 그것에 기대어 해결을 바랄거야? 응? 너의 생각은 어때?'
그래서 나는 극중에 딸이 곽도원에게 했던 대사를 인용해 제목을 달았다. 삶에서 정말 힘든 일이 일어났을 때, 행해야 할 것은.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 이유를 생각하는 것보다. 어떻게든 살기위해 발버둥 쳐야 한다는 것. 설마 최악의 최악의 상황이 되어도 살아가기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그냥 내 생각이고. 감독의 의도는 전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엔딩에서 곽도원과 다른 한 축을 담당했던 부제를 생각하며 그런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부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근거로 일본인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 정체를 묻는다. 나는 너의 말을 그대로 따르겠다고. 네가 무슨 말을 하든 그 말을 믿겠다고.
그리고 악마를 만나고, 주를 찾게 된다. 이 부분의 해석은 참 다양하다. 어떤이는 "일본인이 진짜 예수다. 그래서 일본인에게 주라고 하는 거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이는 "믿음과 진실에 대한 불편한 질문" 이라고 하기도 한다.
나는 그 장면이 자신의 의지로 두 발로 선 자와, 자신의 의지를 포기한 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마지막 시퀀스가 곽도원/부제로 편집된 이유라고 생각한다.
애매한 절대자를 믿기 보다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자신이 목적한 바를 가지고 어떻게든 발버둥 치며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인간과 판단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거대한 악을 발견한 그 순간도 손에 든 낫에 더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절대자를 찾는 이.
나홍진 감독은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과연 너는 어떻게 살겠느냐고, 절대적인 힘 앞의 무력함을 겪게 된다면 과연 너는 어떤 선택을 하고 싶냐고. 묻고 싶었던게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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