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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최고 공공의적
뱅상 카셀 주연의 "죽음의 본능". 실화가 바탕이다
■ 쟈크 메슬린의 초창기
태어난 곳은 클리쉬, 파리의 교외도시(벙리유라는 통칭) 중류층 출신인데 당시 내가 살고 있던 곳 옆도시였다. 파리의 교외
도시는 대개 범죄의 온상으로 악명이 높으며, 대부분의 벙리유들은 통행에 주의하며 눈치를 보아야 한다. 범죄율이 희박한
몇몇 교외도시 역시 부자들만 사는 전원주택 집합지 삘의 주거지로서 통행에 은근히 눈치가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이곳은
외국인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에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가 참 많다. 말 그대로 기숙학교로서, 산 속에 지어진 수도원을 개조한 학교다. 학
생들은 방학이나 되어야 집에 돌아올 수 있으며, 1920년대 근처에서는 획일화된 헤어스타일에 교복까지도 학생들에게 강
요하기도 했다.
2007년 프랑스 방송에서는 이 시대를 재현하여 학생들을 학교에 집어넣고 1년 간 교복과 획일화된 헤어스타일을 강요하며
조상이 겪었던 특이한 경험을 학생들에게 제공한다는 모토 하에 성적과 복학규정 준수를 기준으로 채점, 승자를 가리며 감
동을 재현하는 프로도 리얼 버라이어티 게임의 일종으로 방영되었다.
쟈크 메슬린도 역시 이런 기숙학교(College de Juilly:중학교가 아니라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시절부터 갱스터의 비범함
을 나타내며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으로 두 군데나 학교를 옮기며 전학을 다녔다 한다. 1955년 결혼했지만 1956년 답
답한 아내와의 결혼생활을 집어치웠고, 이후 입대하여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프랑스 압제군으로 복무하며 싸우다가 1959년
귀국했다. 여기서 그는 총기에 대한 지식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6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인 갱스터의 캐리어를 쌓아올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1962년, 은행을 털기 직전 정보가 새
어나가 세 명의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별을 하나 달면서 그해의 직업적 범죄자(criminal professionel)로 선정되었고 바
야흐로 공공의 적 랭킹에 공식 등재된다. 18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감옥에 갇히지만 복역을 마치자마자 스페인으로 건너가
다시 1965년까지 맹활약을 펼치다가 체포되었고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 쟈크 메슬린의 해외 캐리어
1966년, 카나리아 군도에 레스토랑을 연 메슬린은 곧 1년도 지나지 않아 프랑스의 샤모니(알프스의 휴양도시)에 있는 호텔
을 털어낸다. 1968년 2월 그의 정부와 수행운전사와 함께 캐나다로 건너갔고 곧 몇 건의 대형 유괴사건을 계획했지만 실행
직전 단계에서 정보가 새어나가 실패하며 알칸소에서 체포되어 캐나다로 인도되었다.
저 맑은 눈망울을 보라.
눈빛에 어딘지 모르게 정기가 흐르는 것이 더 섬뜩하다
1972년, 10개월의 실형을 받았지만 5개월 복역 후 5명의 동료들과 함께 바로 탈옥하였고, 그의 동료였던 쟝 폴 메르시에와
함께 몬트리올의 은행 두군데를 털어내는데 성공하였다.
같은 해 9월2일, 아직 감옥에 갇혀있던 다른 세 동료들의 탈옥 조력에 실패하였고 그 일이 일어난 지 일주일 후, 두 명의 산
림감시원을 살해하고 잠복했다가 그해 말 두 명의 애인과 함께 베네수엘라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쟝 폴 메르시에와는 여
기서 결별, 그는 캐나다로 돌아갔다.
■ 프랑스로 돌아온 공공의 적 넘버원
1972년이 지나기 전, 쟈크 메슬린은 프랑스로 돌아와 은행 한군데를 털어내면서 "돌아온 공포"로서의 위명을 드높인다. 곧
체포되었지만 판사를 인질로 삼아 탈출에 성공, 악명은 드높아 가기만 했다.
4개월 후, 파리의 아파트에서 프랑스 경찰특공대에 의해 체포되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프랑스에서 제일 살벌하다는 르
상테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 파리 아파트 습격사건에서 경찰의 특공대장을 맡고 있던 사람도 대담하기 이를데 없었다.
중범죄자가 도사리고 있는 소굴 바깥에서 확성기로 지르는 천편일률적인 소리는 다들 알 거다.
"무기를 버리고 나와서 항복해라! "
그러자 안에서 메슬린이 대답했다.
" 네가 무기를 버리고 이 안으로 들어온다면, 나는 나가서 항복해 주겠다. "
안티갱 프랑세즈의 경찰서장 로베르 브로사(Robert Broussard)는 별로 고뇌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장기간 메슬린의 뒤를 쫓
아온 노련한 경찰로, 메슬린을 그 자신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을 것임을 믿었
다.
" 좋다. "
그는 무기를 버리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눈 앞에 있는 공공의 적 No.1 과 위스키를 한잔 나눈 후, 무기를 버린 메슬린을 데
리고 나와 체포했다.
로베르 브로사. 1970년 안티갱 프랑세즈의 사령탑이었으며 로베르 브로사. 1970년 안티갱 프랑세즈의 사령탑이었으며
쟈크 메슬린의 숙적이었던 대담하고 끈질긴 경찰이었다.
르 상테 감옥의 재소기간동안 메슬린은 집필에 전념, "죽음의 본능"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집필해 냈다. 일정 시간이 지난
후 곧 대사건이 벌어졌다.
자서전의 집필이 마무리된 1978년 5월 8일, 세명의 감옥 동기들과 함께 르 상테 감옥을 탈옥하는데 성공하였고 그 과정에
서 경찰 한명을 사살, 프랑스 사법부를 상대로 보복공격을 천명하면서 자신의 사진과 보복 선언서를 언론에 돌린 것이다.
급기야 메슬린이 당시의 판사를 납치하여 살해해 내는데 성공하자 결국 이 일은 프랑스의 국가적 비상사태로까지 비화되었
다.
사진은 메슬린이 보복선언과 함께 보냈던 사진의 발췌:
이걸 보는 당사자들은 기분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된다
그는 틈틈이 용돈벌이에도 신경을 썼다. 보석상과 은행 금고를 제집 드나들 듯 했으며 해외에서 쌓아올린 캐리어와 인맥을
기반으로 무기 밀매에도 손을 대었고, 직접 손을 써서 살해한 사람으로만 39킬의 기록을 갱신했다.
쟈크 메슬린의 변장에 따른 그의 사진들. 밝혀진 것만 이 정도다
이 기간 그는 변장술이 완전히 손에 익을 대로 익어,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능숙했으므로 경찰의 수배
전단은 "
소용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감쪽같은 기만술로 미국 OAS(CIA의 전신)의 파일에 있는 자신의 기록에도 엉뚱
한 파일을 배치시켜 그들을 교란했다.
1979년, 메슬린은 억만장자 앙리 리비에라의 수많은 경호원을 물먹이고 그를 납치하는데 성공하면서 캐리어의 절정을 치
닫기 시작, 신문 제호를 딴 별명 "공공의 적 넘버 원"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몇몇 언론에서 그를 로맨티시즘이 가미된
의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하였고, 메슬랑 역시 이를 기꺼워하며 그러한 언론에 대한 환영으로서 수차례에 걸친 개인 인터뷰까지
제공했다.
유명한 잡지 "파리마치"의 표지모델.
당시 메슬린보다 훌륭한 광고가치를 가진 모델은 없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도 일어났다. 메슬린에 대한 비우호적인 기사를 쓰던 Minute지의 언론인이자 DTS(Directorate of
Territorial Security)의 끄나불이던 쟈크 티어는 메슬랑에게 납치되었고, 잔인하게 난도질을 당하고 죽음을 맞은 것이다.
쟈크 메슬린에게 납치된 사람은 한 방에 죽을 수 있는 헤드샷의 은혜를 입지 못했다.
■ 최후
급기야 프랑스 내무장관마저 메슬린의 보복 선언에 놓이게 되자 급기야 정부까지 다급해 졌다. 이윽고 사상 최고의 대인 테
러작전(그건 체포작전이 아니라 일종의 테러작전이었다)이 기획되면서 경찰 특공부대의 "메슬린 다운" 작전이 시작되었다.
메슬린의 거처와 동선에 대한 정보가 새어나가 프랑스 경찰에게 전달된지 몇 시간 후, 파리의 포트 클리냥 왕복 4차선 차도
에서 메슬랑이 운전하던 BMW 앞에 트럭 한대가 교통법규를 위반하고 슬쩍 끼어들었다. 이어 세 대의 트럭이 완전히 메슬
린의 승용차를 둘러싸 버렸다. 갇혀버린 것이다.
갑자기 끼어들어 정면을 가로막았던 트럭의 뒷문이 덜컹거리며 열리더니 장착형 기관포와 두 명의 기관포 사수, 네명의 경
찰특공대가 완전무장 상태에서 기관단총을 겨누고 나타났다.
메슬린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수많은 총탄을 발사되었고, 조수석에 타고 있던 메슬랑의 연인 실비아는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메슬린은 파리 한복판의 차도에서 기관포탄을 난사당하고 죽었다.
프랑스 경찰은 미션 클리어를 선언했고, 당시 프랑스의 대통령인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은 축하전문을 보내어 경찰의 노고
를 치하했다.
후일 문제가 되었던 것은 당시 메슬랑은 전혀 어떠한 반항의 기미도 없었으며 저항의 기미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문곡직
문답무용, 다짜고짜 무반동 기관포를 난사하여 사살한 경찰의 행동이 정당방위의 수준을 한참 넘어선 오버액션이었다는 법
적 문제였으나, 이는 쟈크 르네 메슬린의 찬란한(?) 명성에 짓눌려 기각되었다.
■ 포스트 메슬린
메슬린은 굳이 정치를 하지 않아도 한 나라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 있는 길은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려주었다. 당
시 프랑스에서 집에 돈 좀 쌓아놓고 있다는 사람들은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고, 메슬린이 스스로를 의적으로 칭하기 시
작한 1979년 초 부패의 혐의가 있는 정치인들의 경호원들은 몇 배로 불어났다고 한다.
사실 메슬린은 결코 의적이 아니다. 무기밀매와 살인, 유괴와 은행강도를 밥먹듯이 한 이 희대의 범죄자가 제정신이라고 생
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가 보여준 카리스마적 초지일관은 감탄할 만 하다.
실제로 아무도 그의 카리스마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는 한번도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어긋난 사회에서 찾지 않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불만을 삭이는 대신 그것을 표출했다. 그는 스스로 사회가 만들어낸 기형아이길 거부하는 정통파 확신범이었고 그것이
그가 내뿜는 어둠의 카리스마를 빛내 주었다.
단지 그는 초지를 한참 엉뚱한 곳, 잡아서는 안되는 곳으로 잡았을 뿐이다.
출처 : 카카오피아 - WootOp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