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게 보신 분들은 김빠질 수도 있으니까 뒤로 가셔도 됩니다~(한줄요약 있어요 소곤소곤)
*스포 많아요!!!! 아직 곡성 안 보신 분들은 영화의 백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뒤로 가주세요
근래 나온 영화 중 상당히 문제적이고 스타일리쉬한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영화를 혹평하는 이유는 목적의식만 보이고 깊이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당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15세 관람가 라는 점.
어딜봐서 누굴위해서 15세 관람가 판정을 받은 건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실질적인 노출이나 폭력성이 아니더라도 과연 이 영화가 가진 정서나 카타르시스가 미성년자에게 적합한 종류의 것인지 의구심이 듭니다
물론 관람가 라는 것이 해당 연령부터는 이 영화를 "권장"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해당 연령부터 "접근"할 수 있게 열려있는 영화라면 좀더 책임감있는 메시지가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예술을 비평하겠답시고 앉은 자리에서 지나치게 선비스러운 주제로 떠들고 있고 일개 프로불편러로 비쳐질지 모른다는 것도 알지만 저도 이 영화가 청불이었다면 전혀 문제시하지 않았을 미장센이고 수위였습니다
물론 수위라는 게 "시각" 적인 묘사에 국한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곡성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 묘사, 주제의식이라는 것은 "성인" 이 즐기기에 더 맞춤맞다는 것이지요
좀더 불쾌하고 극명한 악을 표현하는 한이 있었더라도 개연성 구멍을 채우고 성인눈높이,성인의 지적수준이 꼭 필요한 "더 어렵고 지독한" 묘사로서 담백해질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현혹하기 위한 목적의식, 낚시를 위한 낚시, 감독과 관객이 가진 정보의 격차에서 오는 눈가림 또는 눈속임의 연속이라는 게 얼마나 피곤했는지 모릅니다
잘 짜여진 플롯과 연출기법은 절대로 관객을 기만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관객을 잘 기만했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한 플롯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나홍진 감독의 놀라운 재능이라면 바로 그것이었겠죠
보통의 감독들은 관객을 "잘" 그리고 "끝까지" 기만하지 못합니다
영화적 가치는 "스릴" 과 "반전"으로 하여금 완성되는 건 아니니까요..
곡성은 정말 잘 짜여진, 놀라운 "쇼" , 퍼포먼스라는 생각은 듭니다 그런 부분에서 점수를 매긴다면 만점이 맞아요
다른 감독은 그렇게 할 줄 모른다기보다 그렇게까지 서사가 아닌 생략으로써 스릴을 몰빵할 가치가 없는 장르적 영화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예술은 감상이 아니죠 누굴 가르치는 학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지만 예술"작품" 이라는 것은 만든이의 "철학"이 담겨있지 않으면 그 무게감이 현저히 가벼워진다고 생각합니다
리얼리티로 점철된 어떤 영상이 다큐와 다른 것은 만든이의 철학, 자율적이라는 것만으로 이미 특별한 개인의 "관점" 에서 오는 새로운 물결에 감응하는 우리의 파동같은 것으로 하여금 정신적 쾌감을 준다는 사실일 테니까요
영원한 난제, 예술이냐 외설이냐 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서 외줄타기하는 만든이와 보는이의 양심문제라고 보는데
타인의 철학을 들여다본다는 건 전혀 다르고 새로운 날것의 인생을 예감해보는 것이고, 그게 영화건 음악이건 하나의 작품은 하나의 인생으로서 존재하는 바, 거기엔 우리가 사람에게 느끼듯 "좋다/싫다"라는 감정(취향)으로 친구가 되고말고를 선택할 수 있는 건데 "옳다/그르다"라는 판단이 개입하면 편견과 차별로 맺어지기 십상이겠죠
영화에는 꼭 획일화된 정의,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교과서적 깊이가 있어야 한다고 보진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마다의 정체성, 장르적 쓸모에 따른 가이드라인은 존재한다고 생각해요(코미디영화는 웃겨야 깊은 거고, 공포영화는 무서워야 깊은 것처럼)
그리고 관람가에 따라 그 수위를 예상하고 준비해서 어떤 장르의, 어떤 등급의 영화를 볼 것인가를 취사선택 할 수 있어야 하는 건데.. 곡성의 관람가는 물음표투성이입니다
네임밸류에 따른 관객몰이의 극대화를 위한 느슨함인가요..
내일모레면 계란한판인 제가 보기에도 힘들고 잔인해서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내용이 무서웠던 게 아닙니다. 연기자의 분장, 존속살해를 연기하는 배우의 나이, 기괴한 소리와 흉측한 비주얼들.. 이 나이 먹고 봐도 그로테스크한 화면의 잔상때문에 일상생활이 어려운데 15살에 이 영화를 봤다면 엄청난 트라우마가 남았을 것 같아요
요즘은 뉴스 헤드라인만 봐도 그 잔혹함에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 같은데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라고 얌전하란 법은 없습니다(물론 저는 기사라는 것도 불특정 남녀노소가 접근가능한 만큼 너무 적나라한 살해방법이나 훼손정도를 가감없이 묘사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래도 활자와 영상은 다른 거잖아요ㅠㅠ
"극" 이라는 걸 알고 보더라도 평생 눈으로 확인할 기회가 없을지 모르는 시체와 살해현장을 이토록 무방비하게 목도해야 한다는 게 정말정말 불편했어요
청불이라면 안 봤을 거예요 악명높은 나홍진이었고 추격자였으니까..
그러니까 예술적 자유와 영화적 가치는 차치하더라도 아직 정서가 불완전한 미성년, 그리고 저같은 왕쫄보들은 이 영화를 피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 만든 영화라고 해서 이 모든 장면들을 억지로 소화하고 칭송해야할 의무는 없는 거니까요..
호불호가 갈리는 정도라고 보지 않습니다 저에게만큼은 유해한 영화였고, 이 영화를 보기 전의 평범하고 안전한 상상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ㅠㅠ
이 영화가 15세라니..!!!!!(울먹) 제 말 들으세요 두 번 들으세요 심약한 분들은 보지 않는 쪽이 낫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내 멀쩡한 정서를 156분씩이나 난도질하게 둘 만큼 유의미한 메시지는 1도 없어요
심지어 저는 김복남살인사건도 감명깊게 본 사람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억압된 여성성에 대한 카타르시스라도 있었는데요(물론 겁쟁이라서 눈뜨고 본 복수장면은 얼마 안 되지만..ㅋㅋ)
종구의 의심은 정녕 피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나요?
인간의 우유부단함(어쩌면 측은지심일지도 모르는 상생의 본능), 선의 무능(악과 마찬가지로 선이라는 것도 어떤 의지에서 오는 게 아니죠. 악을 응징한다거나 선을 보전하는 술수일 수가 없어요)을 지적하거나 환기시키는 건 쉬워요
하지만 인간의 "지성"은 그 모든 허무와 유한함을 "극복"하기 위해 발전해왔고 그래도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건 누구의 무엇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영원한 "과제"일 뿐이에요..
저는 예술가라면 거기에 대한 해답까지는 아니어도 어떤 방향성이나 감수성을 표시하는 게 좋은 태도라는 취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례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라는 영화가 있죠
이 영화도 순수한 악, 악의 우연성, 그리고 지혜보다 빠르게 유포되고 연소하는 악의 진화성을 그리면서 상대적으로 우연성에 맞서는 인간의 열망 또는 선한 의지가 무력하게 그려졌습니다만 이토록 악에 대항하는 인간의 무고함만을 부추기는 작위적 장치라고 느껴지진 않았습니다(남주가 차안에서 총맞고 죽어가던 사람에게 물을 주지 않았던 찝찝함?죄책감?으로 인해 다시 돈가방을 훔친 장소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양심 또는 친절이며 그로 인해 죽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선택은 언제나 결과로 돌아오죠. 선할 것도 악할 것도 없는 그저 얽히고설킨 상호작용의 결과인 거예요. 운명의 불합리는 우리가 태어날 때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태생적인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나아가야 하고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남주 와이프의 죽음 전 대사나 보안관의 꿈이야기처럼 감독은 영화를 다큐가 아닌 철학으로 끝맺었다고 생각하기에 이 영화의 뒷맛은 잔혹함에 대한 공포만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되는군요)
하지만 종구의 경우, 악을 막을 방도가 없었습니다
"의심" 하지 않거나 "현혹"되지 않을 기회는 있었지만, 그랬다해도 효진을 구할 순 없었습니다(효진을 구하더라도 아내와 장모를 지킬 방도가 없었다는 게 맞을까요)
왜냐하면 종구의 의심대로 외지인은 악마였고, 무명은 귀신이었으니까요(저는 영화상 무명의 롤이 선이긴 해도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봤으나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인간과 다른 존재로 염두하셨다더군요)
어떤 잘못된 의심이 종구의 딸을 제물이어도 싸게 만들었을까요?
일광은 살을 날리는 굿을 하기에 앞서 종구에게 몸가짐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오입도 하지 말고 먹는 것도 조심하라고 하죠
효진은 "증상"이 나타나기 전, 부모의 오입을 목격하는 역할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잉태하는, 나의 존재 근원인 부모의 오입이 불경하기라도 해서 귀신이 깃들기 좋았던 건가요? 차라리 외도하는 장면이었으면 수긍하기 터부스럽고 자연스러웠을 터인데.. 금실이 나빠도 부성애가 절절한 경우는 왕왕 있으니까요
아무튼. 외지인은 자신을 악마라고 확신하는 자에게 약했습니다
주술적 여지도 없거니와 검은사제들에서처럼 정체를 들키는 것이 악마의 약점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즉 확신이 아닌 의심 속에서만 두고두고 좀먹을 두려움이 파생된다는 듯이 너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니 너희의 두려움에 자신을 이용하는 게 아니냐는 뉘앙스까지 풍깁니다
하지만 아니죠. 제발 의심해달라고~ 확신하지는 말고 의심만 해달라고~ 울부짖는 것같은 모양새가 외지인의 태도입니다
심지어 감독은 그걸 부추기기 위해 굿하는 장면의 진의(살이 누구를 향하는가)를 알기 어렵게 교차편집하고, 무명과 악마의 육탄전을 통편집합니다(물론 저는 일광이 훈도시를 입고 굿에 대한 비용을 언급할때 악의 편인 줄 알았지만-외지인도 닭사면서 흥정을 했드랬죠)
오히려 종구가 외지인을 죽일 때, 아물론 죽지 않았으므로 산에서 굴러떨어진 외지인의 몸뚱이를 가드레일 밖으로 던져버릴 때
아니 좀비가 된 박씨의 시체를 여럿이서 해치울 때부터
"의심"이 아니라 의심으로 하여금 실체가 된 행동, 그 "폭력성"에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악마를 의심하여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 또다른 "악"을 저지르는 것. 그보다 더 악마의 "취향"이자 자랑스러운 세력확장이 또 있겠습니까
하지만 종구의 행위가 악의 재현, 또는 외지인에게 필요한 주술적 의식의 완성이 아니더군요
다 나은 줄 알았던 효진이가 각성하고, 그 이유는 마치 진짜 악마는 무명인 것처럼 아직 효진이가 나을 수 있는 원흉이 제거되지 않은 것처럼..
그저 "진짜" 악마가 외지인이냐 무명이냐 로 앵글이 옮겨가서 "어? 내가 영화를 잘못 본건가?" 싶더라구요(돌던지던 무명의 이야기로 인해 의심이 심어졌다는 것 자체가 ㅁㅊㄴ의 이야기를 무시해 넘기지 않고 편견없이 들어준 종구의 순수성을 의미하는 줄;;)
그러다 부제 앞에서 외지인은 정체를 드러내고, 일광은 종구의 집에서 시체의 사진을 찍어 돌아섭니다
만일 이 모든 것이 외지인의 의도였다면,
자신이 죽은 걸로 믿게 하여 시간을 벌고 무명이 주는 마지막 기회마저 의심하게 만드는 것까지가 외지인의 계획이었다면,
그 기회는 악마에게 더 리스크가 큰 내기 아닌가요?
혹시라도 인간이 믿어버리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데.. 그걸 의심하지 않기에 악마인가요ㅎㅎ
믿고 싶은 것(의심을 증명 또는 상쇄할 목적에 가까울수록)을 보여주면, 보이는 것에 현혹되는 인간..
어쩌면 외지인은 그순간 그들이 보고 싶어했던 자신의 죽음을 미끼로 무명에게 마지막 덫을 놓은 건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외지인이 아니라 감독의 의도인지, 영화는 무명이 악마에게 덫을 놓았다고 진행됩니다
무명이 예수 또는 마을신령쯤 되는 존재였다면 애당초 닭이 3번 울기 전에 비슷한 수위의 믿음을 무조건적으로 강요하고좌절되는 모습을 보여주던가(그녀를 의심하는 게 매우 합리적인 거라고 믿도록-외지인에 대한 종구의 의심은 사실 세련되지 않아서 평범한 현대인이자 도시사람인 저는 공감하고 몰입하기가 어려웠거든요), 하물며 무명이 외지인처럼 헤비한 적막감없이 약간의 코믹모드로 피를 말리고 씨를 말려버리려고 한다는 말로 현혹만 했다는 게.. 위신(?)이 떨어진다고 할까요
이 밸붕이 다분히 의도된 것 같아서 루즈했습니다
저는 무명을 믿었(?)는데(무명을 믿는다기보다 일광이 악이라는 확신에서 오는 반사작용이었달까)
나름 감독의 메시지를 잘 따라가보려고, 아그럼 의심과 불안 때문에 박해받는 외지인을 그렸다는 건가? 단서들을 다 버리고 단지 반전 때문에? 일광빼고 다 착한놈?
그런데 결말은 무명빼고 다 나쁜놈ㅋ 이더라구요
어떤 결말이 명쾌하다못해 전율마저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앞선 서사 속의 모호함과 복선들이 퍼즐조각처럼 완벽하게 맞물리면서 유레카! 외칠 수 있는 작품과 나의 일체감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영화를 열렬히 좇아가 오르고오른 정상에서야 허락되고 완성되어 보이는 황홀경..
근데 곡성이 생각하는 관객과의 소통은 그게 아니었는지 목적의식을 위한 장난같은 눈속임만 남더라구요
나머지 몰입할 수 없었던 경우의 수도 따져보겠습니다
무명의 말대로 닭이 3번 울고 집으로 돌아갔을 경우 가족들이 살아있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한쪽에선 악마가 버젓이 부제를 농락하고 있는데?
이미 닭이 3번 우는 동안 효진의 칼부림은 끝났을 거란 시간적 텀은 논외로 둡니다. 피차간 오컬트 샤머니즘 안에서 과학은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으니까.. 닭이 운다는 것의 의미가 분절된 시간의 단위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무명이 놓은 덫을 이용해 부제가 악마를 처단할 시간을 주는 것처럼 느껴지게 편집을 해놨던데 이것도 낚시의 일환이었겠죠
어쨌건 부제는, 종구의 선택과 무관하게 악마를 제압하지 못했습니다(대화로 유추하건대 진실을 말하면 죽이지 않겠다고 해서 외지인이 본성을 드러냈으므로 종구가 닭이 3번 울고 들어갔어도 부제는 외지인을 처치할 명목이 없음)
그렇다면 닭이 3번 울고 난 후라는 것은 성서적 상징(+해가 뜨면 음기가 약해지는?) 외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누구의 어떤 힘으로 일가족몰살을 저지할 수 있다는 거였을까요?
어차피 종구는 무명을 믿지 않기로 정해져있는 인물이기에 가능한 설정이었다는 것 말고는 어떤 설명이 가능할지..
애시당초 종구는 무명을 의심하고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니까 다른 가능성엔 힘을 줄 필요가 없었겠죠
이걸 관객이 느끼게 한 사실, 어떤 행동이 그 캐릭터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메타포에 이용되거나 캐릭터를 강제한다고 느낀다면 그건 실패한 개연성이에요..
만약 닭이3번울고 집에 들어가 모두가 살았다면 외지인은 악마로 다시 태어나는 데 실패하고 부제의 낫에 맞아 죽었을까요?
이것도 무명이나 감독이 설명해주지 않아 모르겠네요
그저 종구가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만으로 칼부림이 무효화되진 않을 거고, 부제가 외지인에게 던진 질문 역시 종구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부분이 아니니까..
그럼 가족을 구하기 위한 다른 선택에 또 어떤 게 있었을까요
도로에서, 아니 그전에 외지인을 잡아서 좀비만큼 가학적으로 응징하고 소멸시켰다면 효진이는 저주에서 풀려났을까요?
어떠한 가정도 지금과 다른 결말을 담보해주지 않는다는 게..
의심을 위한 의심, 파멸을 위한 파멸로 가는 어설픈 인과관계가..
굿과 살인이 난무하는 이 영화의 주제의식이요, 제 나이에 반도 안 되는 어린 여자아이가 분했던 주술적 혼란과 존속살해의 끔찍함을 맞바꾸기에 충분한 영화적 담론이었을까요..
진지는 석쇠불고기 먹었습니다
누구나 이렇게 심각하게 이거저거 따지면서 영화를 보지는 않죠
예술과 도덕은 양립하기 어려워요.. 그래야할 필요도 없구요
이 글은 저스트 온니 "사견" 입니다
저와 의견이 다른 분들의 "인성"에 대해서 의심하지도 않습니다ㅎㅎ
제가 왕쫄보 핵소심이여서 그래요..
이만한 악, 이만한 피해자의 이야기를 그리려면 19금딱지정도는 붙여놓고 주의 좀 주시지ㅠㅠ하는 아쉬움..
그리고 감독님 인터뷰를 보고 나니까 더더욱 아쉽고 영화적 감수성이 마비되는 느낌..?
효진이의 머리핀만 무명 몸에 걸쳐져있지 않고 땅에 떨어져있던 것이 어떤 장치가 아니라 여배우 머리에 해봤는데 별로라고 했던가요? 아무튼 딱히 이유는 없었다고 한다던지..ㅎㅎ
너무 쿨하셔서(?) 다른 뜻은 없어, 돌아가(!) 하는 것 같고 맥빠지고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괜찮아요 두 번은 안 볼 거라서ㅎㅎ
한 줄 요약
곡성 안 본 눈 삽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