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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파병과 사건 당시 전쟁 상황 1950년 6월 25일, 개전 당시 북한군은 10개 보병사단, 1개 전차여단, 18만명의 병력, 전투기 211대, 전차 242대를 보유하고 기습남침을 했다. 개성과 포천이 6월 25일 아침에 함락되고, 26일에는 문산, 동두천, 의정부, 주문진으로 거의 무저항 상태에서 진격했다. 그리고 6월 28일에는 서울을 함락했다. 무초(John J. Muccio) 주한미대사로부터 남침사실을 보고받은 비국정부는 6월 25일 오후 유엔 안비리에 “38선 이남의 남한 영토에 불법침입한 북한이 공격을 중지하고 38선 이북으로 철수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제출하요T고, 유엔은 이를 결의했다. 하지만 북한은 이를 무시하고 진격을 계속했다. 6월 26일, 한국정부는 임병짃 주미대사를 통해 미국의 신속하고도 충분한 지원을 요청한다는 대한민국 국회 결의문을 미국 대통령에 전달했다. 미대통령은 6월 25일 주일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첫 명령을 내렸다. 미 제5공군을 이용하여 주한미국인들을 안전하게 일본으로 철수시킬 것과 한국에 항공기 10대를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북한군의 침공이 계속되자 미국 대통령은 유엔안보리에 대한국 무력원조를 회원국에 권고하는 새로운 결의안을 제출하여 이를 통과시켰다. 이어서 투르먼 대통령은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한 공군 및 해군을 사용할 것을 명령했고, 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하여 중국이 대만을 참략할 것에 대비했다.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은 6월 29일, 한국으로 날아와 한강 전선을 직접 시찰한 후 육군부대를 파견하지 않고서는 북한군을 저지할 수 없다며 처음엔 1개 연대를, 곧이어 2개사단 파견을 건의했다. 트루먼의 재가를 얻은 맥아더는 6월 30일,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주일미군 증 규슈에 있는 제24사단을 파병하라고 명령했다. 최초로 파견되는 부대는 스미스 대대, 제21연대 제1대대였고, 그 대대장은 Charles B,Smith 중령, 스미스 대대는 4대의 C-54기에 탑승하고 7월 1일, 08:45에 이타츠케 비행장을 출발했다. 하지만 부산지역에 자욱했던 안개로 인해 10회나 회항하다가 15:00시에 겨우 착륙했다. 이들은 열차에 탑승하여 한국 국민의 환호를 받으면서 7월 2일 08:00시에 대전에 도착했다. 이어서 날아온 52포병대대 A포대(105미리 6문)의 조를 이루어 7월 5일, 오산에서 북한군 제4단을 맞이해 싸웠다. 스미스 대대는 급조된 대대였기에 통상 대대규모의 절반에 불과했지만, 이 대대는 높은 자부심과 사기로 충천해 있던 나머지 북한군이 자기들을 보기만 해도 도망할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들을 가지고 싸우다 그만 혼비백산하고 병력의 절반을 잃은 상태에서 평택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속속 파병된 제24사단의 품에 난겼다. 비록 패했지만 그의 오산 전투로 인해 국군 재편성에 필요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 때 24사단장 딘 소장과 국군총참모장 정일권간에 작전 협조가 이루어졌다. 경부도로를 중심으로 미군은 그 서쪽을, 한군군은 동쪽을 맡기로 한 것이다. 미 제24사단은 대전에 사령부를 차리고, 제34. 21. 19연대를 차례로 투입하여 평택, 천안, 조치원 등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북한군의 진격을 좀 지연시킬 수 있었을 뿐, 북한군 제3,4사단을 이겨낼 수 없었다, 7월 15일, 16일에는 금강의 도하를 허용하였고, 이어서 공주와 대평리를 상실한 후 대전에서의 결전을 결심했다. 바로 이 때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군의 지휘를 위임했다. 7월 14일이었다. 이에 맥아더 사령관은 워커 중장을 주한 미지상군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7월 17일, 워커 중장에게 한국군 지휘를 위임하였다. 그리고 워커 중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동의를 얻어 8군사령관의 지격으로 한국군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미 제24사단이 평택, 천안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순간인 7월 6일-12일 사이에 미제25사단이 한국전에 파병되었다. 이 25사단은 안동, 상주, 황간 지역에 있던 한국군과 교대를 했다. 경부도로와 호남국도의 분기점인 대전을 잃으면 호남을 적 수중에 넘겨주는 것이라 판단한 미군은 대전방어에 역량을 집중했다. 하지만 이미 많은 병력을 잃은 24사단으로서는 역부족이었다. 워커 장군은 24사단장 딘 소장을 방문하여 일본에서 추가 투입되는 제1기병사단이 충북 영동지방에 투입될 수 있도록 7월 20일까지 만이라도 버텨달라는 희망사항을 전달했다. 딘 소장은 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북한군 제3 및 4사단과 제105탱크사단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24사단은 후방으로부터 포위당해 사단장 딘 소장이 실종되었다 포로가 되었고, 사단은 참전 이래 병력 50%인 8,000명 정도를 잃었다. 그리고 미제1기병사단은 7월 18일 영일만에 도착했다. 지금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어린 미국 병사들에 참으로 미안하고 고맙기 이를 데 없다. 북한군의 전술 북한군 전술은 한마디로 ‘일점양면' 작전이었다. 이는 포병과 기갑으로 도로 주변의 방어선을 돌파한 후 양족에 있는 산간지역에서는 보병들을 집중 전개하여 측방을 돌피한 후 중앙 돌파병력과 연결하여 방어중인 미군부부대를 포위하는 북한 특유의 전술이었다. 북한은 이런 전법을 시위 때에도 응용한다, 적은 수의 시위대가 다수의 경찰을 부분적으로 포위하여 집중 공격하는 현상은 바로 이러한 북한 전법인 것이다. 미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북한 전술은 정규전과 후방게릴라전의 연결작전이었다. 북한의 정찰대원의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이들은 공격이 있기 훨씬 전에 미군 후방으로 침투하여 미군의 배치 상황들을 정확히 파악해 보고했다. 그리고 일부 정찰대원들은 후방의 미군 퇴로를 차단했다. 이들 정찰병들은 흰색의 피난민 옷이나 미국 복장으로 위장한 후 피란민에 섞여 미군 방어진지를 통과하여 미군의 후방을 차단하고 미군진지 좌표를 본대에 알려주었다. 이 정찰대와는 별도로 북한군은 장거리 유격대를 활용하였고, 여기에는 지역 빨치산, 동네 공산주의 동조자들이 적극 참여했다. 매일 남하하는 수만 명의 피란민들은 이들 정찰대와 지역 빨치산들이 숨어서 침투하기 가장 좋은 매체였다, 미군에게 그리고 한국군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는 수만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피란민이었다. 북한군은 이러한 위장 사기 전술에 매우 능숙했지만 미군은 언제나 이에 당해 피난민 노이로제 상태가 되어 있었다. 미군이 무너지는 것은 언제나 정규군과 피란민으로 위장한 후방 게릴라전의 배합작전에 의한 것이었다. 북한군은 수백명의 부녀자, 어린이, 노인들은 전투지역으로 걷게 하여 마치 북한군이 진군하는 것처럼 속이기도 했고, 피난민을 가장하여 남하한 후 갖자기 미군을 쏘아 죽이는 등의 행동을 감행했다. 미군의 탄약과 보급물자를 털어 북한군에 제공하는 약탈부대도 운용했다. 피난민 노이로제가 미국부대 전역에 확산돼 있었다, 7월 24일 이후 미군 전폭기들은 적의 탱크, 트럭, 별력, 차량, 교량 분만 아니라 게일라 병력이 숨어 있다고 판단되는 철도, 터널, 건물, 마을, 도시 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폭격을 감행했다, 조종사가 의심하는 지역은 공습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이를 당시의 거친 상황으로 보아 정당방위의 범주에 속했다고 생각한다. 게릴라 침투 사례 7월 18일 영일만에 상륙한 미 제1기병사단은 이러한 북한군의 전술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7월 22일 사단장은 미8군으로부터 북한군의 특이한 잔술과 게릴라 전술에 대해 알려주었지만, 북한군의 전술은 그 이상이었다. 북한군은 주로 ALSREKS인들을 이용하거나 스스로 민간인 복장을 하여 미군을 속였다. 미군 후방으로 침투한 북한군 정찰대는 미군의 지휘고와 포병진지를 직접 게릴라전법으로 공격하거나 북한 포로 하여금 공격하게 했다. 정찰대와 미간인은 한 팀이었다. 7월 23일에는 사단 포병단 진지 근방에서 2명의 소년(10, 11세)를 붙잡았는데 이들은 미군부대 위치를 북한군에 알려주는 것이었다. 임신을 가장한 여인이 옷 속에 소형 무전기를 슴기고 있었다. 14세의 소년은 북한군의 길 안내자였다. 이런 갖가지 희한한 사례를 경함한 미제기병사단은 한국에 오자마자 피난민 공포증에 걸리게 되었다, 세계의 그 어느 군대를 이 상황에 대입하더라도 이는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7월 25일, 제1기병사단은 영동에서 목숨 부지하기에 신경이 공두서 있었다. 오전 10:30분, 북한군 침투부대와 게릴라 병력이 하얀 옷을 입고 영동읍 북방과 남방에 위치해 있는 포병부대에 접근해 기관총과 소총 사격을 가했다, 수십명이 희생됐다. 제1기병사단은 영동에서 3일동안 항공사격 및 야포사격의 도움으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했다. 하지만 7월 25일 2개 중대 모두를 실종당했다. 이러한 공포스러운 상황을 맞아 미군은 미란민은 물론 마을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마음은 그보다 60여년 후인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가졌던 마음과 동일했다. <결론 > 북한군이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미군의 후방에 침투한 게릴라 전략은 개전초기 북한군의 승승장구의 원인이 되었지만 피난민인지 북한 게릴라인지 구분할수 없게된 미군에 의해 노근리등 수맣은 민간인 오폭과 살상을 일으킨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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