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구름~~
작성일: 2011-01-14 (금) 13:48
한국좌파에 대한 소고-7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프랑스에서는 독일에 협력했던 친독분자들에 대해 잔인한 보복이 가해졌습니다. 살기 위해 독일군 장교들에게 몸을 팔았던 프랑스 여자들은 전부 삭발당하고 주리돌림을 당했습니다. 부역자들, 밀고자들도 린치를 당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우리도 해방 후에 친일파에 대해서 프랑스가 했던 것처럼 보복을 하고 단죄를 해서 합당한 처단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그런 좋은 예로서 프랑스를 듭니다.
그러나 프랑스를 우리나라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프랑스는 1차 대전 때 독일에 이겼던 승전국이고, 전 세계에 광대한 식민지를 가진 손꼽히는 열강이며, 백 년 전에는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지배했던 초강대국이었습니다. 프랑스의 학문과 과학기술은 영국, 독일과 함께 세계를 리드하는 수준에 있는 나라입니다. 독일의 전격전에 아차 하는 사이에 무너지긴 했지만 비시 정부라는 자신의 정부가 있었고, 독일의 점령 기간도 불과 4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나라의 국민으로서 이 정도 짧은 시간을 참지 못하고 적국에 빌붙어 동족을 배신했다면 처단되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조선은 프랑스와 전혀 사정이 다릅니다. 합방 당시에 조선은 중세의 야만국가였고, 서구열강이나 일본에 비하면 원시사회나 다름없었습니다. 메이지 이후 50년 만에 일본은 괄목상대, 우리가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거인으로 자랐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차이는 어른과 갓난쟁이나 같았고, 국력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습니다. 전체 민중의 개화 정도는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과 뉴기니 정글 속의 원주민 정도의 차이를 보였습니다. 조선 말기에 우리의 수준이 어떠했는지 민중의 삶이 얼마나 짐승에 다름없었는지 그 참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설명해주어도 이해를 못합니다.
거기다가 우리는 프랑스처럼 일본이란 나라와 전쟁을 해서 진 것이 아니었고, 국왕과 대신이 도장을 찍어서 합병에 동의한 형식을 취했습니다. 일본에 대해 적국이라는 의식을 민중이 가질 수 없었고, 합방의 기간이 36년에 달했습니다. 한일합방 때 태어난 사람은 해방될 때 36살의 장년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평생 일본 외의 다른 나라를 접해본 적이 없이 살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자기나라는 일본이었습니다. 조선과 프랑스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해방이 되었을 때, 프랑스가 친독파를 처단했던 것처럼 친일파를 처단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옥석을 가릴 수 없었고 친일파를 처단하자고 들면 친일파 아닌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물론 친일파가 아닌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 대부분이 일제시대의 하층민들이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구태여 친일에 끌어들일 필요성을 못 느낀 저학력, 저소득, 저영향층이었다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배우고, 능력이 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친일하도록 강제했고, 대부분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친일을 하지 않고는 배울 수도 없고 기술을 가질 수도 없고 사회에 영향력있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일제 36년을 지나고 보니 배우고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은 전부 친일파고, 친일파 아닌 사람을 보면 하나같이 밑바닥 계층이었다는 것입니다. 군대를 만들려고 해도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고 지휘경험이 있는 사람은 전부 일본군 장교 출신뿐이었고, 경찰을 만들려고 봐도 근대적인 경찰업무의 경험이 있고 수사능력이 있고, 치안의 개념을 가진 사람은 전부 일제시대 순경 아니면 형사 보조원뿐이었습니다. 그런 사람 말고는 조선시대 포졸도 못할 사람들뿐이었습니다. 대학을 만들어 인재를 양성해야겠는데 교수 할 사람은 전부 일제 시대 일본대학 나온 사람뿐이었습니다. 친일파 말고는 사서삼경이나 가르칠 사람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광복 이후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한테는 한 가지 길밖에 없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외길이었고, 우리는 그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 결과 반세기만에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걸어왔던 길은 어떤 길이었습니까?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친일을 했건 만주에서 유격을 했건, 새로운 조국에 능력을 바쳐 봉사한다는 다짐이고 결의였습니다. 물론 시청앞 광장에 모여 궐기대회를 하고 담합을 외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광복 직후 대다수 한국인들의 공감대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일본군 장교였던 사람과 독립군 출신이 아무 갈등없이 한국군을 창설했고, 신분과 출신을 묻지 않고 군을 키워 공산군과 싸웠습니다. 당시 새로 창설된 한국군의 성분은 아주 다양했지만 그것 때문에 불화가 생긴 적이 없었습니다. 새로운 조국의 장교로서 나라를 지키는데 일본군 출신이나 항일유격대 출신의 구분은 필요가 없었고 누구도 그것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군내부의 불화와 반목은 후일 이념과 사상 때문에 야기됩니다.
학계, 언론계, 예술계, 경제계 공히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과거를 묻고 전비를 따지다가는 새나라 건설은 물건너 간다는 것에 모두들 묵시적으로 공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국내에 있었던 인사들 대부분은 친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을 동병상련으로 서로 이해하고 있었고, 남을 비난해봤자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라는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불문에 붙이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한 사람이 이승만대통령입니다. 만약에 이승만대통령이 아닌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친일파 척결을 하겠다고 나섰다면 대한민국은 아직까지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새나라 건설은 둘째 치고 국가의 기틀도 세우지 못했을 것이고 적화는 필연이었을 겁니다.
어쩔 수 없는 길이었지만 이것이 남긴 후유증은 만만치 않습니다. 승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이 상대적으로 덜 배우고 못 살은 사람들입니다. 사회의 주도세력이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보기에는 자기들은 친일한 것도 없고 일제 덕본 것도 없는데, 광복 후에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여전히 친일파들 세상이다 이 말입니다. 어제 왜넘 순사했던 넘이 해방조국에서 경찰서장을 하고, 어제 왜넘 면서기했던 넘이 해방조국에서 세무서장을 해먹고, 어제 왜넘 장교했던 넘이 한국군에서 별을 달더라 이 말입니다. 어제 일제 밑에서 기업하던 넘이 적산 불하받아서 졸지에 거부가 되더라 이 말입니다. 나는 왜넘 밑에서도 국이었는데 해방됐다는 조국에서도 국이냐 하는 불만이 안 생길 리 없었습니다.
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