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까지 우리나라는 데모가 끊이지않는 나라였다. 매캐한 최루탄 가스는 도로를 뒤덮고 화염병에 맞아 몸에 불이 붙은채 비명을 지르며 도로를 뒹구는 전의경의 참혹한 모습을 담은 뉴스영상도 심심찮게 볼수 있었다.
산업화, 민주화 시절 대학은 지금같은 취업학원이 아닌 세상을 바꿔보려는 피끓는 청춘들의 집합체였다. 학교근처 술집들은 대학생들의 열띤 토론과 울분의 장이었다.
그런데 90년대들어 거짓말처럼 데모가 우리사회에서 급속도로 사라졌다. 표면적인 이유는 독재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정권이 들어선데 있겠지만, 더큰 이유는 사람들이 갈수록 이기적으로 변해가기 때문일 것이다.
피흘리고 감빵 끌려가며 싸웠던 학생들보다 그 시간에 도서관에서 공부했던 학생들이 더 잘살더라는거다. 피는 내가 흘렸는데 정작 나에게 돌아온건 전과자 낙인과 불안정한 미래 뿐이었고 내 피가 만들어낸 열매는 다른 사람들이 챙겨갔다.
대학가에는 더이상 술퍼마시며 밤새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젊은이들은 없어졌다. 그냥 몸만 큰 이기적인 어린애들만 있을 뿐이다.
사실 이런 배경에는 학생운동이 학생들희 혆안보다 이념대결로만 흘러간 측면도 없지않다. 군사정권이 표면적으로 종지부를 찍은 마당에 학생운동도 시대에 맞춰 변해야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구태의연한 대자보와 신세대에게 씨알도 안먹히는 이념타령만 반복하고 있었다. 이미 북한의 실상이 낱낱이 공개된 마당에 현실성없는 통일론이나 반미구호보다 학생들은 당장의 취업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운동권 총학은 점점 비운동권 총학으로 교체되어갔고, 97년 IMF사태는 그 방점을 찍었다.
IMF는 재벌들에게는 하늘이 주신 기회였다.
7,80년대 민주화운동은 자연스럽게 노동운동으로 이어져, 노동자들의 권리는 상당히 개선된 상태였다. 그런데 IMF는 하루아침에 공들여 쌓은탑을 작살내버렸다.
외국자본이 한국노동시장의 지나친 경직성과 폭력성 때문에 투자를 꺼려한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IMF가 공개적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요구하면서 비정규직이라는 노예계층이 생겨났다. 노조는 와해됐고, 재벌들은 그 기회를 틈타 노동력을 마구 착취하며 다시 부의 탑을 쌓아올렸다.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IMF를 조기졸업하면서 노동자들은 고용안정을 기대했지만, 착취의 단맛을 본 재벌들은 철저하게 이를 방해했다. 재벌들의 노동자를 다루는 방법은 IMF를 거치면서 한단계 진화했다. 무조건 누르면 노동자들이 단합해서 대든다는걸 간파한 재벌들은 이이제이(殺氣騰騰) 전략을 들고나왔다. 바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대우였다. 노조에 가입된 소수의 정규직에겐 높은 임금과 복지를 제공하고, 언제든 잘라버릴수 있는 다수의 비정규직과 협력업체 노동자를 착취하는 방법이었다.
100명의 노동자중 20%가 정규직이라고 가정해보자. 100명에게 모두 만원씩을 주면 사용자는 100만원의 비용이 들지만, 20명에게 2만원을 주고 나머지 80명에게 5천원을 주면 사용자의 비용은 80만원으로 줄어든다. 똑같이 만원씩 주면 더 내놓으라고 다같이 덤벼들지만, 이렇게 차별해서 주면 지들끼리 물고뜯고 싸운다.
노동3권을 가지고 있는 정규직만 잘 대우해서 배불려주면 그들은 침묵할 것이고, 비정규직은 힘으로 눌러버리면 그만인것이다.
재벌들의 입장에선 이건 신의 한수였다. 배부른 정규직 노조는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면 노동현안에 침묵했고, 비정규직은 갈수록 열악한 환경에 내몰렸다. 법적으로 노동권을 줬기에 문제될게 없고, 비정규직들의 불만은 교묘하게 정규직 노조에게 돌려놓았다.
더이상 대한민국에는 불쌍한 여공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태웠던 전태일은 없었다. 아니 설사 있다하더라도 언론은 이를 알리지 않았고, 나만 잘먹고잘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은 타인의 고통에 눈돌렸고, 고통받는자들은 싸울 힘도 방법도 없었다.
노노갈등을 유발해 노동자의 단합을 막는 재계의 계략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하지만, 재벌들의 탐욕은 아직 끝이 아니다. 그들의 최종목적은 모든 노동자를 비정규직화 시키는것이다.
비정규직들의 정규직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을때가 바로 D-DAY다. 재벌들은 어용언론을 통해 정규직이 비정규직에 비해 얼마나 많은 임금과 복지혜택을 받고있는지 떠들어대면서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권리와 대가를 가로채고 있다고 떠들어댄다. 오랜시간동안 차별과 착취를 당해온 비정규직들은 분노의 화살을 정규직들에게 돌릴것이고, 정규직들이 아무리 항변하고 파업해도 대세를 돌릴수 없다. 비정규직들은 소위 귀족노조가 자기들과 같은 바닥으로 떨어지는것을 보면서 변태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낄것이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는게 아니라 정규직이 비정규직이 되는 전형적인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사실 이런사태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구심점 역할을 해야할 그들이 눈앞의 이익에 눈멀어 자기들이 지켜야할 힘없는 노동자들을 외면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비정규직 철폐하라. 최저임금 인상하라 입에 발린 구호만 몇번 외치다가 자기들 임금인상 타결되면 다시 입다물어 버리는 그들의 행태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실망을 넘어 혐오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사태때 지역 중소 협력업체 직원들의 반응은 매우 냉담했다.
첫번째는 철저하게 자기들 이익만 챙기던 정규직 놈들이 자기들 발등에 불떨어지니 도와달라고 난리친다.
두번째는 힘없는 비정규직과 중소업체 노동자들이 힘들어할때는 외면하던 정치권과 시민단체가 귀족노조 문제에는 저렇게 적극적으로 달려드는구나하는 상대적 박탈감이었다.
현재 노동운동은 머리(정규직)와 몸통(비정규직)이 분리되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현실을 직시해야할 눈은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었고, 말을 해야할 입은 먹는데 정신이 팔려서 침묵했다. 행동해야할 몸통은 머리의 이기심에 혐오감과 배고픔으로 비쩍마른 팔다리는 싸울 힘을 잃은지 오래다.
과연 머리는 이제 어떻게 싸울까? 자기 머리를 쓰다듬으며 먹이를 주던 손이 몽둥이를 들고 머리를 내려친다면 어떻게 막을것인가? 방패를 들고 막아줄 팔은 이미 앙상한 뼈만 남아서 축 늘어져있는데..
공존이 아니면 공멸 뿐이다. 지금이라도 정규직 대형 노조는 자기들 임금인상이나 복지확대가 아닌 최저임금의 현실화와 비정규직의 고용 안정화에 총력으로 싸워야한다. 이건 단순히 비정규직을 위한게 아니다. 자신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하루라도 빨리 깨닫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재벌들의 칼날은 조만간 머리를 겨눌것이다. 그때 팔다리가 없음을 한탄하지말고 지금이라도 공존의 길을 걷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