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이미 학기가 끝난 나는, 며칠 전 여자사람 친구가 있는 도시로 놀러 왔다.
그 친구는 알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어떤 미국인 교수의 한국사 수업의 조교로 이번 학기에 일했는데,
마침 학생들의 기말고사 채점을 해야 해서 내가 도와주게 됐다.
남북 기본합의서, 남북 공동 선언 등 여러 차례의 남북 당사자간의 주체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분단 이래 남북 관계가 계속 교착과 퇴행을 거듭하게 된 원인에 대해 서술하라는 문제.
다분히 진보적인 교수님의 관점에 맞게, 학생들은 대체로 남북 관계의 문제를,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이 아니라, 남북 주체 모두의 다양한 정치 역사적 맥락에서의 남북의 정치적 전략과 이해관계에 의해 지속적으로 변주되고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결국 문제는 양자 모두 통일을 지속적인 진정성을 가지고 접근하지 못했으며 (한 두 차례의 아주 예외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이것이 독일과 달리 한반도에서는 통일 과업이 상호 신뢰에 기반한 장기 지속적인 프로젝트로 이행되는 것을 막았다는 사실을 학생들은 어느 정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대부분 균형감 있는 접근을 보여준 학생들의 답안은 채점하는 나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채점을 거듭하면서 나는 한 가지 깨달았는데, 거의 모든 학생이 남북 관계 교착과 퇴행에서 미국의 책임의 문제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미국의 역할과 책임은 수업 시간에 다루지 않은 것이냐?"
이 모든 문제의 기원으로서의 남북 분단에서 미국의 결정적 역할, 50년대-70년대 미소 냉전과 이념 대립이 한반도 분단 고착화에 직접적으로 미친 역할,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의 북한의 미사일 위기와 핵 개발에서 미국의 책임...
왜 이 똑똑한 미국 엘리트 학생들의 답안에서 미국의 역할과 책임을 양심적으로 직시하는 학생이 없는가?
갑자기 내가 후하게 준 점수를 좀 깎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오후, 소니의 크리스마스 개봉 예정작이던 "인터뷰" (김정일 암살을 다룬 코미디 영화)가 상영취소 되었다는 기사가 미 전역에 속보로 전해졌다.
한국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이 영화 "인터뷰"는 거의 올해 초부터 소니가 미국 전역에 공격적으로 홍보하면서 상당한 흥행 몰이를 할 것이라는 게 확실시된 영화였기 때문에, 이 속보는 미국의 많은 영화팬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현재 미국의 영화 평론 사이트, 매거진, 신문 등에는 북한 테러리스트들의 압력에 굴복한 소니의 결정에 부정적인 여론이 다분히 지배적이다. 영화 자체의 기획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소니의 결정이 테러리스트들에게 잘못된 사인을 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미국인들에게 북한이라는 나라는 언제나 조롱거리요, 웃음거리다. 동시에 세계 평화를 해치는 악의 축이고, 자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집단이다.
이 미국내 북한의 이미지는, 북한의 성립 이후 지금까지, 거의 단 한번도 변한 적이 없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극적으로 변화해 온 것과는 엄청나게 대조적이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비웃고 욕하는 북한이라는 괴물이, 근본적으로 자신들이 만들어낸, 적어도 자신들이 참여해서 만들어진 괴물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이 괴물을 만든 사람들, 이 괴물을 만드는데 참여한 사람들, 그 자신들도 지독한 괴물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나는 그래서 영화 상영 취소에도 여전히 웃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