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역사적 실존자체에 대한 회의론은 19세기 들어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표적 인물은 본대학의 시간강사였던 브루노바우어(1809-1882)와 브레멘의 목사
알베르트 카토프(1850-1906),
그리고 카를스루에의 철학 교수였던 아더 드류스가 있다.
그 이전에, 특히 초대교회에서는 예수의 실존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의 신성을 공격하는 데 실패한 무리들
은 무려 1800년이나 지난 뒤에 엉뚱하게도 예수의 존재자체에 대한
역사적 회의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사실 예수님에 대한 역사성은 기독교의 탄생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기원을 놓고 보자면 어떤 종교도 카리스마적 인물 없이는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민간토템이 집대성되어 그 기원조차 잘 알 수 없는 힌두교와 같은 종교는 시작점을 모르니 창시자를 찾을 수도 없겠지만
기독교는 뚜렷한 발생 시기와 막연한 기복이 아닌
분명한 가르침을 선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과 다르다.
게다가 예수의 생애 이후 불과 30여년 밖에 지나지 않아
그분의 전기인 복음서가 집필되었고,
현존하는 최고의 사본이
1세기에 작성되었다는 것
또한 충분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고대의 전기나 역사서들이 집필된 시기를 본다면
복음서는 실로 놀라우리만큼 빠른 시기에 집필된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고대 전기나 문서들의 작성시기는 어떠한가?
알렉산더의 전기는 BC323년 그가 죽은 지 무려
400년 이상이 지난 후에야 아리안과 플루타크에 의해 작성되었고,
타키투스의 '로마사'는 AD116년 경 완성되었지만
현존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사본은
AD850년에 복사된 것일 뿐임에도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또한 조로아스터에 가장 인기 있는 파시교도(회교도의 박해로 8세기에 인도로 피신한 조로아스터 교도의 자손)의 전기는
AD1278년에 작성되었다.
BC6세기의 석가모니의 최초의 전기도 AD1세기에 기록되었으며
마호메트의 전기 또한 그가 죽은지
100년이 완전히 지난 767년에야 비로소 기록되었다.
이에 비하면 복음서의 기록시기가 지닌 가치는 엄청난 것이다.
그럼에도, 기독교자료가 모조리 조작되었다는 혼란스러운 주장들이 범람하고 있고,
이런 혼란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 싶으신 이들을 위해
예수에 대한 역사적 비기독교 자료들을 정리하고자 한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자료이다.
이런 연구자료들은 성경을 향한 믿음을 뒷받침할 수 있는 훌륭한 보강증거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역사성(역사적 증거자료) - 자료1 [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AD37,38~100년 이후, 역사가, 유대인이었으나 로마에 항복하여 로마의 문필가가됨.
요세푸스는 예수에 대해 2회 언급하고 있다. 유대고대사는 AD93년 완성되었다.
Ⅰ. 유대고대사 18:63-64
18장 빌라도의 재임기간에 관한 이야기 중 예수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원문
"이 즈음에, 굳이 그를 사람으로 부른다면, 예수라고 하는 현자 한 사람이 살았다. 예수는 놀라운 일을 행하였으며, 그의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선생이 되었다. 그는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다. 그는 바로 그리스도였다. 빌라도는 우리 유대인 중 고위층 사람들이 예수를 비난하는 소리를 듣고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명령했으나, 처음부터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예수가 죽은지 사흘째 되는 날, 그는 다시 살아나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것은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이미 예언했던 바, 예수에 대한 많은 불가사의한 일들 중의 하나였다. 오늘날에도 그를 따라 이름을 붙인 족속,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족속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다."
☆ 회의론자들의 입장 : 전체 가필이다. 바리새인인 요세푸스가 유대인의 이단인 예수를 그리스도라 칭했을 리 없고, 더구나 그가 가르친 것이 '진리'라고 했을 리도 없다.
★ 반론 : 부분가필이다. 즉, 처음에 요세푸스가 언급한 예수에 대한 기록에 기독교인이 가필한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예수에 대해 비관적인 유태인 신학자 마이어도 동의하고 있다.
Ⅱ. 유대고대사 20:200
62년 대제사장 아나누스가 이끄는 산헤드린이 "그리스도라고 불리우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돌로 쳐죽이는 일을 기록하고 있다. 야고보의 죽음을 부당하게 여겼던 요세푸스는 아나누스가 결국 대제사장직을 박탈당하는 것 까지 기술하고 있다.
☆ 회의론자의 입장 : 이 구절이 예수의 실존을 증명하지 못한다. 텍스트의 주인공은 명백한 야고보이고 예수는 야고보에 대한 수식어일 뿐이다. '누구'의 형제가 존재한다는 것이 '누구'의 존재에 대한 설명은 아니다. 즉, 야고보가 메시아의 형제를 사칭한 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구절의 가필의 사례로 미루어 "그리스도라고 불리우는"부분이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수는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기에 야고보는 '다른 예수'의 형제일 수도 있는 것이다.
★ 반론 : 유대고대사에 등장하는 예수라는 동명이인은 총 13명이다. 당시의 어법은 인물의 이름 앞에 그를 특정할 수 있는 지역이나 가족을 소개하는 방법을 많이 썼는데, 야고보를 소개할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이고 확실한 것은 유명인사인 예수의 이름으로 수식하는 것이었고, 동명이인의 예수 중 나사렛 예수를 수식하기 가장 보편적인 수식어는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그리스도라 불리우는'이란 표현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적혀진 것이다. 기독교인이 '그리스도' 부분을 가필했다면 아마 '그리스도 예수의 형제' 혹은 '그리스도의 형제'라고 적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리스도'라는 단어 자체가 고유명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구절이 예수의 신성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아 가필의 실익이 없으므로 가필의 가능성은 더욱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역대의 사이비교주들 중 신의 형제를 사칭한 예는 들어본 바가 없다. 대부분 신의 아들을 사칭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 역시 예수의 신격을 놓고 논쟁하던 교부들에게 인용할 가치가 없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