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부산 대연고 수능 만점자가 SNS에 올린 글입니다.
반대 받을 각오하고 씁니다.
전 이런 사람이 이해가 안갑니다.
입시 제도의 부당함을 제대로 느낀다는 사람이 어떻게 수능 만점을 받을 수 있죠?
전 고등학생 때 한국 교육에 대해 살갗이 벗겨질 만큼 혐오감을 느꼈습니다.
어떤 말로도 그 억압, 그 부조리, 그 부당함을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수능 만점을 받은 이 친구는,
제가 치를 떨며 분노할 때 어른들이 저한테 하던 말을 그대로 하고 있군요.
높은 사람이 되서 바꾸겠다네요.
높은 사람이 되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네요.
매년 스카이를 졸업하는 사람이 오천명씩 됩니다.
그 사람들 다 어디서 뭐 하는 겁니까?
그 오천명 중에 이 친구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을까요?
오천명 중에 한 오백명 정도는 잘못된 사회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런 이타심으로 공부해서 대학을 갔을 듯 싶은데
그 오백명은 지금 어디서 뭐 하는 겁니까?
매년 수능 때문에 애들이 몇명이 죽는데
수십만명의 인생에 목줄이 채워지는데
급한거 아니에요? 그 오백명들 지금 어디서 뭐 하는 겁니까?
어디서 뭐 하고 있길래 아직도 시스템이 바뀌지 않은 거냐고요.
권력을 가진 높은 사람이 되어야 사회의 부조리를 바꿀 수 있는겁니까?
이 공부 잘 하는 학생은
한국 사회의본질적인 모순을,
자기가 고쳐보려는 바로 그 모순을
그대로 내면화 해버렸네요.
노예제를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훌륭한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잘못된 체제를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그 체제의 모범이 되어야 하고요.
저도 많이 들은 말입니다.
아니에요.
잘못된 생각이에요.
그런 생각을 갖는다면 절대 그 모순을 해결할 수 없을 거예요.
예수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먼저 로마의 권력자가 되고자 했나요?
피를 묻히지 않은 손만이 아기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과거의 운동권들 다수가 왜 지금 와서 변절했는지
왜 사회 변혁에 실패했는지를 생각해봅시다.
사회란, 사회를 바라보는 주체들의 외부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들 자체입니다.
따라서 어떤 권력도 사회 변혁을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권력이야말로 그 사회와 완벽한 일부이기 때문에
권력자가 되어 사회를 바꾸겠다는 생각은
훌륭한 의사가 되어 자기가 자기를 수술하겠다는 발상과 같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이 친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국열차 보셨죠?
중요한 건 열차 앞으로 가는 게 아니잖아요.
열차 밖으로 나가는 것이죠.
사회 부조리와 모순을 조장하는 사람들은
이 친구처럼 사회를 바꾸겠다는 생각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고마울 겁니다.
이 친구는 알지 못하겠지만, 세상을 바꾸겠다는 그 열정이 바로 부조리를 유지하는 동력이 되거든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보다 열심히 공부해서
우리가 하지 못한 일을 해내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사소한 것부터 규칙을 깨는 법을 가르치는 거죠.
먼저 숨 쉬는 법부터.
그 다음 밥을 먹고
놀고 공부하는 방법에서 자유를 끌어오도록 하는 겁니다.
일상에서 혁명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어떤 권력자도 혁명을 이루지 못 할 겁니다.
시스템에 완벽히 적응한 자가 어떻게 자기 가죽을 벗겨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친구가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친구가 설령 나중에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그래서 갖가지 정책으로 교육에 대한 변화를 가져오려 한다 해도
사회는 크게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 정책이 바뀌잖아요.
하지만 큰 변화가 있던가요?
고작해야 자사고를 늘이거나 줄이거나
특정 과목의 비중을 늘이거나 줄이거나 이 정도죠.
정책이 바뀔 때마다 정부에서는 보다 진보적인 방식이라고 말하지만
본질적인 치료방법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단지 어떻게 하면 보다 효율적으로 스카이에 갈 학생들을 골라낼까에 다름없습니다.
피상적인 대책에 불과합니다.
미래의 대통령이 된 이 친구가 정책과 권력을 통해 사람들을 바꾸려 한다면
사람들이 바뀔까요?
좋은 정책을 만들어내면
'학생이 가야 할 곳은 대학 아니면 공장'
이라고 생각하는 학부모들의 사고방식이 바뀔 수 있을까요?
생각이란 게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닙니다.
정치적 투쟁이 그래서 어렵습니다.
그리고 모든 정치적 투쟁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궁극적인 목적의 달성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다양한 정책 따위로 승부하려다 결국 자신이 바꾸고자 하는 부조리 자체에 동화되어버립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공부 잘해서 높은 사람이 되어서 사회를 바꾸겠다는 생각을 바꾸십시오.
어떤 대통령과 황제도 사회를 바꿀 수 없습니다.
사회의 구성원들 하나하나가 모두 당신처럼 생각할 줄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분들은 비관론적인 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겠죠.
그렇지만 진정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은 바꿀 수 있는 뭔가가 아니라는 비관론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세상을 바꿀 생각 하지 마시고
공장에서 일 하시면서 하루 벌어 하루 드셔도 되니까
자기 자신의 생각부터 세상 바깥에 놓으십시오.
제 생각이야 어쨌건
열심히 노력한 이동헌 군 축하합니다.
사실 저도 이번에 수능을 봤거든요.
만점은 아니지만 괜찮은 점수입니다.
결국 저도 톱니바퀴의 하나였네요.
부탁입니다.
지금 여기서 바꾸지 않으면
세상 어디에서도 바꿀 수 없습니다.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바꾸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