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희 시인을 생각하며" 오래전이다. 프랑스 월드컵 예선 때, 아 우리는 동경대첩으로 더 잘 기억할 수 있는 그 때,.
그때 우즈베키스탄, 카자하스탄이라는 나라와 한 조였다는 사실을 아련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많겠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하스탄 현지에서 예선 경기라 열릴 때, 우리는 그들 나라에 사는 수 십만의 고려인이 있고, 그들이 그 때 경기장에 '고려인'으로는 제대로 응원할 수 없었던 사실은 모른다.
다민족 국가라 민족 간의 갈등을 가장 두려워하는 그 나라에서 자기 국민, 일부 민족이 특정 국가의 깃발을 들고 집단적으로 경기장에 오는 것을 두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려인'(까레이시키)이 태극기를 들고 경기 관람을 하는 것부터 아예 고려인의 경기 관람을 막고자 했던 그 때의 상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오늘, 아니 내일 새벽에 열릴 올림픽 8강전을 앞두고, 또 과거사 진상규명이 시대적 과제로 떠오른 지금, 중앙아시아에 사는 우리 민족이 우리 국가 대표팀의 경기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아니 어쩌면 내 고백일지도 모르겠다.
먼저 다음 소개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호 포석(抱石). 충북 진천(鎭川) 출생.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도요[東洋]대학 등에서 수학했다. 문학활동은 《김영일의 사(死)》(1921) 《파사(婆娑)》(1923) 등 현실과 인간성의 문제를 다룬 희곡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이어 《영혼의 한쪽 기행》 등 서정시를 쓰다가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가담, 1927년 대표작 《낙동강》을 발표하였다. 1928년 소련으로 망명, 니콜스크에 살면서 대작 《만주의 빨치산》을 썼다. 1937년 소련 헌병에게 끌려가 1938년 하바로프스크 감옥에서 총살된 것으로 전한다. 시집 《봄잔디 위에서》, 소설집 《땅 속으로》가 있다. (이상은 야후 검색 내용)
이 시인을 알고 계십니까?
이 시인이 바로 조명희라는 시인이다. 아, 이렇게 설명해 보자.
9~10년 전 SBS 모래시계라는 드라마를 방영할 때, 같은 시간에 MBC에서는 '까레이스키(맞나? 아마 맞을 것이다)'라는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까레이스키를 봐야 한다는 '당위'와 재미라는 '현실' 속에서 모래시계를 보면서 '까레이스키'에 대해 죄스러움을 갖곤 했다.
그 까레이스키라는 드라마에서 문성근 씨가 맡은 역할이 바로 조명희 시인이었다. 아 그 드라마에는 차인표도 나왔다. 어떤 역할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까레이스키'라는 드라마는 자유시 사변부터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독립군의 후손, 조선인(까레이스키는 고려인이라는 뜻이다)의 삶을 그린 대하 드라마였다.
모레시계 드라마를 보면서도 가끔은 봐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 가끔씩 봤던 그 드라마에서 조명희(문성근 역) 시인은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서 한 겨울 옷을 벗긴 채 야외에서 매달리는 고문을 당하면서 조국해방을 외친다.
그 때는 그저 그런 독립군의 한 모습, 이외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당시에는 누구나 그랬으니까'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몇 년년이 흘렀다. 아마 재작년이나 되었을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떤 프로에서 조명희 선생의 딸을 보게되었다.
아니 조명희 선생의 따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마 1920년대 출생하셨으니까, 지금은 고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 조명희 선생의 따님 이름이 ...... 바로 '선아'였습니다.
조명희 선생은 딸 이름을 부를 때, 반드시 성과 함께 불렀다고 한다.
'조선아~'
이렇게.
'조선아∼'.
사무치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자기 딸 이름을 부르면서 달랬던 시인..
그 시인이 조명희 시인이었다.
아 그 프로는 성공시대였나 보다.
미국에 사는 어떤 교포가 사업에 실패하고 좌절할 때, 중앙아시아를 방문해서 그 분을 뵈었다고 한다. 그 때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이랬단다.
"울 아바이가 내 이름을 선아라 지었지. 그래서 이렇게 부르는거야 '조선아~', '조선아~' 하구 말이지. 조국이 엄청나게 그립고 하면 내 이름을 부른거야. 그렇게 조국이 없을 때도 열심히 살았는데, 조국이 있는 지금 뭐가 어렵다고...." (대충 이런 기억이었는데, 거의 맞을 것이다. 그 때 받았던 충격은 여전히 내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으니까)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은 힘을 내었단다.
그런데 난 그 말을 듣고 그냥 울기만 했다.
정말 엄청나게 울었다.
아버님 돌아가실 때 울 것보다 아마 더 울지 않았나 싶다.
그 시인이 딸을 '조선아~'하고 부르면서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그렇게 달랬던 것만 슬펐던 것은 아니다. 그건 아주 사소한 슬픔이었다.
문제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조국이 해방되었지만, 그 할머니는 조국을 방문하지 못했다. 최소한 그때까지는.
그리고 그 시인과 그 따님의 이야기도 우리는 몰랐다. 최소한 그때까지는.
그리고 그로부터 50여년이 흘러 프랑스 월드컵 예선을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하스탄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이 방문했을 때도 못난 조국은 그들이 태극기를 들고 경기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지 못했다.
다민족 국가에서 특정 민족이 외국 깃발을 흔들고 경기장에 참석할 수 없다는 해당 국가의 방침을 그저 지켜만 보고 말았다.
충분히 이해한다. 다민족 구성원을 갖고 있는 그 나라의 고민과 외교적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의 한계 등등을.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조국은 그들에게 무엇을 했는지....... 부끄럽고, 서럽고.... 지금도 그분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얼마전까지도 우리 문학사에는 조명희라는 사람이 없었다.
조국 해방을 위해 싸우다, 쫒겨가다 그 오지에서, 고문 속에서 조국 해방을 외치다 죽은 시인을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이게 그가 그토록 그리워 한 조국이었다.
그래서 이 글이 고백일 수밖에 없다.
조명희 시인,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조국에서 편하게 살고 있는 나는 그때서야 새삼 부끄러운 우리 역사와 현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을 위해 난 아무런 한 일이 없다는 것을....
일제 강점기에 조국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딸의 이름을 부르면서 달래보고자 했던 한 시인의 아픔을 생각하며, 그리고 여전히 그 어린 딸이 할머니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저 슬퍼만할 뿐, 일제 강점기에 부역한 자들을 여전히 어쩌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이 해방된 조국의 지도자 된 현실을 생각하며 과거사 진상규명을 생각한다.
그토록 시인이 그리워했던 '조국'을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