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쓰다보니 계속 이런 내용을 쓰게 되는데..
전 범죄심리학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오징어입니다.
10. George Hennard
1991년 10월 16일, George Hennard는 Texas, Bell County에 있는 Luby's Cafeteira에 자신의 픽업 트럭을 몰고 돌진해
창을 뚫고 들어갑니다.
후에 이 사건은 Luby의 대학살 이라고 알려집니다.
차에서 기어나온 그는 "이것이 Bell County가 나에게 한 짓들에 대한 결과다!!"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사고를 낸 자신을 도우려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차례의 살인이 끝난 후, 식당안의 모든 사람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위협하며, Glock 권총으로 여성들부터 쏘아대기 시작했습니다.
살인이 일어나는동안, 식당안의 사람들은 테이블 아래 숨는것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감히 출입구를 향해 뛴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심지어 Hennard가 재장전을 하고 있는중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남자가 자신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Hennard에게 태클을 시도 했지만, 그의 권총에 의해 간단히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지옥같은 상황은 경찰이 도착하기 까지 10여분간 계속되었습니다.
Hennard는 결국 화장실에 몰려 총을 네번 쏜뒤에 경찰에 의해 제압되어 광기넘치는 살인극이 종료되었습니다.
9. Baruch Goldstein
Baruch Goldstein은 1994년, Patriarchs동굴의 대학살을 저지른 미국태생의 이스라엘인 입니다.
그는 militant Jewish Defense League의 일원이었으며, 학살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아랍인들을 크게 차별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Defense force의 내과의사로 일하고 있었으며, 아랍인들의 치료를 거부했었습니다.
절친한 친구였던 랍비 Kahane가 아랍의 과격주의자들에게 살해당한 후, 그는 복수를 결심하게 됩니다.
1994년 2월 25일, 그는 800명의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이 기도하고 있는 Patriarchs동굴에 들어갑니다.
그는 군복을 입고 경비원인척을 했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Goldstein은 전략적으로 유일한 출구를 막고섰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상당시간을 대기하고 있다가 Galil 돌격 소총으로 군중을 향해 쏘기 시작했습니다.
이 짧은 순간에, 29명이 숨지고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쳤습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을 해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이 학살은 군중속의 누군가가 몰래 Goldstein의 뒷통수를 소화기로 가격하면서 끝이 났습니다.
의식이 없는중에 그는 생존자중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등록되어 있습니다.
8. Toi Mutsuo
사망 : 30명
부상 : 3명
1938년 5월, 21세의 Toi Mutsuo는 당시 불치병이었던 결핵을 앓으며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일본의 Okayama현의 외곽 Kaio라는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Mutsuo는 어릴때 부모님을 여의었으며, 할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그는 마을안의 짝사랑하던 여성이 결핵을 이유로 자신을 거부하자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학살을 하기전에, 자신의 동기는 거절받았기 때문이라고 유서를 남겼습니다.
1938년 5월 21일, 그는 이른 새벽에 도끼로 그의 할머니의 목을 잘라 살해합니다.
그는 영악하게도 전기를 끊어 버린후 머리에 횃불 두개를 묶은 뒤 한집 한집 차례대로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도끼와 카타나(검의 일종)도 사용하였지만, 살인의 대부분은 샷건을 통해 하였습니다.
태양이 뜨기도 전에 그는 산탄총을 자신의 가슴에 쏘아 자살하지만, 그때는 이미 30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한 뒤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사건은 한 개인이 저지른 가장 최악의 사건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7. Campo Elias Delgado
사망 : 30명
부상 : 15명
Campo Elias Delgado는 콜롬비아에 있는 Pozzetto라는 고급식당에서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영어교사이자, 베트남 참전 용사였습니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처참한 체험을 한뒤, 사회에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는것은 외로움 뿐이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문제를 그의 어머니에게 돌려 비난했으며, 점점 증오심을 키워갑니다.
그는 결국 1986년 12월 4일, 그가 가르치던 학생중 한명을 따라가 집으로 쫒아간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를
사냥용 칼로 살해합니다.
그후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와 어머니의 목을 찔러 살해했습니다.
Delgado는 종이로 어머니의 시신을 감싼뒤 불을 질렀습니다.
화재경보 소리가 울리자, 다른 주민들은 Delgado가 기다리고 있던 비상구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는 먼저 한 남성을 찔러 죽인뒤, 32구경 Revolver권총으로 다섯명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가방안에 5줄의 총알을 채워넣은 뒤 Pozzetto식당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식당에 도착한뒤, 비싼 음식들을 시켜서 먹은뒤에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고있던 여성의 얼굴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이후 10분뒤 경찰이 출동할때까지 잔인하게 학살을 하였습니다.
6. 조승희
사망 : 32명
부상 : 17명
조승희는 2007년 버지니아 공대 학살로 32명의 학생및 교수를 살해한 악명높은 범죄자입니다.
그는 두명의 여학생을 스토킹한뒤 처벌을 받고, 급격하게 정신적 불안을 겪었습니다.
조승희는 근처의 사격장에서 자신의 사격기술을 갈고 닦으며 꼼꼼하게 공격을 계획했습니다.
그는 또한 비디오 카메라에 학살에 대한것과 자신의 분노에 대한 표출을 녹화하였습니다.
또한 Eric Harris 과 Dylan Klebold에게 감탄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역주 : Eric Harris 과 Dylan Klebold는 다른 대학살의 범인들입니다.)
그는 이 영상을 인터넷에 업로드 했지만,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무의미한 미친소리일 뿐이었습니다.
조승희는 2007년 4월 6일, Walther반자동 권총을 사용하여 두명의 룸메이트를 살해하며 대학살을 시작했습니다.
둘을 살해한뒤 그는 권총을 재장전하며 NBC뉴스에 자신이 찍은 영상을 보냅니다.
두번째 학살은 매우 신중하게 계획되었습니다.
피해자들이 탈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Norris Hall의 유일한 출구를 차단했습니다.
그리고 억지로 열려고 시도한다면 폭탄이 터질것이라는 메모를 앞에 붙여놓습니다.
그리고나서 조승희는 강의실을 돌아다니며 사람을 발견하는 족족 총을 쏘았습니다.
그는 한사람이라도 더 죽이기 위해 노력했으며, 때때론 한사람당 두발씩 쏴서 확실하게 죽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강의실의 학생들이 어떻게든 출입을 막기위해 바리케이트를 쌓아올렸고, 조승희는 강의실 안으로
무차별 사격을 감행했습니다.
9분뒤에, 경찰이 출입구를 뚫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자신의 얼굴을 쏴 자살하였습니다.
(Ahmed Ibragimov이 살해당한 뒤 발견된 사진 입니다.)
5. Ahmed Ibragimov
사망 : 34명
부상 : 약 20명
Ahmed Ibragimov는 1999년 34명의 러시아 시만을 학살한 버스 운전기사입니다.
그의 학살의 동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인터넷에서 몇몇의 추측이 나올 뿐입니다.
10월 8일, 그는 학살을 감행합니다.
전직 집배원이었던 그는 그곳의 지리와 각 주소및 연락처를 상세히 알고 있었으며,
피해자들을 속여 밖으로 호출한뒤 소총으로 사격을 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10살 이었던 어린이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학살 후에 그는 이틀간 도망다니다가 피해자들의 가족들에게 잡혀서 살해당합니다.
4. Martin Bryant
사망 : 35명
부상 : 21명
이웃들의 증언들에 따르면 Martin Bryant는 남들에게 피해를 줄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지역아이들에게 종종 비싼 선물을 주었고,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부모에게 500만불 상당의 상속을 받았으며, 일을 하지 않았고 늘 외로워했습니다.
또한 사람을 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일때가 있어 정신병원에서 상담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결국 치명적일정도로 외로움이 극에 달했고, 결국 Port Arthur의 대학살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1996년 4월 28일, Bryant는 Port Arthur 까페에 커다란 검정가방을 들고 간 뒤, 음식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날씨가 덥고 벌들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곤 가방에서 AR-15 소통을 꺼냈습니다.
까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고, 테이블 간격도 매우 좁았습니다.
단 15초 만에, Bryant는 13발의 총탄을 발사해 12명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나서 도망간 사람들을 쫒아 주차장으로 간뒤 8명을 다시 살해했습니다.
그 근처는 공원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그들이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채기도 전에, Bryant는 더 많은 살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Bryant는 버스를 납치해 세명을 살해한뒤 도주를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바다로 향한뒤, 경찰과 18시간을 대치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자신의 옷에 불을 지르고 경찰에 항복하였습니다.
Bryant는 학살에 대해 가석방없이 징역 1000년을 선고 받았으며 현재 오스트리아의 wing of Risdon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최근 경찰 훈련 영상을 통해 그당시의 녹화화면이 공개되었습니다.
3. William Unek
사망 : 57명
부상 : 30명
William Unek의 경우 다른 대량살인마와 달리 특별한 면이 있습니다.
바로 3년에 걸쳐 두번의 대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수의 피해자 수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관심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합니다.
알려진것은, 1954년 그가 Congo에서 경찰일을 하며 학살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기간동안 잔인한 일들을 행하였으며 최소한 도끼로 21명을 살해했습니다.
동기에 대해서는 알려진바가 없습니다.
그리곤 신원을 정리하고 Tanganyika로 이동합니다.
Unek이 다시 대학살을 저지른 것은 1957년 2월 11일 이었습니다.
훔친 총을 가지고 지역 마을에 들어간 그는, 집들에 불을 질렀습니다.
생존자들이 밖으로 나오자, 그는 도끼로 사람들을 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여성만을 손으로 목졸라 죽였습니다.
이 학살들은 자그마치 36마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경찰은 경찰견과 헬기를 동원해 그를 추적하였고, 결국 잡아내었습니다.
2. 우범곤
사망 : 57명
부상 : 37명
우범곤은 대한민국의 역사에 남을 대량살인범입니다.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에 따르면, 학살전에 우범곤은 심한 우울증과 열등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1982년에 그는 경상남도에서 경찰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분노에 눈이 멀었던것이 그의 동기가 되었으며, 애인과 싸운것이 분노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는 취해서는 그녀를 폭행하고, 집을 부쉈습니다.
그리고는 경찰서로 가서 몰래 두 정의 소총과 수백개의 탄약, 일곱개의 수류탄을 남몰래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는 밤 9시 30분쯤에 풀숲에 숨어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M1 Carbine소총으로 쏘기 시작했습니다.
유일하게 이 상황을 예측할 수 있었던 그의 여자친구는 허벅지에 총을 맞은 상태였기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우범곤은 곧이어 우체국으로 향해 그곳에 있던 세명을 죽인뒤, 비상연락을 끊기위해 전화선을 모두 절단합니다.
그는 무작위로 집들을 돌며 자신이 경찰이라는 점을 이용해 주민들의 집으로 들어간뒤, 소총으로 모두를
살해했습니다.
이런식으로, 우범곤은 총 5개마을의 42명을 살해했습니다.
그는 다른 대량살인마와는 틀린 경향을 보였는데, 예를 들어보면 그는 어떤 집에 들어가 무기를 꺼낸뒤
가족모두를 인질로 잡고 그 집의 10대 소년에게 근처 가게로 가서 마실것을 사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리고 소년이 음료를 사와 우범곤에게 넘기자, 그는 일가족 모두를 살해했습니다.
또한 집에 들어가기가 여의치 않을때는, 수류탄을 사용해 집안의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이 끔찍한 학살은 8시간동안 지속되었고 그가 두개의 수류탄으로 네명의 마지막 피해자와 자폭을 한뒤
비로소 그쳤습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수많은 경찰이 사임했으며 언론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1. Anders Behring Breivik
사망 : 77명
부상 : 96명
Anders Behring Breivik은 가장 최근이자, 최악의 대량학살을 한 대량살인범입니다.
그는 노르웨이의 Utoya섬에서 14살에서 19살 사이의 청소년들을 69명이나 살해했으며,
극단적인 우익(과격파)이었습니다.
2011년 7월 22일에, 총격이 시작되기전 Oslo에서 대규모의 차량 폭파사건이 일어나 8명이 사망합니다.
그 틈을 타서, 그는 여름 캠프를 위해 Utoya섬으로 향하던 600명의 청소년이 타고 있던 배에 승선합니다.
Brievik은 경찰복을 입고 있었으며, 또한 위조된 경창 ID를 사용하여 별일없이 보안을 통과했습니다.
그는 승선뒤에 자신은 경찰관이며 Oslo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때문에 점검을 위해 왔다고 모두를 속였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불러 모은뒤, 서서 발표를 하다가 머릿수를 세어보고는 돌연 소총을 꺼내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였습니다.
생존자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첫번째 난사 뒤의 아비규환속에서 자신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아이들을 보며
웃고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기위해 죽은 척을 했지만, Breivik은 쓰러진 사람들을 향해 두번째 난사를 했습니다.
한편 살기위해 바다로 무작정 뛰어든 청소년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후에 구조대가 도착했을땐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모두 익사한 상태였습니다.
Breivik은 물에 뛰어내린 사람들 대부분이 부상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물에 빠진 사람들에게도 총을 난사했습니다.
일부 청소년들은 지하에 숨어 휴대폰의 문자를 통해 급박한 상황을 알렸습니다.
90분의 대학살이 끝나고, 경찰이 도착하자 Breivik은 별다른 저항없이 순순히 체포되었습니다.
이 대규모의 학살은 적어도 2009년 이전부터 계획되어온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그는 일기를 통해 계획을 작성해서 테러리스트로 보이는 단체와 정보를 공유한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일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공격을 통해 노르웨이 정부에 대해 반란을 시도한 것이 목적이라고 쓰여있습니다.
또한 2009년 프라하에서 총기 구입에 실패한것, 폭탄을 실험하기 위해 Breivik Geofarm이라는 농업회사를 설럽한 일등이
쓰여있습니다.
Breivik은 정신과 의사들의 진찰결과 완전히 제정신인것으로 판단되었으며, 단지 엄청난 자기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진단하였습니다.
그는 아직 정확한 형량을 선고받지 않았습니다.
다만, 확실한건 그가 남은 인생동안 눈앞의 철장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일겁니다.
##지난편은 여러분들의 따뜻한 관심으로 베오베에 갈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번편은 대한민국사람이 2명이나 있다는 것이 충격적이네요.
##그럼 다음에 다른 주제로 찾아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