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대한민국은 ‘스펙 공화국’이다. 학력이나 경력처럼 특정인의 조건을 통칭하는 말인 ‘스펙’에 모두가 감염됐다. 10대는 진학, 20대는 취업, 30~40대는 결혼과 승진, 더 높은 연령대는 은퇴 이후 준비에 몰두한다. 스펙을 강요하는 분위기 탓에 자신을 살피고, 인생을 아름답게 가꿔가는 일은 아무래도 뒷전이다.
■ 휘달리는 ‘초딩’ 앗, 아침 7시. 엄마가 나를 막 흔들어 깨워요. 저는 서울 강서구 한 초등학교의 5학년생 강샛별(11)입니다. 일어나선 바로 학습지 숙제를 해요. 오후엔 시간이 없거든요. 오후 2시에 학교 수업이 끝나면 피아노 배우러 고고씽. 끝나기 무섭게 토익 공부하러 영어학원에 가요. 영어는 국제중 입시에 필수 스펙이거든요. 끝나면 수학 배우러 헉헉…. 오후 5시, 집에 가니 학습지 선생님이 와 계세요. 한자 공부하는데 엄마가 컴퓨터 책까지 놓고 가네요. 곧 방학하면 친구들은 캐나다로 영어캠프 간대요. 저는 뭐 하죠? 아~ 놀고 싶다. 그런데 결국 학원에 가게 돼요. 거기 가야 친구들을 만나니까요.
■ 숨가쁜 ‘고딩’ ‘초딩’! 엄살 부리기는. 너도 나처럼 ‘중딩’ 때는 종합반 학원, ‘고딩’ 때는 국영수 단과반을 거칠 거야. 참, 저는 경기도 안양에 사는 고3 김유나(가명)예요. 어제 수능 점수 나왔는데…. 정시는 어렵겠고, 수시 2차를 알아보고 있어요. 그런데 논술 시험 안 치는 학교를 봤더니 적성검사 시험이 있네요. 친구들은 요즘 토플에 텝스, 봉사활동, 미국 대학 수능인 에스에이티(SAT)에다 대학 선이수제도(AP)까지 따요. 바둑학과에 가려면 인터넷게임 넷마블의 바둑 2만판을 하는 것도 스펙이 된다네요. 뭐든지 남들이 안 하는 것을 찾아야 해요.
■ 화려한 ‘이태백’ 그래봤댔자 졸업하면 ‘이태백’이야. 내년이면 스물아홉인데 아직 직장 찾고 있어. 이름은 생략할게. 그렇다고 무시하지는 마. 나도 스펙은 빵빵해. 서울의 괜찮다는 대학에서 베트남어를 전공했어. 부전공은 신문방송학. 학과 회장도 했지. 토익 860점에 학점은 3.47. 베트남 연수도 1년 갔다 왔어. 2006년 졸업 뒤 게임 회사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하다 재고용이 안 돼 1년 정도 방송사에서 통·번역을 했어. 코트라에서 주관하는 해외 인턴십도 다녀왔지. 경영학과는 안 나왔지만 마케팅, 광고 이런 일은 자신 있어. 근데 이 몹쓸 대기업들은 서류만 보고 제쳐버린단 말야. 더 말해서 뭐하겠니?
■ ‘루저’ 신드롬 ‘직딩’ 그렇게 열심히 하면 뭐합니까? 연봉 4500만원이 안 되는데. 얼마 전 어느 결혼정보업체 조사를 보니, 우리나라 미혼 여성이 원하는 배우자 연봉이 4579만원이랍디다. 난 올해 스물아홉의 대기업 계열사 연구원인데, 4579만원, 그거 우리 과장님 연봉입디다. 과장 되기 전엔 결혼도 하지 말란 말입니까. 요즘은 결혼도 스펙 시대예요. 더구나 전 키 180㎝가 안 되는 ‘루저’라고요. 외모도 중요하다고 해서 요즘 피부과에 다녀요. 내년엔 변리사 시험 준비하려고요. 결혼해서 자식들 대학 보낼 때까지 회사에서 버틸 자신이 없어요.
■ 아직 배고픈 ‘사오정’ 여보게, 청년들. 자네들 힘든 거 알지만 그래도 젊을 때 열심히 해야 돼. 이제 마흔인 나는 명함이 3개야. 서울 ‘스카이’ 대학 나와 외국계 회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하다 그만두고 경영학을 공부했어. 내가 어문계열 나왔거든. 민간 연구소에서 회계학, 무역 관련 수업을 들었어. 그러곤 보험회사로 옮겨 재무설계사로 활동하고 있어. 친구의 헤드헌팅 회사에서도 일했지. 대학에서 강의 의뢰도 들어와. 어때? 재무설계사에 헤드헌터, 취업 컨설팅 강사. 그래도 멀었어. 최종 스펙에 시이오(CEO·최고경영자)를 추가하려고. 이보게들, 세상은 만만치 않아. 난 5년 안에 평생 쓸 돈을 벌어서 여생은 느긋하게 살 거야. 그게 직장인의 로망 아니겠어?
스펙
원래 ‘제품 설명서’라는 뜻을 지닌 영어 단어 ‘스페시피케이션’(specification)에서 따온 말이다. 진학 또는 취업 예비생들의 학력·학점·토익 점수·교내외 활동 및 경력사항 등을 합한 것을 가리킨다.
http://news.nate.com/view/20091222n026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