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식은 비가 무겁게 대지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비는 마치 날카로운 창날, 모래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하나의 작은 강을 흐르게 했다. 그 사이사이로 기어가는 작은 생물들, 개미, 사마귀, 무당벌레, 진드기. 한낱 이슬에도 무참히 짓이겨지는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실낱같은 길을 찾아 해메였다.
열심히 그 비를 맞아가며 자신만의 길을 찾아다니던 작은 생물중 몇몇이 문득, 뒤를 돌아보면 그곳엔 높다랗게 솟은 탑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갑고, 냉혹하고, 냉정하게. 올려다본 탑은 그리도 아름다웠고 바라보던 그 짧은 찰나에
생물들은 빗물에 쓸려내려갔다.
쓸려내려간 그 순간, 그들은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들의 모습에 시선이 닿은 누군가가 있었다. 물론 그 누군가도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그 작디 작은 자들의 수몰(水沒)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무엇을 보십니까, 성주 전하.”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체인질링 공주는 뾰루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눈은 창에서 때지 않은 채로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을 보고 있어요.”
그 농담일 것이 뻔한 공주의 말에 로덴부레트는 웃지도 않은 채 응수했다.
“승전하고 계십니까?”
“네, 가증스런 이퀘스트리아 군을 물리치고 이제 막 회군하시는 것 같아요. 아, 펠롭스 오라버니는 이번에도 칼을 잃어버리셔서 아바마마께 혼쭐이 나는 것 같아요. 사티로스 오라버니는 어째서인지 불만스러우신 표정이세요. 그렇구나, 휴브리스 오라버니와 말다툼을 하신 것 같아요. 그래도, 어쩐지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네요.”
“다행입니다. 모두 다 무사하신가 보군요.”
“네에, 출병하신 모두가 멀쩡한 모습이에요. 모두가......”
그 말을 마치고, 공주는 뒤를 돌아보았다. 로덴부레트의 차가운 얼굴이 그 눈길을 마중했다.
“농담은 관둘게요. 출정군에서 승전하고 있다는 소식만이 온지 벌써 2년 가까이 됐어요. 하지만 그것 뿐, 그 외의 어떤 소식도 알려지지 않았죠. ...... 대답해주세요, 저에게 숨기시는게 있으신가요, 로덴부레트 집사장.”
로덴부레트는 차가운 눈빛으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열 밤 만 자면 돌아오겠다는 부친의 허울 좋은 거짓말을 믿은 어린아이는 이미 죽고 공주는, 섬세하진 못하지만 결코 무디진 않은 마음을 가진 소녀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훌륭한 성장이라고 할만한 것인가. 로덴부레트는 뭔가 잃어버린 기분에 씁쓸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렇게 성장한 성주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도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아니오, 어떠한 것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성주 전하.”
“거짓말이군요.”
“사실입니다.”
“... 관둘래요. 어차피 패전했다는 얘기는 오지 않으니 승전했다는 말로 멋대로 생각해 버릴 거예요.”
공주는 빙글 돌아보이고는 조용히 선언했고 그에 로덴부레트는 웃음을 지었다. 묘한 부분에서 닮은 부녀였다. 체인질링의 왕 또한 생각하기 싫은 것이 있으면 멋대로 정해버리고 마는 습관이 있었다.
과연 딸과 아비란 말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공주에게 말하진 않았다. 이건, 그래. 왕이 돌아오면 이걸 가지고 놀려나볼까.
그리고 다시 기분이 씁쓸해진다.
왕은, 공주를...
“네, 옳으신 생각이십니다. 성주 전하.”
“근데요, 집사장.”
“네?”
“아바마마랑은 친하셨나봐요? 솔직히 아바마마께서 함부로 누구에게 홀을 넘기실 분은 아니시잖아요?”
“......네. 아주 친한 친구였었습니다.”
공주는 그가 더 말하기를 기다렸지만 로덴부레트는 자기가 말할수 있는건 거기까지라는 듯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물론, 그렇다고 쉬이 물러설 공주는 아니었지만.
“그럼요, 그럼요. 있잖아요? 옛날의 아바마마는 어떤 분이셨어요?”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공주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 질문을 듣자마자 생각나는 단어는 하늘의 별만큼 많았고 그 수없는 것들 중에 하나를 꼽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입은 단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망할 녀석, 썩을 놈, 귀찮은 자식, 선량한, 착하지마는 않은, 훌륭한, 옳지만은 않은, 적에겐 날카로운, 아군에게도 자비롭지마는 않은, 자신의 길만을 걸어가는, 독선적이라기엔 무언가 부족한, 수많은 수식어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휘저었고 순식간에 로덴부레트는 사고를 정지했다.
“왕,”
공주는 순간 집사장이 개 흉내를 내는가 의심했고 순식간에 그 의심을 접었다.
“네?”
“왕 같은 분이셨습니다.”
“왕, 이요?”
“네. 다른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어렸을 때도 왕같은 분이셨습니다.”
“왕이라니, 잘... 모르겠는걸요?”
“네. 저도 잘 모르겠군요.”
공주는 더 말하고 싶은 듯이 입을 열었지만 로덴부레트는 순식간에 그 말을 가로막았다.
“그럼 공주님, 밤은 찹니다. 방으로 들어가셔서 주무실 시간이군요.”
“...... 네.”
공주는 아쉬운 듯 창에서 눈을 땠다. 아직 창밖에선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착한 공주라면, 잠자리에 들 시간이겠지. 아무런 걱정없이, 침대속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며 꿈나라에서의 달콤하지만 순식간에 녹아버릴 단잠을 잘 시간이지.
어느 누구도 이름을 기억 못하는 병사들이 서글픈 죽음을 맞이해도, 누군가는 단잠을 잘 시간이겠지.
그럴, 시간이겠지.
공주는 꿈나라에 들고, 집사장은 성을 소등했다. 일상이었다.
휴브리스는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는 사실에 나름의 감격마저 느낀다. 창가에서 비쳐오는 햇살은 따뜻했고 속살거리는 새들의 울음소리는 대강당의 파이프오르간보다도 더욱 아름답게 들려왔다. 비록 체인질링 왕국의 모든 건물들 중 유일하게 지상으로 높이 솟았기에 여러 가신들과 국민들에게 안전성의 의심을 받는 체인질링 왕국의 궁성, 보웬세나였지만 휴브리스는 그러한 자신의 궁성을 사랑했다.
아마도 그가 체인질링의 사회에서 좋아하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분명 그 안전성은 크게 위협받을 수도 있지만 낭만적이라고 부르는, 하지만 많이들 ‘유치하다’라고 부르길 선호하는 성격 때문에 그는 높은 성, 보웬세나를 좋아했다.
물론 역대 선왕들과 현왕이 낭만에 젖은 데다 유치해서 아직까지 보웬세나를 철거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고성(古城)은 약간은 역사적이고 다분히 보수적인 이유 때문에 아직 그 존재를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안전에 많은 문제가 제기되어 수도 내에-보웬세나는 땅 밑의 수도를 뚫고나온 형상이다- 미리 새 왕궁을 신설하기도 했지만 역시 아직도 왕과 그 비속들은 보웬세나에서 살고 있었다.
오백년이 넘어가는 역사상 단 한번도 함락되지 않은 고성이라지만 역시 대신들도 걱정은 되었나본지 전쟁 사이에 첨탑에 미리 감시탑같은 흉한 것을 달아버린 모양이었다. 그 덕에 아름다운 보웬세나의 미관이 약간 상해버린 모양이지만, 또 그것도 그것 나름 운치있지 않느냐는 휴브리스의 시각이었다.
그 치고는 참으로 느긋한 대응이었지만 그것도 그럴 것이 3년간의 지긋지긋했던 전쟁이 끝나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즐긴 잠인 것이다. 조금은 느긋하고, 조금은 부드러울 수도 있지 않을까. 휴브리스는 그리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3년만의 휴식인 것이다.
저 지독하고 참혹한 전장에서 빠져나와 진정으로 맞이하는 첫 휴식인 것이다. 휴브리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매끈한 실크이불이 스륵, 바닥으로 흘러 떨어졌고 휴브리스는 그에 약간의 기쁨마저 느꼈다.
이리도 달콤한 휴식, 전장에서 슬피 울려퍼지던 참혹한 비명과는 동떨어진 아늑하고도 행복한 세계. 자신은 이를 바라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행복을 즐기던 사이, 갑자기 문 밖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난 듯, 소음이 울려퍼졌다.
“오빠, 오빠, 오빠!”
목소리만 들어도 아는 자신의 하나뿐인 여동생, 크리살리스의 목소리. 그 반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휴브리스는 미소를 지었다. 문이 시끄러이 열리고 들어선 자신의 여동생의 모습은 자신의 기억과 전혀 변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오빠, 오빠! 어떻게 돌아오자마자 잠들어버릴 수가 있어! 돌아오자마자 나한테 왔어야지!”
말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얼굴은 자신이 돌아와 좋아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휴브리스 또한 피식 웃어버렸다.
“미안, 크리살리스. 오빠가 좀 힘들어서,”
“웃으면서 도망칠 생각하지 마! 이번에는 꼭 잡고야 말테니까!”
심술궂다고도 할 수 있을법한 표정이었지만 휴브리스에겐 마냥 사랑스러운 동생이었기에 그저 웃음이 비저 나왔다. 웃음이, 계속해 흐른다.
그리곤 순식간에 휴브리스는 얼굴을 굳혔다.
“날 기만하려 들지 마라, 이 미몽(迷夢)아.”
“무, 무슨 소리야 오빠?”
“3년이나 지났지. 어떻게 모습이 하나도 안변할 수가 있겠어, 그치. 크리살리스?”
“응? 뭐가?”
“아니, 널 보고 말한 게 아니야.”
어느새 휴브리스는 완전군장을 갖춘 장군의 모습이었고 대도한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크리살리스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단 표정이다.
“무, 무슨.”
“...... 귀여운 여동생이 성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떻게 잠이나 잘 수 있겠어?”
뽑아든 검은 어느새 깊숙이 크리살리스의 배를 파고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칼이 꽂힌 자리를 중심으로 온 세계가 비명을 내지르며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굳이 그 비명의 주인을 궁금해 하진 않았다.
자신일 것이 뻔하니.
휴브리스는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반기는 피냄새에 휴브리스는 눈을 찌푸렸다. 익숙해질래야 질 수 없는, 너무나도 역한 냄새다.
“그것보다... 시끄럽군.”
너무나도 시끄러웠다. 보통 어지간하면 이렇게 시끄러워질 리가 없는 체인질링 군인데, 휴브리스는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자신이 신임하는 부하에 의해 증명되었다.
“휴브리스 왕자님, 이퀘스트리아 군의 공습입니다!”
휴브리스는 비록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지만 그것이 공습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안일한 행복에 젖어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이퀘스트리아의 입장에서 봤을 때도 믿기지 않을 만큼 멍청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분명 체인질링 군이 안일한 나태에 빠져있음은 물론이었지만 그것이 결코 단순한 나태는 아니었다. 확신이 있었기에 나태에 빠져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미치지 않은 이상, 이런 확실한 우열의 차가 나는 상황에서 급습을 하리라, 누가 생각할 수 있었을까.
상대의 결점을 노리는 것이 최고의 전술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자살 행위에 불과하다. 드디어, 이퀘스트리아의 수뇌부가 전쟁을 포기하기라도 한 것인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만, 이퀘스트리아의 행위가 이해되진 않았기에 휴브리스는 생각을 포기했다. 어찌되었든, 공습은 사실이었으니까.
“전군에게 변신명령을 하달하라. 이는 장군으로서 내리는 명령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휴브리스는 부하를 보내고 순식간에 군장을 갖추었다.
밤새 내린 비 덕에 차갑게 식은 공기는 군장마저 식혀놓았고 그에 움직일 때마다 시린 기운이 스며들었다. 하늘은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어두웠고 새파란 달빛과 얕은 별빛들이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팬시. 쉽게는 당하지 않을 것이다.”
휴브리스는 칼을 뽑았고, 동시에 진군의 나팔이 울렸다.
해 조차 뜨지 않은 이 어두운 여름 밤, 병사들은 죽음을 향해 날개를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