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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 글에 댓글을 달다가
엄청 길어진 것을 확인하고, 새롭게 글을 씁니다.
이 글의 주제는 능동성/피동성 입니다.
밑 글이
애매모호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좀 더 제 의도를 명확히 보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 만남의 횟수는 1번이지만,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데는 제한이 없다.
두번째 - 만남의 횟수만큼, 상대가 요구한만큼만 생각을 해야 한다.
기준은 상대가 요구한만큼만 상상해야되느냐?
아니면
자유롭게 내가 생각하고 싶은대로 생각해도 되느냐?
이겁니다.
둘 중 친하다는 것은 어떤 경우를 말하는가? 이렇게 질문했는데,
애매모호하고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죠. 둘 중 하나를 택해야될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둘 다 친할 수 있죠.
그래서
좀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1. '각각의 경우와 관련해서 '친하다'라고 판단되는 순간은 어느 순간부터 인가?
2. "어떤 것이 더 편한가?
3. "어떤 것이 사람을 편하게 생각하는데 기여하는가?"
일단 각각의 특징이 있겠으나
편의상 하나를 선택하고 얘기하면서 전개 하겠습니다.
혹시 저 3개의 질문에, 후자 부분을 제가 다 답변하지 않더라도, 능동적으로 저 항목을 비교해보십시오.
전자의 경우
1. 만나고 이후, 의식하는 순간부터, 그 의식이 어떻게 되었냐에 따라 알아서 결정하면 됩니다. 내가 친한 쪽으로 의식하면 친한 쪽으로 가는 것이죠.
2. 이 경우가 더 편합니다. 후자와 비교하면 후자는 마치 퀘스트에 따라 판단하는 느낌입니다.
3. 역시 이 경우가 더 편하게 생각하게 되는데 기여합니다.
이게 사람을 만날 때 마인드의 문제가 좀 있는데, 내가 낯선 사람을 만날 때 불편해지는 이유 중 하나가, 내 스스로 그를 낯설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내 머리속에서는 그가 '신원정보미확인' 상태로 의식되고 있다는 얘기죠. 그래서 낯선 겁니다.
근데 잘 생각해보면, 그도 이 시간까지 살아왔다면 살아왔던 역사가 있을 것인데, 분명 쪽팔린 일도 있었을 것이고, 나름의 사건도 있었을 인간일 것인데, 내가 이를 유추하지 못할 일은 없죠.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나를 낯설게 볼 수는 있어도, 이것이 없다고 판단할 이유는 없는 겁니다.
정말 어릴 때부터 늑대들에게서 둘러쌓여 자라서, 사회적 경험이 없다 이러면 예외가 될 수 있어도,
사회내에서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자랐다면, 보편적으로 겪을 경험들은 대부분 한정되어있습니다. 유형으로 정해져있다는 얘기죠.
사랑.
싸움.
수치.
이런 것들은 겪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이를 자발적으로 떠올린다면, 그의 정보가 채워집니다. (내가 스스로 채우는 겁니다. 신기한 것이죠.)
이는 그의 의사를 듣지 않고, 내가 능동적으로 부여하는 겁니다. 그가 볼 때에는 불쾌할 수 있으나, 팩트를 따지면 이게 일반적인 수준에서는 없을리가 없습니다. 사랑과 싸움과 수치에 대해서없다면 그 사람은 감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죠.
쿤데라 소설에서 <욕망의 황금사자>라는 단편이 있는데, 제목이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카사노바에 해당하는 인물이 재밌는 태도를 보입니다.
잘 모르는 여자의 이름을 억지로라도 찾아내서, 없으면 만들어내서 붙입니다.
주인공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묻죠.
그가 대답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이렇게 해야 마음이 든든해지거든" (대략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것은 분류하고 명명할 때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의식 상태 같은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걸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것이죠. 재밌는 것은, 그 상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의사에 관계없이, 내 스스로 이걸 하는 겁니다.
상대의 반응에 관계없이, 내가 이걸 하는 겁니다.
이걸 잘 생각해야 합니다.
후자가 이거와 전혀 반대이기 때문이죠. 후자는 상대가 허락한만큼만, 제약을 준만큼만, 허락할 때에만 합니다.
따라서 의식이 한정됩니다. 한계가 잡히죠. 그리고 상대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려야되므로, 기본적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이제부터 후자 얘기를 해보죠. 반대관계이니 위에 언급한 걸 반대로 보면서 유연하게 보면 됩니다.
후자는 제약이 있습니다.
즉, 만남의 횟수에 따라,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됩니다.
상대가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죠.
대표적인 예는 "너 나랑 별로 만난 적 없잖아? 근데 왜 그렇게 아는 척을 해? 친한척을 해?"같은 식의 표현입니다.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뭘까요?
만남의 횟수에 따라,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해두기 때문입니다.
즉, 얘는 나랑 1~2번 만났으니, 이 정도까지만 생각하는 게 바람직하고, 행동하는 게 적절하다.
그래서 '친하다'의 범위, 정도가
그러한 기준에 따라서, 하나하나 의식화되는 것이죠.
그래서
만날수록,
그 사람이 나를 허용하게 되는 단계가 올라갈수록,
그 사람은 '친하다'라는 느낌을 점점점 올리게 되죠.
그래서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그 이후에는 친하게 되었다 라던가,
이런 식의 표현이 나오는 것이죠.
이제 전자 얘기를 한번 더 하고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몇 번 만난 적도 없는데,
마치 오래전부터 만난 사람처럼 행동을 하거나, 말을 건네고,
또 실제로 그렇게 취급합니다.
예컨대 '처음 만나면 대개 이렇게 행동을 하는데'라는 기준에 맞게 행동하지 않죠.
오히려 반문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되는데?" "그냥 난 니가 낯설지 않은데? 되게 편한 것 같은데? 편하게 하면 안되니?"
이런 사람들은 처음 만나자마자 금방 친화력을 보이고, 마치 오래전에 만난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이에 대해서 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위의 경우와 비슷하기 때문이죠.
전자는 만나는 횟수에 따라 의식의 범위를 잡아두는 사람들이죠. 깃발로 표시해두듯이, 딱 거기까지만 가는 식입니다.
반면, 두번째 사람은 애초에 의식의 범위가 뚫려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범위 자체가 잡혀있지 않거나,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넓은 범위로 접근하게 되죠. 이런 사람들이 보통 외향적이고, 사교적이다는 평을 받습니다. 부작용은 잘 모르면서 더럽게 아는 척 하네, 같은 식으로 취급되죠.
(물론 주로 이런 상태를 거북해하는 사람들이 이런 평을 하겠죠.)
아마 조금 생각해보시면 금방 잡힐 겁니다.
위의 얘기는 능동성이냐 피동성이냐.
이를 인간관계에 적용시킨 겁니다.
인간관계가 무엇인가의 본질을 따지지 마십시오. 어차피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고, 의식하기 나름입니다.
(* 아닌데요, 정답은 있지만 그걸 모르는 겁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기가 그런 전제를 갖고 있다는 얘기를 할 뿐입니다.
달리 말해, 이것도 제가 제 전제로 그들을 판단하고 있는 거라면, 전제와 전제가 충돌하는 겁니다. 남는 건 전제이니,
단지 전제를 갖고 있다는 얘기만 남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전제를 갖고 있을 뿐이라는 쪽으로 결론이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프레임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건
이 때에 능동적으로 접근했는가? 피동적으로 접근했는가?
이 태도의 차이가 결정적인 차이를 가릅니다. 그 태도의 차이에 따라 의식이 잡히고 정보가 들어오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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