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질링의 나라는 국명(國名)이 없다. 그들의 나라는 오로지 그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른 종족들은 비언어족이거나 노예이다. -비언어족은 언어, 즉 소통이 불가능하기에 동등한 위치의 종족이라고 볼 수 없다.- 또한 그들의 나라 외에는 체인질링이 존재하는 다른 지역이나 나라가 없기에 그들은 스스로의 나라를 ‘체인질링’이라고 칭한다. 스스로의 종족이 곧 나라이며, 족속이고, 또한 그들 자신인 것이다. 어스포니만으로 이루어졌었던 ‘어스’나 페가수스만으로 이루어졌던 ‘페가소폴리스’도 그들 자신의 종족의 이름에서 국명을 따오긴 했으나 단순히 연원이 종족명인 것이지 종족명 자체가 국명인 것은 아니었다.
허나 체인질링들은 스스로의 나라, 종족, 그들 자체를 체인질링이라고 칭하며 그들의 국가, 그리고 왕을 모국(母國)-그들 특유의 단어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어머니 나라’ 로서 그들의 애국심의 발현인 듯 하다. 현재는 사어(死語)가 된터라 쓰는 자들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왕부(王父)-이 또한 그들 특유의 단어이다. 마찬가지로 애국심의 발현이며 굳이 번역하자면 ‘아버지 왕’에 가깝다. 부왕과는 의미가 다르다. 나라가 여성성, 왕이 남성성을 띄는 이유는 여러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다음 장에서 더 설명하도록 하겠다- 로 표현하며 나라 전체를 하나의 가족의 의미로 승화시킨다.
이에서 우리는 체인질링들이 나라를 단순한 개인의 집합체가 아닌 거대한 가족......
[종족론 부록 체인질링에 관한 심층적 고찰] 57p에서 발췌.
우기의 장마는 병사들을 짓누른다.
비의 무거운 발걸음은 병사들을 뒤따랐고 병사들은 눈에 띄게 지쳐갔다. 물론 병사들이 단지 비 때문에 사기를 잃을 정도로 형편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혹한이 몰아칠 겨울에 시작되었던 이 전쟁은 1년이 지나고, 비가 장막을 내릴 정도가 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바야흐로 끝없는 살해였다.
스마트 쿠키는 씁쓸한 기분으로 잔뜩 기가 죽은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들 모두는 자신과 팬시에게 목숨을 맡기고 있는 처지였다. 약한 모습 따윈 보일 수 없는 처지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전쟁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쟁 중 최대 목표는 몰살을 피하는 것 뿐이었고 대 포니 전술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었다. 솔직히 처음의 손쉬운 레베타토스 함락은 스마트 쿠키에게 커다란 자신감을 주었고 그건 팬시 또한 마찬가지였었던 것 같았다. 자신이 어떤 과감한 전술을 추천해도 팬시는 승낙했고, 전쟁은 계속해 연승을 거두었다.
체인질링의 본대가 오기 전까지는.
본대가 온 후로부터는 처참하기 짝이 없는 패배의 연속일 뿐이었다. 사실 지금의 이런 휴식도 겨우겨우 얻어낸 주옥같은 결과물이었다. 스마트 쿠키의 눈에선 암울함이 삐져나왔다.
“후우......”
그녀가 푸딩헤드를 따라다닌 지는 꽤 되었지만 이리도 힘든 전쟁은 처음이었다. 아니, 푸딩헤드가 곁에 없는 전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면 푸딩헤드가 있었을 때야 비로소 전장의 명령체계가 돌아갔었다. 푸딩헤드의 부재를 절감하며 스마트 쿠키는 입술을 짓씹었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어쩔 수 없다. 푸딩헤드의 부재는 너무나도 커다랬다.
“그냥 던져두고 버려버리는 게 어딨습니까, 푸딩헤드......”
“총사령관 보 각하, 척후부대 귀환했습니다!”
갑자기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에 스마트 쿠키는 깜짝 놀랐다.
“뭐, 뭐야? ... 아, 로제니아.”
“네! 로제니아 섭사직, 귀환을 알려드립니다!”
아직 어려보이는 소녀는 만면에 웃음을 띄고 대답했고 그에 겨우 스마트 쿠키도 미소를 짓는다. 전쟁 통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티없이 맑고 순수한 웃음이었다. 이 전쟁 중 유일하게 미소를 잃지 않은 소녀. 스마트 쿠키는 이 소녀가 좋았다.
“그래, 척후 결과는?”
“완전무결하게 안전합니다, 어떠한 적의 낌새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수고했어. 들어가 봐.”
로제니아는 경례를 붙이고는 부대로 귀환했다. 아마도 저 아이가 부대로 귀환하면 조금은 저 우울한 분위기도 나아지겠지. 살짝 미소를 짓고는, 스마트 쿠키는 사령부 쪽으로 눈을 돌렸다. 보이진 않지만 느낄 수 있는 ‘공기’라는 것이 있다.
공기는 무겁게 전장을 짓누르고 있었다. 병사들은 공기에 질려 얼굴이 어두웠고, 어느 누구도 기분이 좋아보이진 않았다. 방금 전 로제니아같은 신경 줄 굵은 병사가 아니고서야 아무도 이곳에서 웃을 수는 없으리라. 지독히도 무거운 사령부의 공기가 자신마저도 짓누르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그 날 이후, 한 도시를 완전히 침몰시킨 이후, 선량하기 그지없던 팬시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마치 전쟁의 승리만을 위해 존재하는 광자(狂者)처럼,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이미 1년도 지난 일이지만, 그때 자신을 바라보던 팬시의 눈만큼은 잊지 못했다.
‘이것이 당신이 말한 전쟁의 유일무이한, 절대의 윤리인 승리 아닙니까?!’
그 무언의 질문에 아직도 스마트 쿠키는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뭘 보십니까?”
“...... 팬시 총사령관.”
“비를 맞는 취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는 당신도 비를 맞고 있지 않느냐, 라고 말하려 했지만 팬시는 이미 그럴싸한 우산걸대를 차고 나와 있었다. 스마트 쿠키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거 있으면 빌려달란 말입니다. 요새 보급상황이 워낙에 안좋은지라 지금 당장이라도 굶어죽을 것 같은 기분이라고요.”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우산걸대를 각 부대에 백 개 씩 배급하는 것을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그 말에 스마트 쿠키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거짓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우산걸대는 장교들밖엔 쓸 수 없는 고급물품이었고 한부대에 백개씩 배급할 정도로 장교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또한 애초에 보급상황이 안좋다는 것 또한 거짓말. 유니콘의 투명화 마법과 페가수스의 공중이동으로 배급은 충분할 정도였다. 그런 시점에서 봤을 때 보급을 최우선시 해야 하는 총사령관의 실력이 나름 빼어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 출군은 언제쯤으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
팬시는 날카롭게 물어왔다. 어리숙했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 훌륭한 장군의 모습 그 자체였고 그에 스마트 쿠키는 씁쓸함을 느꼈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보고 있는 이 모습은, 무엇 때문일까. 팬시는, 자신은, 병사들은.
2년간의 전쟁은 도대체 무엇을......?
“스마트 쿠키?”
“아, 아.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의해주십시오. 총사령관 보. 전쟁중입니다.”
“죄송합니다. 방금 척후병의 보고에 따르면 주위에 적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우천을 틈타 매복하는 것 보다는 잠시 여기서 대기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 비도 내리니까 말이지요.”
스마트 쿠키는 실없는 농담으로 황급히 말을 끝맺었다. 그녀가 입속으로 삼킨 말은 ‘병사들의 사기도 떨어졌고 말이지요.’ 였다. 확실히 총사령관에게 총사령관 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걸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팬시가 아니었다.
“뭘 말하고 싶은 진 잘 알겠습니다. 병사들의 사기 얘기 말씀이시지요.”
스마트 쿠키는 그 말에 얼굴을 굳혔고, 그대로 팬시를 노려봤다. 어차피 말은 꺼내졌다. 더 이상 숨길 얘기도 아닌 것이다.
“네, 맞습니다. 병사들의 사기는 이미 오래전에 땅에 떨어졌습니다. 저들에게 칼을 쥐어줘 보십시오. 적을 찌르기는커녕 드디어 자살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할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애초에 저들이 이제 생각하는 생물이 당연시 여기는 행동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저들은 과연 자기들이 뭘 하고 있는지는 알고는 있는 것일까요? 네, 팬시!”
팬시는 스마트 쿠키의 말을 잘 곱씹고는, 미소를 지었다. 섬뜩한 미소였다.
“그게 당신이 바라마지않던 병사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