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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0212111095&code=990100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무엇이 우리를 음란하게 만드는가
가장 정신적으로 숭고한 사랑, 다시 말해 성욕을 넘어서는 플라토닉 러브를 신봉하는 여성은 어떤 사람일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 대학을 다니며 결혼 이전에 어떤 남자와도 관계를 맺지 않은 요조숙녀일까? 절대 아니다. 오히려 사랑에서 중요한 것이 육체적 교감보다는 정신적인 교감이라는 사실을, 아니 정확히 말해 정신적 교감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매춘부이다. 그녀에게서 섹스라는 것은 사랑을 확인하는 어떤 증거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성욕을 가진 남성이 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것이니까. 어떻게 팔 수 있는 것이 소중한 것일 수 있겠는가? 이와 달리 요조숙녀에게서 섹스는 결혼할 때까지 금기시되어야 하는 행위로 인정된다. 그녀에게 섹스는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절대적인 관문인 셈이다.
결국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 빠른 일일지도 모른다. 매춘부와 요조숙녀 중 누가 섹스를 중요하게 생각할 것인가? 당연히 매춘부가 아니라 요조숙녀일 것이다. 매춘부에게 섹스가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충족되면 곧 사그라지는 욕망이었다면, 요조숙녀에게 섹스는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모든 판타지가 투사되어 신성시되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심각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진정으로 음란한 사람은 매춘부가 아니라 요조숙녀이다. 매춘부와 달리 요조숙녀는 섹스를, 물론 부부 사이의 아름다운 섹스를 지속적으로 꿈꾸기 때문이다. 뒤마의 <춘희>나 모파상의 <비곗덩어리>와 같은 소설들은 이런 아이러니가 없었다면 쓰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19세기 소설가들은 정숙해 보이는 귀족 부인들이 음란하며, 음탕해 보이는 매춘부들이 더 숭고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섹스와 관련된 이런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욕망에 대해 가장 깊은 사유를 전개했던 바타이유를 언급할 필요도 없이, 인간의 욕망은 금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법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금지된 것만을, 아니 정확히 말해 금지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 울타리를 지나다가 우리는 경고 문구와 함께 작은 구멍을 발견하게 된다. “들여다보지 마시오.” 아마 이 문구를 보지 않았다면, 우리는 울타리를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렇지만 금지 문구를 보는 순간 우리는 구멍을 통해 울타리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혹은 날씬한 몸매나 식스팩을 만들기 위해 다이어트에 여념이 없는 젊은이들에게 음식은 참을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다이어트에서 음식은 금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욕망은 동물의 단순한 욕구와는 달리 인간적인 색채를 띨 수 있었던 것이다.
동양과 서양에 관계없이 성욕은 금기의 가장 대표적인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순결이란 해묵은 이상이 발생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결이란 이상은 남성이 아니라 주로 여성에게 부가되는 가치라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려는 가부장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해가 진 다음에 궁궐에는 수태 가능한 남성으로 오직 군주 한 명만이 있었고, 사대부 가문에서도 여성은 안채, 혹은 가옥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것이다. 여성은 자신의 배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지만, 남성은 그 아이가 자신의 핏줄인지 확신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다른 남성과의 노출을 가급적 막아야만 했고, 동시에 여성의 내면에는 순결의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자본주의라는 콜로세움에서 패배한 해묵은 가부장적 의식이
자신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가장 약한 여성·아동을 공격”
그렇다. 이처럼 순결은 결코 순결하지 않다. 섹스와 관련된 가부장적 흉계가 깔려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섹스에 대한 금기를 만들면서 성욕을 비대화시켰기 때문이다. 기묘한 일 아닌가? 순결을 강조하는 사회야말로 섹스에 온갖 시선을 집중하도록 만드는 음란한 사회라는 사실이. 더 심각한 것은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는 금지된 것 이외의 것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금지된 것에 몰입하니, 금지되지 않는 것에 몰입할 정신적 에너지가 생길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여성은 남성을, 혹은 남성은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만 보려는 편집증적 경향이 형성된다. 그 결과는 참혹하기만 하다. 마침내 우리는 지금 자신이 만나는 여성이 성적으로 여성이면서도 동시에 다른 수많은 특성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게 되었으니까. 그녀의 정치적 견해, 그녀의 미적인 감수성, 그녀의 정신적 이상, 혹은 그녀가 가진 운동 능력 등등. 한 여성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중요한 가치들이 송두리째 부정되거나 무시되는 셈이다.
현재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끔찍한 아동 성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토양은 이미 충분히 갖추어진 셈이다. 여기에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무한 경쟁에서 좌절했던 피해의식이 덧붙여지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셈이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찾아 그에게 승리를 거두면 되는 것이다. 잠시 동안 피해의식이 완화된 듯한 착각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장 약한 존재는 누구일까? 그것은 아이, 그리고 여성 아닌가. 결국 여성 아동과 관련된 잔혹한 성범죄는 가부장제가 조성한 음란한 사회와 자본주의가 가중시킨 피해의식의 잘못된 만남이 현실화된 것일 뿐이다. 수천년 지속되어온 가부장제의 유습과 자본주의가 낳은 반인문주의가 불행히도 지금 우리 시대에 제대로 조우한 셈이다.
그렇다. 자본주의라는 콜로세움에서 패배한 해묵은 가부장적 의식이 음란한 사회에서 자신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가장 약한 여성 아동을 공격하고 있는 시대.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는 살고 있는 시대다. 진단이 나왔다면 해법도 분명한 것 아닐까. 섹스를 금기시하지 말고 섹스를 남녀 사이에 가능한 수많은 관계들 중 하나로 자리잡도록 해야 하며, 동시에 자본주의적 경쟁 구조를 완화시켜 피해의식을 사회에 증폭시키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만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그러니까 아청법과 관련된 정부의 조치는 섹스와 관련된 금기를 강화시키고 있을 뿐, 심지어 가해자를 양산하고 있는 현재의 가혹한 경쟁 구조 자체는 아예 무시하고 있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고 했던가. 아니 어쩌면 정부당국은 선무당이 아니라 다른 의도를 가진 나쁜 무당일지도 모를 일이다. 섹스에 대한 금기를 강화하면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에 우리 시선을 멀어지도록 만들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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