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밑에 아인쉬타인도 있었고 이휘소도 있었지만 아인쉬타인보다 이휘소가 더 뛰어났다' - 전 미국 프린스턴연구소장 오펜하이머-
'이휘소에게는 1960년대 중반에 이미 노벨상을 주어야 했다' - 양진녕( 1957년 노벨상 수상자) -
' 그와 같이 6개월간 생활하면서 나는 도리어 이휘소에게서 많은것을 배웠다' - 겔만 (1969년 노벨상 수상자) -
'이휘소는 현대물리학을 10여년 앞당긴 천재이다. 이휘소가 있어야할 자리에 내가 있는것이 부끄럽다' - 살람(1979년 노벨상 수상소감 중에서) -
이휘소 박사는 서울대학교 2학년때 세계적인 물리학자의 논문에서 수학적 중대한 결함을 발견하고 지적한바가 있다. 그는 미국 또한 미국에서 학비를 벌기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업을 하는 과정에서 누구도 회피하는 가장 어려운 과목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교수와 함께 6개월동안 1:1로 수업을 해왔다.
수업이 끝나는날 세계적인 수학자인 대학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휘소 당신을 가르치기 위해 사력을 다해서 밤새워 공부했다' 다시 말해 낮에 아르바이트로 철가방을 들고 중국집 배달을 하면서 뛰는 자기 학생인 이휘소에게 지지 않기 위해 그 대학교수는 일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이휘소 [ 李輝昭 , 1935~1977 ]
1935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서울대학교 화공과에 재학 중 1954년 도미, 미국 마이애미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여 196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입자물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1~1962년 프린스턴고급과학연구소 연구 후, 1963년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교수가 되고, 1966년부터 미국 스토니브룩의 뉴욕주립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1972년부터 페르미가속기연구소의 이론물리학 연구부장이 되고 시카고대학교 교수를 겸하였다.
1960년대부터 입자의 복합모형이 제창되어 수학의 리군이론이 많이 사용될 때 그 발전에 기여하였다. 1967년 이후에 와인버그와 A.살람이 입자물리학의 네 힘 중에서 특히 전자기력과 약한 상호작용을 통일하여 만든 전기약작용을 재규격화할 수 있다는 이론적 증명을 함으로써 입자물리학 발전에 획기적 공헌을 하였다. 특히 1970년대에는 네번째 쿼크인 참쿼크의 존재가 예견되었을 때 이와 관련된 이론적 연구업적은 잘 알려져 있다.
1974년에는 서울대학교에 대한 국제개발처(AID) 교육차관 타당성 조사단의 일원으로 일시 귀국하여 한국 물리학계에도 큰 자극을 주었다. 1977년 6월 16일 콜로라도주(州) 국립과학연구소의 초청강사로 가는 도중 의문의 자동차 사고로 42세로 죽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핵개발을 추진하려다 의문사당한...
백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한 금세기 천재중의 천재....
교통사고...혹은 미국측의 음모에 의해 놀아난 희대의 천재....
요즘같이 미국 좆같은 색히들에게 놀아나가는걸 보면 이휘소 박사님이 떠오릅니다
대표적인 관련서적으로는
김진명씨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와 공석하씨의 '소설 이휘소' 가 있습니다.
아직 못보신 분들은 한번쯤은 보시길...
이휘소박사.. 당신은 천재였죠.......... 노벨상을 거부하고 박정희.. 아니 우리나라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