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글은 작성자[이상한 옴니버스]의 사견이 다소 개입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24년간 케냐의 대통령이었던 다니엘 아랍 모이와 관련한 부정부패 조사 문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은닉 장소인 스위스 은행 그룹 율리우스 베어의 고객 정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컬트 종교인 사이언톨로지의 내부 녹취 및 녹화 자료"
"2008년 당시 공화당 내 부통령 러닝메이트였던 세라 페일린의 개인 이메일"
"영국 내 극우정당인 영국국민당 당원 명부, 영국 내 반파시즘 단체인 반파시즘연합원 메일주소"
"시리아 권력 핵심부 인물들의 개인 이메일 250만 통"
"아이슬란드의 극비문서인 카우프싱 은행의 대부금 장부"
"911테러와 관련한 57만 건의 문자메시지"
"미군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의 매뉴얼"
"2007년 이라크전 당시 미군에 의해 2명의 기자를 포함한 이라크 국민 12명이 살해되는 장면을 담은 영상"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간의 전쟁일지 9만 건"
"미국과 이라크 간의 전쟁일지 40만 건"
"미국과 274개국 간의 외교 전문 25만 건"
"재스민 혁명과 이집트 혁명이 일어나는 데에 일조"
2006년 설립 후 3년 만에 워싱턴포스트가 지난 30년간 이룬 것보다
더 많은 특종을 생산해낸 위키리크스,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를 움켜쥔 줄리안 어산지.
"CIA는 어산지 머리에 직접 총알을 박아 넣어서라도 그를 죽여야 한다"
"위키리크스는 국제적 공공 서비스이자 민주주의의 도구"
질서와 정의, 선과 악의 기준 위를 걷고 있는 그와 그들의 이야기
그, 줄리안 어산지
성장기
1971년 7월 3일 호주 태생인 줄리안 어산지는 가을경 퀸들랜드 주의 항구도시인 타운즈빌을 통해 모친과 함께
그레이트배리어리프(Great Barrier Reef, 세계 최대 규모의 산호초 지대로 세계유산 등재) 내의 작은 섬에 도착한다.
그의 모친은 어려서부터 히피적 성향이 강해 집을 나와 그림을 팔거나
그림 모델을 서며 사회의 인습을 거부하던 68세대 여성이었다.
그런 그녀가 베트남전 반전 데모 중 만난 남자와의 사이에서 난 젖먹이 아이를 데리고
열대우림의 작은 섬으로 이주했는데 바로 이 아이가 줄리안 어산지이다.
그녀는 당시 결혼을 바라던 어산지의 생부를 떠나 이 아름다운 해안에서
작은 오두막집을 구하고는 당시 히피들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널리 퍼진
'원주민처럼 살기(Going native)' 생활방식을 짧게나마 즐긴다.
한편 어산지가 2살이던 무렵에는 그의 모친이 시드니에서
한 연극배우 겸 연출가와 결혼을 하면서 그렇게 셋은 유랑 연극단 생활을 한다.
어산지가 5살이던 때에는 세 가족이 타운즈빌을 통해 마그네틱아일랜드 근처 파인애플 농장으로 이주하는데
여기서 어산지는 그의 말을 빌려 톰 소여와도 같은 생활을 하며 그렇게 자유분방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어산지의 어린 시절을 아는 주변인들은 이들 가족이 히피였다고 표현한다.)
<어린 시절 애견과 함께>
어산지가 8살이 되던 때에는 그에게 동생이 생기는데 당시 그의 모친이
연극배우 겸 연출가와 헤어지고서 새로 만난 한 음악가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였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의붓아버지가 문제였다.
이 남자는 가짜 신분증'들'을 가지고서 다른 사람 행세를 하는 등 병적인 거짓말쟁이에다가
난폭하기까지 했는데 이 때문에 어산지의 모친은 양육권 싸움 끝에 어산지와
어산지의 동생을 데리고서 호주 전역을 떠도는 두 번째 유랑생활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의붓아버지는 5년여 동안 끈질기게 어산지 가족을
스토킹했고 이러한 그의 추적은 어산지가 16살이던 무렵에야 끝나게 된다.
당시 조숙하여 못 본 사이에 키가 180이 넘게 자란 어산지가
그전까진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에게 '꺼져!'라고 소리치며 쫓아냈던 것이다.
그렇게 이후 두 번째 의붓아버지는 두 번 다시 어산지 가족에게 접근하지 않았으나
이미 너무 길었던 유랑 생활로 어산지는 성장기 동안 무려 37번이나 이사와 전학을 반복하며
원격교육 및 모친의 가정학습으로 정규교육 일부를 대체해야 했다.
(이러한 가정학습에서 그의 모친은 당연히 자신의 반권위주의적 교육이상에 의거한 교육을 했다.)
첫 만남, 그리고..
어산지가 13살이던 무렵 성장환경으로 인해 고정적 유대관계에 있어 큰 어려움을 겪던 어산지는
집 근처 전자상가에서 당시 폭발적인 인기가 시작되던 8비트 가정용 컴퓨터 '코모도어 64(Commodore 64)'에
마음을 빼앗겨 하루 중 대부분을 전자상가에서 보내면서 곧 간단한 프로그램은 직접 만들 정도의 수준에까지 오른다.
그리고 이처럼 어산지가 컴퓨터에 집착하자 아이의 관심사를
눈치챈 모친은 그에게 이 코모도어 64를 사주게 된다.
물론 이를 위해 350달러가 필요하여 당시 어산지가 기르던 말 틸리를 팔아야 했지만
틸리가 걷어차는 바람에 팔뼈가 부러진 적이 있었던 어산지는 이를 크게 개의치 않았던 듯하다.
그렇게 얻은 컴퓨터에 모든 마음을 빼앗긴 어산지는 당시 또래 아이들이
팩 맨이나 동키콩과 같은 게임에 빠져 최고레벨과 점수 경신에 몰두하던 반면
게임들의 프로그래밍적인 허점을 찾아 아예 최고점수 자체를 조작하거나
프로그래머들이 프로그램 코드 속에 몰래 숨겨놓던 비밀 메시지들을 찾는 일과 같은
크래킹, 즉 프로그램 보안을 뚫는 일에만 열중한다.
이처럼 어산지가 놀라울 정도로 빠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선천적으로 뛰어났던 그의 지능도 한몫했을 것이다.
비록 당시 학교에서 이루어지던 IQ 검사가 아이들의 자신감을 키워주려는
목적이 있어 그 신뢰도가 떨어진다고는 하나 그는 또래 아이들의 평균치인
100을 훨씬 상회하는 146~180을 늘 유지했던 것이다.
<가정용 컴퓨터는 어느 시대에든 사랑받아왔다, 사진은 코모도어 64 시스템>
이후 어산지는 16세 생일에 그토록 원하던 모뎀을 손에 넣으면서 본격적으로 네트워크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하는데 그는 매드 프로페서(Mad Professor, 잘난 척하기를 좋아하던 그에게 학교 친구들이
붙여주었던 별명)라는 닉으로 당시 호주에서 인기 있었던 '퍼시픽 아일랜드 그룹(Pacific Island, 컴퓨터광들이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내 하위 커뮤니티 중 한 곳에서 열성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그는 당시 불안정했던 삶에서 완벽한 해방구였던 네트워크 세계에 점차 빠져들면서
불과 몇 달 만에 퍼시픽 아일랜드의 서버를 침입할 정도로 수준이 올라갔고 또 몇 달 뒤에는
'스크립트 키디(script kiddie, 스스로 해킹 프로그램을 짤 정도의 수준이 못 되어 다른 이의
스크립트나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이를 뜻함)'를 졸업하여 진짜 해킹의 세계로 들어가기에 이른다.
그렇게' 멘닥스(Mendax, 컴퓨터를 알기 전 공공도서관에 틀어박혀 지내던 시절 읽었던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구 splendide mendax, 즉 고귀한 거짓말쟁이에서 차용)라는
이름의 해커가 된 어산지는 당시 호주의 해커들이 눈독 들이던 '미네르바(시드니의
국영 통신사가 운영하던 컴퓨터 시스템)'에 침입하며 처음으로 대형 해킹 사건을 일으킨다.
당시 어산지는 나이에 비해 조숙하여 180이 넘는 키에 상당한 저음을 지니고 있었는데
바로 이러한 목소리를 이용해 기발한 방법으로 힘 안 들이고 미네르바를 침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미리 녹음한(통신사 사무실 분위기를 연상하도록 웅성거리는 소리와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 등을)
카세트테이프를 재생한 상태로 당시 미네르바를 사용하던 기업들에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국영 통신사 직원입니다.
다른 게 아니라 현재 미네르바의 하드디스크 하나가 다운되어서요.
혹시 당신네 회사 자료가 날아갔을 수도 있으니 제가 확인할 수 있게
미네르바의 접속코드를 알려주시겠어요?"
이러한 방법으로 미네르바 내의 대형 컴퓨터를 통해 군대, 은행, 증권거래소와 같은
네트워크에 침입하는 데에 성공한 어산지는 이후 두 명의 해커 친구들과 함께
'국제 전복자들(International Subversive)'이라는 이름의 이른바 해커 갱단을 결성하며
스스로 만든 해킹 프로그램으로 호주국립대학에서 하루 사이에 10만 건의 자료들을 훔쳐내는 등 악명을 떨친다.
이후 어산지를 필두로 한 국제 전복자들은 왕립 멜버른 기술연구소,
미 공군 및 해군의 방위사령부, 록히드 마틴과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와 같은
굵직한 곳들에 자유자재로 침입한 데 이어 1991년에는 미국 국방성 내부 전산망에
해커들의 비밀 통로라 할 수 있는 '블랙도어'를 설치하며 원하는 때에 마음대로 드나들기까지 한다.
(당시 이미 1980년 말부터 컴퓨터 범죄에 대비해 독자적인 전단반을 꾸렸던 호주 연방경찰은
국제 전복자들이 왕립 멜버른 기술연구소를 침입했을 때의 흔적들을 추적해 1990년 10월경
국제 전복자들의 신원을 파악하나 더 많은 증거를 수집하고자 무려 1년 동안 이들의 해킹 활동을 묵인한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당시 출가 중이던 어산지는 18살 생일 즈음 자신보다 한 살 연하였던
여자친구와 비공식적인 결혼식을 올리고서 그해 사내아이를 얻기도 하나 몇 년 안 가
결혼생활과 양육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을 이유로 그의 여자친구는 아들을 데리고 떠나버린다.
한편 이 무렵 그와 국제 전복자들은 노텔 텔레콤 측의 컴퓨터에 침입하여 그곳의 시스템 관리자에게
조롱하는 메시지를 남기며 결정적 증거를 흘리는 누를 범하고 마는데 이로 인해 당시 20살이던 그는
얼마 전 떠난 여자친구와 아들을 떠올리며 집에서 홀로 청승을 떨던 중 방문한 호주 연방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그렇게 무려 3년이 걸린 검찰의 기소에 의해 1994년 국제 전복자들은 29건의 컴퓨터 범죄행위에 대한
공식 기소장을 받고서 이듬해 5월 5일 2건이 추가로 기소된 1차 공판에서 어산지를 제외한 두 명에게
벌금형이 내려지고 이후 끝까지 혐의를 인정하지 않던 어산지도 1996년 12월 5일 멜버른지방법원으로부터
다행히 다른 멤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2100호주달러 금고형을 받게 된다.
<1995년 공판을 치르던 당시의 줄리안 어산지
말꼬랑지 머리, 롱 트렌치코트에 선글라스가 당시 그의 아나키스트적인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어산지는 성장기 환경과 해커 시절의 영향으로 늘 반전(反戰), 반(反)권력 성향의 사람이었다>
여담으로 어산지의 모친은 이 재판보다도 10년 동안 이어진 끝에 1999년에 합의된
어산지와 전 여자친구간의 양육권 싸움이 더욱 그를 괴롭혔을 것이라 말한다.
당시 어산지와 그의 모친은 어산지와 전 여자친구 사이에서의 아이가
그녀와 그녀의 새 배우자에게 좋지 않은 대접과 학대를 받는다면서 단독 양육권을
얻으려 노력한 끝에 '자녀에 대한 정기적인 방문권 합의'를 받아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단독 양육권을 인정하지 않던 당국에 어산지와 그의 모친이
시도한 로비 활동에서 장차 어산지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는 실전적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관계 당국 담당자와의 대화를 녹취하는 한편 그 내부의 많은 정보원들을 포섭해
내부 정보 유출(leak)을 촉구하면서 권력과의 효율(?)적인 싸움 방법을 깨닫게 된 것이 그것.
<어산지의 반권력 성향에는 어린 시절 말이 다니는 길을 없애려는 시(市)에 항의하고자
자신의 조랑말을 타고서 1인 시위를 했던 모친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세 번째 유랑 생활, 그리고..
자라면서 점차 반권력 성향을 키워오던 어산지는 90년대에 현재 호주에서 가장 큰
무료 인터넷 서비스 공급자인 '서버비아(suburbia.net)'의 관리자로 활동한 데에 이어
'사이퍼펑크스(Cypherpunks)'라는 전설적인 메일링 그룹에서 활동하며
자유분방하고 무정부주의적인 컴퓨터광들과 친분을 쌓는다.
1997년에는 동료들과 함께 '러버호스(Rubberhose)'라는 암호화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이른바 인터넷 활동가들은 경찰의 추격을 피할 수 있는 비상문을 얻은 셈이었다.
(당시 해당 프로그램은 개인에게는 무료, 기업과 국가기관에는 허가 동의가 필요하도록 배포되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배후에 미국 정보기관이 있는 것이 확실한 한 회사가 연락을 해온 적도 있다고 한다.)
이 시절 어산지는 본격적으로 '핵티비스트(Hacktivist, 해커와 행동주의자의 합성어로
해킹을 투쟁 수단으로 삼는 새로운 형태의 행동주의자)'의 길을 걸으며
자신의 해킹실력을 본인의 말에 따라 '인권운동의 일환'으로만 사용한다.
이즈음 어산지는 언론이 정부와 공공기관에 대한 억지력이 부족하다는 생각 하에
정치 참여에 관심이 많은 해커 및 프로그래머 그룹과의 토론을 통해
이들 정부 기관들의 내부 정보 유출에 대한 아이디어 찾기에 심취하다
결국에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 세 번째 유랑을 떠나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다.
그렇게 유랑 생활에서 친분이 있던 인터넷 친구들과 자신의 프로그램 러버호스를 사용하느라
채무관계에 있던 프로그래머들(물론 이 가난한 프로그래머들은 돈을 지불할 능력이 안되어
기꺼이 어산지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형식으로 변제를 받았다.)에게 신세를 지던 어산지는
몇몇 인터넷 활동가들을 직접 만나보기도 하나 실리콘밸리 주식 투자로 돈을 벌거나
총기류를 수집하는 등의 모습들에서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한다.
(어산지가 이즈음 만났던 인터넷 활동가 중에는 세계 최초의 상용화 웹브라우저인
넷스케이프의 창시자도 있었는데 그도 자신이 번 큰돈으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2001년에 911테러가 일어나면서 미국에서는 테러 용의자들을 법원의 동의 없이도
체포 구금할 수 있는 특별법이 공포되는데 말레이시아도 이러한 특별법을 따라 자국의 62명에 달하는
알카에다 용의자들을 구금하면서 말레이시아 내 야당과 시민단체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된다.
알카에다 용의자들 중 실제 알카에다와는 무관한 정부 비판자들도
용의자 명목으로 감옥에 보내졌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이에 말레이시아 내 인권협회는 국제지원단체들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당시 어산지는 호주 상원의원들에게 즉각 항의하는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이러한 편지만으로는 어떠한 효과도 끌어낼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한
어산지는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특히 그 대상이 권력기관이라면
그 중추를 흔들 수 있을 만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어산지가 인터넷이 아닌 현실에서 최초로 직접적인 활동을 보여준 항의편지 건은
사진 속 이 어린 꼬마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가 되는 큰 계기가 되었다>
그들, 위키리크스
탄생
· 어산지는 자신의 비밀프로젝트에 위키피디아의 위키(wiki)와
비밀을 누설하다의 리크스(leaks)를 따 '위키리크스'라고 명명
- 어산지가 위키피디아에서 이름을 딴 이유는 처음 프로젝트 진행 당시 그가 위키피디아와 협력하여
위키리크스는 기밀문서를 공개, 위키피디아는 기밀문서의 쟁점내용을 다룬다는 구상에서였으나
위키피디아의 창시자 지미 웨일스는 어산지의 생각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무산
· 2006년 10월 4일 도메인(wikileaks.org, wikileaks.cn, wikileaks.info) 등록
- 어산지로부터 이메일로 위키리크스의 대략적인 개념과
도메인 등록 요청을 받은 해킹계의 베테랑 존 영이 흔쾌히 승낙
- 존 영은 1996년 6월부터 '크립톰(cryptome.org)'이라는 기밀문서 공개 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하며 어산지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던 대머리 뉴요커
- 당시 어산지가 보냈던 이메일은 크립톰 사이트(http://cryptome.org/wikileaks/wikileaks-leak.htm)에서 확인할 수 있음
· 처음 위키리크스의 로고는 당시 호주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던 폴란드 여학생의
디자인(선글라스를 낀 두더지가 권력자들의 장벽을 깨고 있는)이 꼽혔으나
곧 다른 동조자인 독일 여성이 로고 속 장벽이 마치 베를린 장벽처럼 보인다는
제기를 내놓았고 이후 폴란드 여학생이 다시금 새로 디자인 한 로고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음
(어산지가 대외적으로 밝힌 것에 따르면 직접 참여자가 22명에 달하나
간접 참여자나 자원봉사자를 포함하면 훨씬 많은 수에 달할 것으로 추정)
멤버
· 줄리안 어산지
- 위키리크스의 창립자
· 대니얼 매튜스
- 어산지로부터 위키리크스에서 자신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인물로 꼽힘
- 수학자로 세계수학올림피아드에서 호주 대표로 여러 차례 참가 경력
- 어산지와는 대학에서 알게 되었는데 매튜스는 멜버른 대학의
수학 및 통계학 협회 회장이었고 어산지는 부회장이었음
- 위키리크스 설립 당시에는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 유학 중이었음
(어산지는 그가 다니던 멜버른 수학과가 미군과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학교를 그만둠)
- 위키리크스 내에서 가장 정치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매튜스는 평소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 서적을 즐겨 읽었으며 스탠퍼드 대학 시절에는 이라크전 반대 및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의 스탠퍼드 대학 방문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함
- 당시 시위로 부시 대통령의 방문을 막은 매튜스는 어산지가 위키리크스의 참여 의사를 묻자 흔쾌히 승낙
- 현재 보스턴 칼리지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위키리크스와는 결별한 상태
· 제이 림
- 태국 출신의 변호사로 위키리크스의 법률 담당자
· 안나 드 종
- 유럽 여성으로 위키리크스의 대변인 역할
· 이 외에 어산지와 같은 멜버른 대학 출신으로 함께 여러 사회 그룹에서
활동한 오랜 친구 한 명, 총 5명이 실질적인 위키리크스의 핵심 멤버
주요 폭로
· 크롤 보고서(http://wikileaks.org/wiki/KTM_report)
- 24년간 케냐의 대통령이었던 다니엘 아랍 모이와 관련한 부정부패 조사 문서
- 모든 게 가능했던 시절을 끝내버리겠다며 케냐의 새 대통령에 당선된 음와이 키바키는 비밀리에
사설탐정업체인 '크롤(Kroll)'에 전임 대통령인 모이와 관련한 부정부패를 조사할 것을 지시
- 그 결과 다니엘 아랍 모이와 그 측근들이 얽힌 수많은 부정부패(불법적으로 얻은 수억 달러에 달하는 국가 재산,
이 재산은 모이와 두 아들이 뉴욕 및 런던의 부동산, 벨기에 은행, 호주 목장 등에 투자하는 데 사용됨)가 밝혀짐
- 이와 같은 조사 보고서는 2004년 1월경 작성되지만 이후 케냐 내의 정치적 상황이
크게 변모하며 키바키가 모이와 동맹을 맺게 되자 해당 보고서는 공개가 보류됨
(키바키 정부의 대변인은 이 보고서가 불완전하고 부정확한데다가 주로 소문에 의거했기 때문이라고 주장)
- 한편 2007년 말 이러한 보고서를 입수한 위키리크스는 그해 12월에 해당 보고서를
위키리크스 사이트에 공개했고 이로 인해 케냐 내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남
- 이 때문에 12월 27일 있던 대선에서 키바키는 도전자 측인 라일라 오딩가에
당초 예상과 달리 불과 23만 표 차이로 힘겹게 승리하며 재선에 성공
(해당 보고서 공개로 키바키의 지지율이 처음보다 10% 정도 하락했을 것으로 추측)
- 이후 케냐 내의 인권재단 대표와 기획책임자였던 오스카 킹가와 폴 울루가
국회의사당에서 불과 1km 떨어진 곳에서 무장괴한들로부터 피격당하며 살해되고 마는데
어산지는 이들이 케냐 경찰이 저지른 살인행위들을 파헤치던 중 살해당했다며
그들로부터 받았었던 증거자료들을 2008년 11월 1일 '피의 절규: 법의 영역 밖에서 벌어진 살인과 납치'라는
제목으로 위키리크스 사이트에 공개하였고 이로 인해 2009년 6월 국제사면위원회로부터 '뉴미디어 상'을 수상
· 엘머 문서
-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은닉 장소인 스위스 은행 그룹 율리우스 베어의 고객 정보
- 율리우스 베어의 전직 매니저였던 루돌프 엘머가 스위스 금융계가 앞으로
지금보다 정직하고 윤리적이 되기를 바란다는 이유로 위키리크스에 고객 정보를 올림
- 율리우스 베어의 매니저였었던 엘머는 지사의 회계를 총책임지는 자였는데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가 있던 중 몇몇 서류가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고 이에 본사에서 진행한
조사에서 평소 약을 달고 살던 엘머가 탈진을 이유로 응하지 못하자 2002년 말 그에게 해고가 내려짐
- 이러한 일이 그가 고객 정보를 유출한 가장 큰 이유로 추정됨
- 그렇게 엘머는 평소 자신이 늘 지니고 있던 은행 서버의 백업 파일을 2007년 12월 위키리크스에 등재
- 당시 율리우스 베어 측이 즉각 캘리포니아에서 소송을 제기하며 그곳 거주자이자
위키리크스 내에서 신분을 드러내놓고 대외적 활동을 하던 매튜스와 존 십턴이 법정에 서게 되었고
이에 매튜스는 자신이 해당 자료를 직접 참여해 공개한 것도 아니라며 맞대응
- 법정 진술에서 매튜스는 율리우스 베어 측이 '위키리크스가 정보원들의 익명성을
보장한다는 사실에 충격'이라고 말한 것에 '다른 곳도 아닌 스위스 은행이 위키리크스가
정보원들의 익명성을 보장하는 것에 충격받았다고 하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말함
- 재판 기간에 여론의 분노가 만만치 않자 처음 위키리크스 사이트 폐쇄명령을 내렸던
제프리 화이트 판사는 매튜스와 십턴의 국적이 호주라 소송의 효력이 불분명한 점,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의 유효성, 해당 사건이 전 세계 언론으로
퍼져 나가는 것에 따른 해로움을 들어 위키리크스 사이트 폐쇄명령을 철회
- 이에 율리우스 베어 측 또한 군말 없이 소송을 취하하나 이러한 법정 다툼 기간 동안 주가가 4.8% 하락
- 재판 동안 내심 불안에 떨었던 매튜스는 부담감을 떨치지 못하여 재판종결 직후 위키리크스와 결별
- 한편 율리우스 베어 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엘머의 자료가 진본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는데
실제로 위키리크스에 등재됐었던 관련 문서들에는 변조가 의심되는 문서도 섞여 있었음
· 부수적 살인
- 2007년 이라크전 당시 미군에 의해 2명의 기자를 포함한 이라크 국민 12명이 살해되는 장면을 담은 영상
- 2007년 7월 12일 뉴바그다그에서 공중폭격이 있었는데 이로 인한 사망자 중에는
로이터통신 측 기자 2명(이라크인)도 있어 2007년 8월부터 로이터통신 측이
미국의 정보자유법을 근거로 들어 해당 영상을 입수하려 하나 실패로 끝남
- 당시 해당 사건 직후 미군 대변인은 희생자들이 적군과의 교전에 휘말린 것이라 해명
- 그러나 해당 사건의 실상은 당시 아파치 헬기 '크레이지 호스'가 총격전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지역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을 포착하던 중 그들이 AK-47 소총과
RPG-7 대전차 로켓포를 들고 있는 것으로 오인해 상부의 공격 허락을 받아 그대로 공격한 것
- 이러한 1차 공격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살해되었고 당시 여기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로이터통신 기자
사예드 크마그는 중상을 입은 몸을 이끌고 인도로 기어가던 중 한 봉고차 운전자를 만남
- 여기서 봉고차 운전자는 차에서 내려 그를 도와주려고 하였는데 크레이지 호스는
이를 한패로 보고서 재차 상부의 공격 허락을 받아 2차 공격을 감행
- 결국, 사예드 크마그와 봉고차 운전자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으며
당시 차 뒷좌석에 있던 운전자의 아이들 둘은 중상을 입고 맘
- 2010년 1월경 미군 내 내부 고발자로부터 크레이지 호스에서 촬영된
해당 영상을 입수하게 된 어산지는 영상 편집을 걸쳐 2010년 4월 5일에 공개
- 공개는 워싱턴 정가의 심장부에 위치한 100년 전통의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기자회견과 함께 이루어졌는데
이는 위키리크스가 워싱턴 포스트나 뉴욕 타임스와 같은 대형 언론사와 대등한 위치에 섰음을 시사
- 어산지는 당시 미국이 종종 사용하던 표현인 '부수적 피해(군사활동 중 발생한 민간이 희생을 뜻함)'에
빗대어 '부수적 살인'이라는 제목으로 해당 영상을 공개하면서 위키리크스는 한동안 전 세계 뉴스의 메인을
차지함은 물론 인터넷 검색의 상징인 구글에서도 상위 랭크 되며 그렇게 일반 대중에 그 존재를 널리 알리게 됨
- 한 마디로 이 영상은 그 당시까지 위키리크스가 폭로했던 자료들 전부를 뛰어넘는 영향력을 끼침
- 부수적 살인을 본 많은 이들은 사건 당시 미군 측이 했던 뻔뻔한 변명보다도
한 무리의 사람들을 공격한 직후 미군 둘이 나눈 대화('오, 예~ 저 새끼들 뒈진 것 좀 봐',
'나이스, 굿 샷')와 이후 지상군에 의해 아이들이 피격당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직후 이들 미군 둘이 나눈
대화('애들을 전장에 데리고 온 그들이 잘못이지', '맞아')에서 전쟁의 광기를 확인하고는 더욱 충격을 받음
- 영상 공개 이후 실제로 사건 당시 현장에는 두 명의 남자가 소총과 대전차 로켓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위키리크스가 편집된 영상을 통해 의도된 진실만을 보여준다는
비난도 있었는데 이에 어산지는 그렇긴 하지만 그러한 무장은 전시 상태에서 자신들의
주거지역을 지키려던 것일 수 있으며 적어도 두 번째 공격은 명백한 살인이라고 받아침
- 해당 영상 공개 과정에서 위키리크스가 처음 내세웠던 원칙, 즉 어떠한 개입도 없이 순수하게
원본 자료만을 공개한다는 점을 어산지가 독단적으로 어긴 것을 두고서 위키리크스 내부에서도
불만이 제기되었으나 어산지는 미편집 원본 영상도 함께 올렸다는 말로 불만을 가라앉힘
- 한편 영상이 공개된 지 열흘 뒤에는 당시 사건에 연루되었던 부대에서 복무 중이던
두 병사(이 중 한 명은 공격 직후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지상군으로 중상을 입었던 아이들을 구출)가
이라크 국민에게 보내는 공개편지에서 '영상 속 병사가 애들을 전장에 데리고 온 것이 잘못이라고 했지만
아이들이 있는 근처에서 전투를 벌인 책임은 온전히 우리들 몫입니다'라며 사과
· 케이블 게이트
- 미국과 274개국 간의 외교 전문 25만여 건
- 이러한 자료는 뉴욕 주 포트 드럼 기지 소속의 정보 분석병 브래들리 매닝로부터 입수
- 매닝은 해당 자료 외에도 앞서 다룬 부수적 살인 영상을 보내온 장본인으로
이밖에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간의 전쟁 일지 수십만 건 또한 그의 손에서 전달되었음
- 매닝은 20살 무렵 제대 후 모은 돈으로 대학을 갈 생각으로 입대를 하여 정보 분석병 보직을 받음
- 그렇게 미군 내 정보 분석병이 된 매닝은 톱 시크릿 보안 등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근무시간 동안 수많은 기밀 네트워크에 들어가 주어진 작업을 하게 됨
- 이처럼 매닝은 'SIPRNet'이라는 특별 보안 네트워크를 통해 매일같이
펜타곤이나 미 국무부에 액세스 하여 수많은 기밀문서 및 영상물에 접근
- 그러던 중 매닝은 2009년 11월 25일경 911테러와 관련한 57만 건의 문자메시지들을 공개한 위키리크스에 매료됨
- 이에 곧 매닝은 정보 유출을 방지하고자 USB 메모리는 반입이 불가능하지만
음악 CD는 반입이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해 다시쓰기가 가능한 공CD에
레이디 가가의 음악을 넣은 CD를 가지고 출근한 뒤 근무지 내의
리라이터기를 가지고서 이후 부수적 살인이라 이름 붙여지는 영상을 집어넣음
- 그렇게 해당 자료를 익명화 네트워크 프로그램을 통해 위키리크스로 발송한 매닝은 이후 비슷한 방식으로
아프가니스탄전 전쟁 일지 9만여 건, 이라크전 전쟁 일지 40만여 건, 미국 국무부 외교전문 25만여 건 또한 발송
- 당시 매닝은 철저한 암호 기술과 신중한 데이터 관리를 했기 때문에 완전범죄를 꿈꿀 수도 있었지만
한 채팅 친구에게 이러한 것들을 털어놓는 바람에 꼬리가 잡혀 2010년 5월 26일 체포되기에 이름
- 그의 채팅 친구는 본인을 기자로 가장한 해커 애드리언 라모였는데 처음엔 매닝의 이야기에 빠져들던 그도
사태가 점차 걷잡을 수 없어지는 것을 곁에서 보다 못해 자신의 부친에게 상담을 하기 시작
- 이에 라모의 부친은 본인이 알고 있던 IT 보안기술 분야의 컨설턴트를 소개시켜주었고
당시 FBI와 긴밀한 협력구조에 있던 이 컨설턴트는 FBI를 비롯해 NSA와 같은 정보기관들과의 만남을 주선해 줌
- 현재 약 3년 만에 자신의 혐의들, 즉 아프가니스탄전과 이라크전의 군사일지 및 국무부 외교전문을
위키리크스 측에 유출한 사실을 모두 시인하며 이에 대해 피에 굶주린 미군의 만행과 이들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전선에서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주장
- 하지만 그가 라모와 채팅을하던 당시 했던 말('이 전문들이 워싱턴의 컴컴한 골방 서버에만
갇혀 있는다는 것은 말이 안 돼', '사람들은 진실을 알아야 해, 그들이 누구이든 상관없이')을
보면 어린 시절 국가와 국기에 대한 맹세를 거부하며 해킹의 세계에 심취하던 그가 으레
핵티비스트들이 그러하듯 자신이 꿈꾸는 개혁을 바라며 유출을 했을 가능성도 있음
- 매닝이 라모와의 채팅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전 세계 수천 명의 외교관들은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더니 그들의 비밀 외교전문이 통째로 일반에 공개된 것을 알면
아마 심장마비를 일으킬 것'이라고 말하면서 외교전문이 공개됐을 시의 일을
궁금해 했다는 사실도 해당 유출이 좀 더 개인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시사
- 어쨌든 미국 역사상 최대(또는 최악의) 기밀 유출 사건의 주인공인 매닝은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면서 20년 형에 처해질 상황인데다 그의 행위를 적을 이롭게 한
간첩죄로 정의한 군 검찰에 의해 까닥하면 가석방 없이 종신형을 살게 될지도 모름
- 한편 매닝이 전달한 외교 전문은 일반 문서 13만여 건, 3급 기밀 10만여 건, 2급 기밀 1,5000여 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키리크스는 이를 2010년 11월 28일에 219건의 문서를 공개한 것을 기점으로
수개월 동안 조금씩 공개할 계획이었지만 당시 협력 관계(어산지는 방대한 양의 문서들에 대해
말하자면 공익성 기준에 맞는 제보거리를 추려줄 편이 필요했다.)에 있던 가디언지의 한 기자가
2011년 2월 출판한 저서에 전문을 열람하기 위한 패스워드가 써놓는 바람에
미편집본(문서 내 등장인물들이 익명 처리되지 않은) 전문이 열람 가능해지자
동년 9월 2일 251,287건에 달하는 문서 전문을 공개
- 여기서 당초 계획과 달리 한 번에 모든 전문을 공개하게 된 위키리크스 측은
당연히 문서의 방대한 양으로 인해 익명화를 위한 편집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이 때문에 이후 위키리크스로 인한 사상자가 있을 것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가 됨
현대의 판도라 상자, 선인가 악인가
매닝으로부터 입수한 자료들을 폭로하며 전 세계의 정부, 특히 그 중에서도
역사상 최강국인 미국에게 어마어마한 짝사랑(?)을 받고 있는 위키리크스와 어산지.
이들이 벌인 유례가 없던 프로젝트는 선과 악, 그리고 질서와 정의로는 정의내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위키리크스는 이때까지 언론이 폭로를 위해 보도 공익성을 검토하는 데만 수개월을 잡아먹던 것과 달리
컴퓨터 한 대와 몇 초에 불과한 시간만으로 세상을 뒤흔들 다국적 폭로를 가능케 했다.
(물론 여기에는 미비한 공익성 검토로 인한 부작용 또한 존재하지만)
이처럼 선과 악, 그리고 질서와 정의 기준 위를 걷고 있는 그와 그들은
종래의 관념을 벗어난 새로운 썸씽(something)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어산지와 위키리크스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위키리크스의 방향을 결정짓는 실질적 권한을 지닌
어산지에게서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어산지에게 궁금해하는 것 중 빼놓을 수 없는 하나는
이 위키리크스의 방향을 결정짓는 절대자의 정치적 성향이 좌냐 우냐하는 것이다.
(정확히는 그가 정말 좌파인지를 궁금해 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을 아끼던 어산지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신념들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는 그것들을
오직 좌냐 우냐의 기준으로만 분류한다면 아마 저는 다연히 좌파일겁니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위키리크스 또한 좌파적 성향에 따른 행보를 보일 것이라고 봐야 할까?
하지만 어산지는 내부 메일링리스트를 통해 확실하게 좌파 진영에
뿌리를 내리자고 한 지지자들을 다음과 같은 말로 질책한적 또한 있다.
"당신들은 진보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로서의 의제와
그에 상응하는 화법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을 아주아주 빨리 낙오될 겁니다."
어산지는 모든 위키리크스 지지자들이 민주주의의 전제조건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추구하는 개별적 야망이 아무리 고귀하고 소중하더라도
위키리크스의 전제조건은 그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위키리크스 창립 당시 내부 메일에는 자신들의 목표를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 내의 몹시 억압적인 정권들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어산지가 단순히 반미 성향에 따라 지금과 같은 행보, 즉 수십만 건에 달하는
미국의 전쟁일지 및 외교전문 폭로와 같이 미국을 타깃으로 한 길을 걷는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다만 그들의 뜰채에 너무 큰 물고기가 잡혔고 당연히 이를 못본 척 하지 않았을 뿐이다.)
오히려 어산지와 위키리크스의 성향은 부정한 권력과
문화제국주의에 반감을 갖는 핵티비스트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역사상 최초로 초월적 권력을 손에 넣게 된 이 핵티비스트들은
앞으로 우리에게 좌우 이념에 이어 또 하나의 새로운 이념을 선사할 수도 있다.
그렇게 미래에 사람들은 정치이념을 말할 때 좌, 우, 그리고 핵티비스트로 분류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권력자들의 수프에 침을 뱉는 게 좋다."
- 줄리안 어산지
에필로그
최근 위키리크스는 불안한 행보를 걷고 있다.
법적 공방으로 인해 어산지가 생에 네 번째 유랑을 시작한 것은 제외하더라도
그에게 공감하고 따랐던 동지들이 더는 거대해진 위키리크스에서 순수했던 초기의
근사한 무엇인가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며 하나 둘 등을 돌리게 된 것은 분명 좋지 않은 신호이다.
게다가 지능이 높은 사람이 단골로 겪는, 즉 자신보다 지능이 낮은
이들에게 쉽게 흥미를 잃고 함부로 대하는 기질이 어산지에게도 존재해
이제는 자원봉사자들 사이에서도 그를 독재자로 보는 시선이 있을 정도다.
심지어 어산지는 자신을 비판하는 아이슬란드 내 자원봉사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 조직의 심장이고 영혼이며 창립이고 대변인이고
최초의 프로그래머이고 기획자이고 자금조달자이고, 그리고 나머지 전부다.
이게 싫으면 네가 떠나라."
어쩌면 이러한 그의 외침은 독재자의 독선이 아닌
거대 집단의 수장으로서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울분일 지도 모르겠다.
한편 어산지는 만약 자신이 사망하거나 장기 투옥될 경우
위키리크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밀문서를 공개하겠다고 엄포하고는
1.4기가 분량의 암호화된 파일을 인터넷에 배포했는데
이 최고수준의 256비트 암호파일은 암호를 알고 있는 배포자 외에 그 누구도 들여다 볼 수 없다.
어쨌든 위키리크스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은 것만은 확실하다.
'내부 고발'이라는 무기를.
위키리크스는 매닝이 제공한 75만여 건의 기밀문서 외에도
100만여 건이 넘는 기밀문서들을 보유하고 있다.
위키리크스는 자신들에게 정보를 제공할 각국 정보원들의
익명성을 위해 최고수준의 암호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덕분에 정보원들은 고발자료를 손쉽게 클릭 한 번으로 위키리크스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정보원의 익명성 처리와 자유로운 접근 때문에 자료의 투명성이 완전할 수 없긴 하다.)
그런데 위키리크스는 이처럼 어마어마한 수의 기밀문서들을 모두 내부고발자들로부터 입수한 것일까?
사실 이와 관련해 어쩌면 위키리크스의 존재보다 더 무서울지도 모르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위키리크스 사이트가 정식으로 오픈하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100만 건에 달하는 기밀문서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밀문서들은 대부분 중국 해커들의 수확물을 몰래 가로챈 것이기도 하다.
인터넷의 깊고 깊은 심연에서 중국 해커들은 '토르(The Onion Router)'
네트워크를 이용해 수십만 개의 기밀파일들을 훔쳐내고 있었다.
토르는 쉽게 말해 현재 최고수준의 익명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으로
사용자는 토르를 통해 접속하면 아주 많은 수의 서버들을 우회하며
정보 요청을 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자신의 흔적을 거의 완벽하게 은폐할 수 있다.
이처럼 토르의 모든 서버는 오직 자기 옆의 서버 정체만을 파악할 수 있으며
컴퓨터들 간의 자료 교환 역시 모두 암호화되어 이루어진다.
토르 서버의 시스템 관리자조차 이 때문에 자료의 출처 및 수취인을 알아낼 수 없는데
이러한 연유로 인터넷 검열이 심한데다 해커 숫자가 월등한 중국에서는 특히 토르가 인기다.
한편 위키리크스의 활동가 중 한 명이 2007년 1월 6일 자신의 뜰채에 걸린 대어를 보고는 기뻐하는데
그 대어란 바로 중국과 다른 국가 정보기관들(주로 중국)이 기밀문서들을 빼낸 이른바 '중국 패키지'였다.
본래 토르는 시스템 관리자조차 사용자에 액세스가 불가능하지만, 토르 서버를 운영하는
운영자만은 해당 서버의 자료 내용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렇게 중국 패키지를 낚은 위키리크스는 네덜란드 현황, 미국의 연구기관 프리덤 하우스와
2005년까지의 아프가니스탄 상황, 인도 정부와 관련한 거의 모든 것, 여러 국가의 행정부처 및 대사관,
정당, 세계은행, 유엔 산하기관들, 중국 파룬궁 운동, 러시아 마피아의 자료, 파키스탄 외무부에서 이루어진
거의 모든 커뮤니케이션 내용과 같은 다양한 기밀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위키리크스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당시 우리 수중에 들어온 자료들의 10분의 1도
그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조차 모른다.
우리는 자료 양이 테라바이트를 넘어서면서 아예 저장을 포기했다."
++++++++++++++++++++++++++++++++++++++++++++++++++++++++++++++++++++++++++++++++++++++++++++++++++++++++++++++++++++++++++
* 참조문헌: Staatsfeind Wikileaks
The Guardian
출처- [이상한 옴니버스] http://blog.naver.com/medeiason/120188523026
[출처] [이상한 옴니버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작성자 메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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