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간이 날 때 아주 간혹 디아블로를 하는 편이다.
그날도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한 시간 보다 일찍 도착해 혼자 롤하는 초등학생 틈에서 고독히 혼자 성역의 영웅을 자처하고 디아블로를
하고 있었다. 30분쯤 지났을 때 친구 녀석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냐?"
"피시방. 디아하고 있다. 근처 오면 전화해. 바로 나갈게."
"너 나가지 말고 있어. 나도 같이하자."
내 주변에 피시방 사장님과 지금은 성역의 영웅에서 제대한 뒤 롤의 트롤로 재입대한 여직원을 제외하고 디아블로를 하는 사람이 있다니
감격스러웠다. 잠시 후 친구 녀석은 내 옆자리 초딩에게 1천 원을 줄 테니 자리를 바꿔달라 흥정하고 있었다. 당연히 초딩은 "콜!"을 외쳤고
녀석은 내 옆에 앉아 배틀넷에 접속하고 있었다.
"야.. 그런데 너 히오스 해봤어?"
"아니. 디아 할 시간도 없는데 다른 게임을 내가 언제 하냐.."
"하.. 이 자식.. 게임계의 레스토랑스를 안 해 봤단 말이야?"
"레스토랑스? 그게 무슨 뜻이야?"
"저기 초딩들이 하는 롤이 분식집이라면 히오스는 고급 레스토랑 같다고 게이머들이 붙여준 호칭이야. 캐릭터 하나하나가 게임계의
미슐랭 스타 쉐프 급이지."
"그럼 내가 하는 디아블로는 게이머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평가인데?"
"흠.. 디아블로는 뭐.. 남산 돈가스 수준 정도라고나 할까. 일단 스케일은 크니까."
녀석의 말을 듣고 그래도 내가 분식집이 아닌 남산 돈가스 수준의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니 뿌듯하기도 했다. 그리고 녀석은 내게 고급 레스토랑
입장을 계속 권유했다. 내가 해본 적이 없다, 예전에 롤 한번 하다가 초딩한테 살아온 시간을 참회하게 하는 욕설을 들은 뒤 게이머끼리 대전하는
게임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녀석이 이 게임은 레벨이 중요한 게 아니고 스타크래프트 컴퓨터와 대전하듯 부담없이 컴퓨터와 싸우는
게임이라는 말에 용기 내 남산 돈가스를 접속할 때 힐끔힐끔 바라보던 고급 레스토랑에 입장하기로 했다.
많은 캐릭터 아니 미슐랭 스타 쉐프들이 자신을 선택해 달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각종 쉐프들을 바라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을 때
친구 녀석은 내게
"내가 캐릭터 하나 추천해 줄까? 초보자용으로?"
"응. 이왕이면 타격감 좋은 애로.."
"타격감 하면 아바투르지.. 히오스 아니 모든 게임에서 아바투르만큼의 타격감을 가진 캐릭터는 없어."
녀석이 골라 준 아바투르를 바라봤다. 웬 큰 굼벵이가 화면에 크게 떠 있었다. 아니 예전에 봤던 스타십 트루퍼스의 뇌를 쪽쪽 빨아먹던
인간의 적! 그 자식 같았다.
"야! 무슨 이런 굼벵이가 타격감이 좋아!"
"하.. 초보가 말이 많네. 아바투르의 장점이 모든 캐릭터를 한 번씩 경험해볼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생긴 것만 굼벵이지 히오스 최고의 공속을
자랑한다니까. 적들도 딱 봐서 방심하고 약하게 생겨서 덤볐다가 공속으로 눕혀버려..전투 굼벵이야! 전투 굼벵이"
이것저것 달린 게 많은 아바투르를 보며 녀석의 말이 뭔가 일리가 있었다. 그런데 캐릭터에 '어려움'이라는 단어가 있어 녀석에게 또 물어봤다.
"이거 어려움인데?"
"그건 상대방이 널 죽이기 어렵다는 소리야. 그러니까 초보용이지. 그리고 난 고수니까 쉬움 캐릭터로 할게."
녀석이 고른 캐릭터는 지금 이름이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는데 스타의 마린 같이 생긴 캐릭터였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파티를 맺은 뒤 인공지능
대전을 신청했다. 5초도 되지 않아 다른 게이머들이 참여했고 로딩하는 동안 친구는 "컴퓨터랑 대전하는 거니까 긴장할 필요 없어. 그리고
레스토랑의 손님들은 매너 있고 친절해서 초보자라고 해서 함부로 욕하지 않아." 라며 나의 긴장을 달래줬다.
드디어 게임이 시작됐다. 다들 입구로 달려가길래 나도 그들을 기어서 따라갔다.
"야. 남들은 다 말 타고, 돼지 타고 탈 것 타는데 나는 왜 기어 다녀?"
"아바투르 캐릭이 하도 넘사벽 캐릭터라서 일종의 핸디캡이라고 생각하면 돼."
얼마나 캐릭터가 좋으면 이런 핸디캡까지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기술은 뭐 찍어? 라고 물었을 때 녀석은 대수롭지 않게
'아무거나 찍어.'라고 했지만 나는 기술 창을 정독한 뒤 오래 살고 싶은 마음에 생존본능이라는 기술을 찍었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다들 탈것을 타고 질주할 때 나는 브레이크 댄스를 추며 이집트 사막에 온 듯한 곳의 경치를 감상하며
유유히 꿈틀꿈틀 기어갔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전우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갔다. 상대편에 평소 익숙한 디아블로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오!! 디아블로!! 여기서도 내 손에 죽을 운명이구나 흐흐흐!"
디아블로를 향해 꿈틀꿈틀 기어갔다.
"받아라! 굼벵이 펀치"
헉! 굼벵이 핵펀치를 날리기도 전에 맞아 죽었다.
빌어먹을 굼벵이 새끼 전장까지 기어올 때는 비둘기호 속도로 가더니 죽을 때는 KTX 속도로 죽었다.
그러면서도 역시 디아블로는 최종 보스인데 애송이 1렙 굼벵이 주제 경솔하게 덤볐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
"아바님 뭐 하시는 게에요?"
"아바 뭐 임?"
이라는 채팅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바가 뭐야? 가수야?"
"아니. 너."
그 뒤에도 "아바님 할 줄 모르는 거에요?", "아바 저 %&^*%*$ 트롤 아님?" 이러는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야. 왜 나를 욕해!"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의 미소를 보고 "아차.. 내가 저 자식에게 당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채팅창에 "죄송합니다. 초보입니다." 라고 적었을 때 잠시 &$%& 등의 해석이 불가능한 기호를 남발하던 손님도 존댓말로 나의 꿈틀이
돌진을 바라보던 손님도 매너 있는 레스토랑의 신사로 돌변하여 "아! 초보셨군요!" 하면서 친절하게 "그럼 본진에서 파킹하시고 가만히 독성 둥지
나 이곳저곳 깔고 계세요." 라고 했다.
나는 쿨타임이 올 때마다 열심히 이곳저곳 독성 둥지를 깔았고 친절한 손님 (일리단을 하셨던 분)에게 아주 잘하고 있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리고 밟으면 폭발하는 강력한 독성둥지의 맹활약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끝까지 친절했던 일리단 님은 내게
"너흰 아직 준비가 안 됐다. 아니 아바님 아바는 가장 어려운 캐릭이니 쉬움이라고 표시되는 캐릭터로 하세요." 라고 친절한 안내를
해주고 떠났다.
그리고 나는 지금 컴퓨터를 꺼버리고 도망간 친구 녀석을 잡기 위해 출구를 향해 꿈틀꿈틀 기어가고 있다.
잡히면 입에 독성포자를 쑤셔 넣어 버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