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 시절에 너를 또 만나서 사랑할 수 있을까?
흐르는 그 세월에 나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
애절한 가사와 서정적인 멜로디가 큰 감동을 주는 나미의 노래
'슬픈 인연'의 일부분이다.
이 곡은 지금 우리 세대도 들으면 알 정도로 시대를 뛰어넘어 꾸준히
리퀘스트 된 불후의 명곡이다.
그런데 이 곡이 표절곡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필자는 지금 불확실한 표절 의혹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얼마 전,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슬픈 인연’의 저작권 정보가 김명곤 작곡에서
‘Uzaki Ryudo’라는 일본인 작곡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는 대한민국 유일의 음악 저작권 신탁 기관으로,
개인 저작자로부터 음악 저작권을 신탁 받아 저작권료를 관리하고
이를 분배하는 기관이다. 이하 음저협)
최근 변경된 '슬픈 인연'의 저작권 정보
한국 대중음악의 표절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특정 국내 가요에 대해 표절 논란을 제기하고 있는 네티즌은 수도 없이 많으며,
그냥 듣기에도 유사한 것들도 많다.
하지만 법적 공방은 2004년 ‘너에게 쓰는 편지’ 이후로 뚝 끊겼다. 표절은 친고죄가
성립 되기 때문에, 보통 외국곡을 표절한다. 외국인이 자신의 노래를 알 확률도 적고,
알더라도 소송까지 걸 확률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표절임이 행여 걸리더라도 자신은 법적으로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위의 ‘슬픈 인연’처럼, 조용히 원작자와 합의 하에 저작권 정보를 수정해서 벌어놓은
저작권료도 돌려주고 저작권도 넘겨주면 그만이다.
그렇게 하겠다는데 굳이 원작자가 국경을 넘어 소송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형벌의 차원에서 실제 피해금액보다 더 많이
손해배상금액을 책정하는 것)도 없기 때문에 설사 원작자가 승소하더라도 큰 이득도 없다.
‘표절에 대한 사후협의’는, 쉽게 말해 협의가 되기 전까지는 표절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제재는 전혀 없다.
법적인 제재도 없지만, 대중들조차 전혀 알 수가 없어 법 외적인 처벌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음저협은 웹사이트에 저작권 정보를 검색하는 코너를 개설해놓았지만,
저작권 정보가 바뀐 내역은 전혀 조회할 수가 없다. 누군가 어떤 곡이 표절이었는지
알고 싶다면, 말 그대로 스토킹하듯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수많은 국내 곡들의
저작권 정보를 검색해야 한다. 하지만 애초에 음저협 등록을 안하는 경우도 있다.
앨범 발매할 때는 앨범 부클릿에는 직접 작곡한 것처럼 써놓고 음저협에 등록을
안하다가, 앨범 활동이 끝나갈 때쯤 원작자로 음저협에 등록하는 것이다.
등록일자도 안 나오기 때문에 이 역시도 매일 검색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음저협 저작권 정보는 날짜를 제공하는데, 그것은 해당 곡이 수록된 앨범이 발표된
날짜이지 저작권 등록한 일자가 아니다).
박진영 역시 표절 논란에 자유롭지 못한 프로듀서이다.
GOD의 히트곡인 ‘어머님께’도 ‘한때는’ 표절이었다.
직배사와 표절 논란이 일자 원래 작곡가로 알려진 박진영은 원작자와 합의하여
저작권도 100% 넘겨주고, 이미 벌어놓은 저작권료도 원곡 지분을 가진 직배사에
100% 돌려줬다.
1집의 ‘관찰’도 마찬가지 전철을 밟았다. 물론 저작권료랑 저작권은
돌려줘야 했지만 ‘어머님께’와 ‘관찰’ 덕분에 GOD는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르고 GOD 1집을 구매한 사람들은 앨범 부클릿에 적힌
‘박진영 작곡’이라는 글씨만 보고 박진영이라는 작곡가에 대해 감탄한다.
표절한 것이 설사 걸리더라도 득이 되는 것이다. 싸이의 ‘새’, 하늘의 ‘웃기네’ 등도
이런 절차를 밟았다.
이들도 도둑질한 곡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사후협의를 하여 상대방이 소송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법적인 처벌도 없었다.
‘어머님께’의 경우 박진영의 역할도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상대방이 소송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사후협의에 있어서 박진영은 을의 위치가 된다.
이런 연유로 거의 모든 사후협의는 협의 전까지 벌어들인 저작권료를 모두
돌려주고, 저작권 지분의 70%~100% 정도를 돌려준다.
그래서 공동작곡도 아니고 아예 원작자로 작곡가가 바뀌어 등록되는 것이다.
이것이 불만이라고 느낀 몇몇 작곡가들에 의해 저작권 지분에 관해 사전에
협의를 보고 음원을 정당하게 가져다 쓰는 경우도 적게나마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2003년 박진영이 작곡하고 비가 노래한 ‘태양을 피하는 방법’은,
‘shape of my heart’의 기타 리프를 따오면서 사전에 수익 배분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창작자로서의 박진영의 지분이 크게 인정받아
현재 태양을 피하는 방법은 박진영 작곡으로 등록이 되어 있다.
하지만 사후협의가 가진 어떤 매력 때문에 최근까지도 이런
‘사후협의’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후협의는 사후협의가 있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작곡가 관련 정보를 속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만약 본인 기획사에 소속된 가수를, 작곡도 잘하는
싱어송라이터로 홍보하고 싶은데 그가 가진 작곡 실력이 마음에 걸린다고 치자.
그럴 때 ‘사후협의 표절’은 아주 매력적이다. 대중적인 성공도 보장하고 법적인
처벌도 없으면서, 잠깐은 수익이 없더라도 ‘싱어송라이터’라는 홍보를 통해
장기적 관점에서 해당 가수의 브랜드파워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YG에 소속된 빅뱅은 이런 식의 사후협의를 통한 마케팅을 줄곧 사용했다.
마룬5의 히트송 ‘This love’를 가사만 바꿔 그대로 가져온 빅뱅의 ‘This love’는
앨범에 지드래곤 작곡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 활동이 끝날 무렵에 마룬5 원곡의 원작자인 James와 Adam이 작곡한 것으로
음저협에 등록해놓았다. 마찬가지로 빅뱅의 ‘오아오’도 지드래곤과 페리가
공동작곡한 것으로 앨범에 표시만 해놓고 앨범 내에서 유일하게 음저협 등록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앨범 활동이 끝날 무렵에 원작자 Catania가 작곡한 것으로
슬쩍 등록해놓았다. 제때 등록하였지만 다른 정보로 등록된 곡도 있다.
‘This love’와 같은 앨범에 수록된 ‘Ma girl’은 지드래곤이 작사한 것으로
되어있는 데, 음저협에서는 Israel cruz가 작사에 대한 지분까지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등록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모두 음저협에 등록은 올바르게 한 셈이지만,
앨범 부클릿에는 여전히 지드래곤 작곡으로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앨범을 발표하고 한참 뒤에 저작권 정보를 수정하여 음저협에 등록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저작권 정보를 앨범에 허위 기재한 셈이 된 것이다.
이는 분명한 저작권 침해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처벌도, 아무런 논란도 없다.
사람들은 앨범에 적힌 대로 위의 곡들이 지드래곤이 작곡한 곡으로 알고,
그의 작곡 능력에 놀라워할 것이다. YG가 만들고자 했던 ‘실력파 아이돌’
이미지는 이렇게 굳혀진다.
아직도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음저협의 저작권 정보가 수정 등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빅뱅의 ‘오아오’와 ‘This love’의 노래방 등록 저작권 정보는
여전히 지드래곤 작곡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음저협에서 관리하는 저작권료는
모두 외국의 원작자한테 돌아가지만, 노래방에서 해당 노래를 부를 경우에는
지드래곤한테 돈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MBC 토크쇼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저작권 지분의 70%를 원작자에게 돌려줬다고 이야기한 이승철의 ‘소리쳐’도,
음저협에서는 당연히 원작자인 Reid John과 Elofsson 작곡으로 수정되었지만
노래방에서는 여전히 홍진영 작곡이다.
5살짜리 아이가 손담비의 ‘미쳤어’를 따라 부르는 것도 저작권 위반이 되는 저작권 천국이지만,
정작 창작자들의 음악 저작권 관리 실태는 말 그대로 엉망진창인 것이다.
표절을 대놓고 해도 법적인 문제가 없고,
당국의 저작권 관리도 소홀하니, 표절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다.
앨범 부클릿에 기록된 저작권 정보와, 음저협에 등록된 정보,
그리고 노래방에 등록된 저작권 정보가 모두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표절논란을 겪은 '소리쳐'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중들의 표절상식이나 표절에 대한 비판의식도 한참 뒤떨어져 있다.
표절과 샘플링을 가르는 기준은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전에 수익 배분 협의를
했는지의 문제이다.
샘플링이 되기 위해선 기창작된 녹음물의 일부를
가져오기 전에 원작자의 허가를 받고 저작권 수익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합의해야 한다. 기창작된 녹음물의 일부를 무단으로 가져와 자신의 음악에
사용한다면 그것은 샘플링이 아니라 표절이다.
사후에 협의한다 하더라도
협의 전까지의 무단 도용은 표절이다. 하지만 표절은 8마디 이상 베껴야 표절이고,
샘플링은 조금만(?) 베끼는 것이 샘플링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표절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많고, 표절했다는 사실을 알아도
별다른 의식 없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도 많다.
YG엔터테인먼트사 대표이사 양현석
대중의식이 낙후되어 있으니 창작자들이 대중을 우습게 보는 것은 당연하다.
부클릿과 음저협 작곡 정보로 장난치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여전히 이야기 거리는
많다.
올해 8월에는 지드래곤의 솔로앨범 수록곡 중 일부를 30초만 먼저
공개한 것이 몇몇 외국곡과 표절논란이 일어 인터넷을 크게 달군 적이 있다.
표절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필자를 황당하게 한 것은 빅뱅의 소속사인
YG엔터테인먼트사의 태도이다.
YG는 표절 논란 당시 ‘30초만 공개 했는데 무슨 표절 논란’이냐며
‘원곡을 듣고 이야기하라’고 변호했다.
집을 몽땅 털어야만 도둑질이고 1번부터 30번까지 모두 베껴야 부정행위라는
주장이다. 대중을 눈 뜬 장님 취급하니 이런 발언도 쉽게 나온다.
또, 최근에는 ‘빅뱅의 오아오, This love가 저작권 정보를 수정하여
부당이익을 취한 것이 아니냐’라는 비판 기사가 나기도 했다.
YG엔터테인먼트는 여기에 대해 ‘음저협에 처음 등록할 때부터 원작자 이름으로
등록했다’라고 대응하였다.
영리한 변명이다. 앞선 문단에서 밝혔듯이 이들이
음저협에 처음 등록할 때부터 원작자 이름으로 등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음저협 등록 시기가 앨범이 발표되고 나서 3~4개월 후
였다는 것, 그리고 앨범 부클릿에 표시된 정보와 다르게 음저협에 등록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3~4개월의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은 이미 지드래곤 작곡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것은 음저협 정보를 매일 검색하지 않는
대부분의 대중들은 알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노래방 화면에서는 아직까지도 지드래곤 작곡으로 표시된다.
표절에 익숙한 창작자들은 이런 식의 교묘한 물타기로 대중의 눈과 귀를 가리고,
표절문제의 공론화를 막는다.
결국 대한민국 가요계의 만성적인 표절 문제는,
창작자들의 도덕적 해이는 물론이고 저작권 관리의 문제와
대중들의 의식 부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미 표절을 일삼는 몇몇 창작자들에게 자발적인 각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점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변화가 시작되어야 할 쪽은 대중들이다. 대중들의 비판의식이
향상되어 ‘한번 표절하면 끝이다’라는 의식을 심어줄 수 있다면 표절도 방지할 수
있고, 부실한 제도를 고쳐나가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특히 제도적인 면에서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의 도입이 절실하다.
다행히 최근에는 지드래곤 표절 논란을 겪으며 가요계의 사후협의 관행 등의
문제가 언론을 통해 종종 등장하고 있고,
이를 통해 대중들의 표절 상식이나 비판의식도 많이 신장되었다.
변화의 초석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출처:블로그와이드(ba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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