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요약
1895년, 배재학당 입학 -> 배재학당은 감리교 선교사가 설립한 초등교육기관으로 이때부터 이승만은 기독교 신자가 됨.
1906년, 민영환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이때 민영환으로 부터 300달러의 경비를 지원받음), 원래는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러 간 것이나 원래 목적에는 실패하고 그 돈으로 유학 하기로 함;;. -> 프리스턴 대학교 입학
1908년, 덴버의 감리교회에서 주선한 '한인애국동지회'에 참석. -> 이때부터 본격적인 독립 운동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함.
1910년, 프리스턴 대학교 총장 '우드로우 윌슨'으로 부터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음. 이때 논문 제목이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었음. -> 그의 논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승만의 독립 운동 방식은 인맥과 외교 전술을 이용한 소극적 투쟁 방식.
우드로우 윌슨은 나중에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세계사에서 유명한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하는 인물. 나중에 이승만이 임시 정부 대통령으로 선정될 수 있었던 데에는 미국 대통령 윌슨으로 부터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점이 주된 이유로 작용 -> 명불허전 조선의 인맥 문화의 폐해.
1910년, YMCA 청년 간부 활동, 그와 동시에 당시 최대의 독립 운동 단체이던 '국민회' 가입.
1913년, 미국 감리교회가 설립한 '한인기숙학원' 원장 재직
소극적 독립 운동 전개 -> 박용만 무장 독립 투쟁 반대, 장인환-전명운 의사 변호 운동 반대(이때 반대한 이유가 '예수교인으로서 살인자들의 변호를 원치 않는다'였음), 박용만이 일본 '출운호' 폭파시도 혐의로 하와이 법정에 서게 되었을때 박용만이 이끄는 국민군단 비난.
이후 최대 독립운동 단체인'국민회' 탈퇴, -> 한인 감리교 신자들로 구성된 '대한인동지회' 설립하여 자기 지지 기반으로 만듬.
1919년 4월 14일, 서재필 주재로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서 한국이 독립하면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발언.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해 의거를 일으켰을 때,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윤봉길의 의거를 비난.
"이런(의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선동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
- 이승만 자서전 中 -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여 대통령 당선(이승만: 180표, 김구:13표) -> 이승만이 제헌국회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김구가 남북한 공동 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뒤늦게 선거 운동에 뛰어든 점이 작용, 또 역시 미국 대통령(윌슨)과 인맥이 있고 임시 정부의 수반을 지냈다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
1949년, 제헌국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친일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조직한 반민특위 해산.
1949년, 보도연맹원 색출 --> 각 경찰서에 할당량 명령을 내림.
그 후 6.25 터지자 제 2의 히틀러가 되어 남한 시민 70만~130만 학살. -> 외침 중에 자국민을 학살하는 대통령??
1950년 부터 1953년까지 자행된 보도연맹 학살로 70만에서 130만명의 남한 시민들이 학살당함.
보도연맹이란 한때 공산당 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명부를 작성하여 이들을 전향시킨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건데, 이승만이 1948년 각 경찰서에 '할당량' 명령을 내린다.
정부의 할당량 명령에 의해 경찰들은 무고한 시민들의 이름을 작성하였고,
그렇게 실제로는 공산당 활동을 하지 않았던 시민들도 고무신과, 비료, 쌀 준다는 말에 넘어가 명부에 자기 이름을 써 넣었는데, 이때 경찰의 유혹에 넘어가 허위 등록한 사람들이 학살당한 보도연맹원의 대부분이라고 함.
그럼 이승만이 보도연맹원을 학살한 이유는?
아직도 저마다 주장은 다르지만, 6.25가 터지자 이들이 공산당과 접촉할 것을 우려하여 전원 학살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 함. 그러나 필자는 다르게 본다. 할당량 명령을 내린 것도 그렇고 남한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장기 독재 집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보여짐.
특히 보도연맹원의 피해는 경상도 지역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는 6.25가 터지고 전선이 낙동강으로 밀리면서 적과의 내통을 우려한 정부가 경상도 각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뒤짐. 지금도 거창, 김해, 안동, 성주, 대구 등 경상도 각지에서는 그때 희생당한 유골들이 발굴되어진다고 함..
이때 박정희라도 죽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