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그가 없었다면?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가정법이다.
지난해 잉글랜드에 입성한 태극전사 프레미어리거 1.2호 박지성(25·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영표(29·토튼햄)가 부상과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그라운드 나들이가 뜸해진 와중에 설기현(27·레딩)은 2006년 늦여름부터 홀로 ‘축구 종가’ 잉글랜드에 태극 바람을 일으키며 허전하기만 했던 축구팬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설기현에게 2006년은 개인적으로도 ‘롤러코스터’를 타듯 했다. 전 소속 팀인 챔피언십(2부)의 울버햄프턴에서 부진했고.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주전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 등으로 위상이 급전직하했지만 8월부터 프레미어리그에 첫 승격된 레딩에 둥지를 틀더니 유쾌한 반등점을 찍었다. 그리고 탄탄대로를 달리듯. 끊임없이 질주는 계속됐다.
설기현을 30일 밤(한국시간) 리그 선두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빅뱅을 앞두고 런던의 패션 쇼핑거리 카나비 스트리트의 한식당에서 만났다. 부인 윤미씨와 아들 인웅. 딸 여진을 대동하고 온 그는 식사보다는 식당을 활보하는 아이들을 챙기느라 분주한 발놀림을 놀렸지만 가족과 함께 하는 게 마냥 즐거운 듯 했다.
틈틈이 오간 대화에서는 그만의 ‘맛’(?)이 느껴졌다. 화려함 대신 소박함이 느껴지는 그답게. ‘정해년’ 2007년을 앞두고도 으레 담담했다. ‘기사 밸류에서 가끔씩 박지성에게 밀릴 때 서운하지 않냐?’고 묻자 “박지성과 비교될 때. ‘나도 저렇게 뜨고싶다’는 생각이 안 든다. 나는 그런 거랑 안 어울린다”며 무덤덤하게 반응한다.
“벨기에서 유럽진출의 기반을 닦을 때 네덜란드어. 영어. 프랑스어로 줄기차게 설명하는 감독의 말을 못알아 들어 답답했다”며 고생담을 풀어낼 때는 힘들었던 순간이 오늘의 그를 있게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은 거창하거나 화려하지 않았지만 ‘침묵’과 ‘절제’속에 내일에 대한 ‘확신’이 느껴졌다.
진화하는 설기현. 아니 내년에도 더욱 진화할 것이라는 확신은 그가 도전해온 고진감래의 도전 이야기 속에서 더욱 크게 와닿았다.
#겸손한 기현씨~ 그는 평범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정작 설기현 본인은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 만한 자신의 현 위치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아직 그의 매직 드리블과 번개슛이 매주 전세계 160개국으로 송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아직도 겸손하고. 순진한 운동선수일 뿐이었다. 식사를 함께 하며 바라본 그는 웨인 루니와 티에리 앙리와 같은 그라운드에서 볼을 다투는 프레미어리거가 아닌. 한 여인의 남편이었고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식사 내내 테이블 주위를 정신 없이 뛰어다니는 두 아이를 잡아끌어 일일이 밥을 떠먹이는. 영락없는 보통의 한국 아버지였다. 대화의 시작도 당연히 아이들 걱정으로 시작됐다.
“영국은 정말 어린아이를 보살피기 힘들다. 열이 펄펄 나고 콧물이 멈추지 않아 병원에 데리고 가면 2~3시간씩 기다려야 하고. 또 힘들게 만난 의사의 처방은 ‘집에 가서 잘 보살펴라’가 전부다. 약은 애한테 안 좋다고 처방전도 안 써주는데. 부모된 입장에서는 정말 걱정스러울 때가 많다.” (소아일 경우. 한국과 달리 영국의 병원에서는 처방전 타오기가 무척 힘들다)
애들 엄마는 벌써부터 애들 교육 문제에 대한 걱정이다. “요즘은 한국에 있는 초등학생들도 영어를 다 잘 한다고 하더라. 애들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이 많다. 여기서 있다가 어정쩡한 나이에 한국 들어가면 우리 아이들은 다른 애들보다 영어 하나만 잘 하고. 국어나 역사같은 과목들에서는 뒤처질 것이 뻔하지 않은가?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스럽다”라고 말했다. 애들 교육 문제 고민은 한국에서나 영국에서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래도 자녀들의 장래 문제는 전적으로 아이에게 맡기겠다는 생각이다. “아이의 재능이 축구가 될지 다른 것이 될지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그저 그 재능이 어떠한 분야가 되든. 우리 아이들에게 재능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만 돼도 그것에 감사하고 싶다”라고 나름대로의 교육관을 밝혔다.
#“영국요? 그래도 한국이 낫죠?”
영국 생활의 불편함에 대해 서로의 경험을 털어놓던 중 설기현은 문득 이런 얘기를 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에 왔을 때 맛있는 먹을거리들이 많아서 너무 좋았다. 난 감자나 고구마 같은 거 이제 싫다“라고 말하며 웃음지었다. 강원도 출신인 그에게는 어린 시절 질리게 먹었던 감자가 미울 따름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살고 있는 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 감자가 들어간 ‘피시 앤 칩스’라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영어 한 마디 못한 채 2000년 7월 벨기에로 날아온 그는 알 수 없는 감독과 동료들의 언어속에서 많은 고생을 겪어야 했다.
“벨기에 시절 라커룸에서 감독이 작전 지시를 할 때는 정말 난감했다. 벨기에인들은 기본적으로 네덜란드어. 불어. 영어를 다 할 줄 안다. 감독이 우선 작전을 네덜란드어로 먼저 설명한 다음. 같은 내용을 불어. 영어로 차례차례 3번 반복했다. 같은 작전을 항상 세 번씩 꼬박꼬박 들어야 했는데. 문제는 어떤 언어로 들어도 난 알아듣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흐른 지금. 그는 영국 현지 기자들과 영어 인터뷰를 능숙하게 해내고 있다. 영국 기자들은 질문 하나에 질문의 배경. 현재 상황. 자신의 주장 등을 모두 집어넣기 때문에 질문 하나의 길이가 굉장히 길고. 따라서 그걸 알아듣는다는 것은 대단한 영어실력이 아닐 수 없다.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커가는 두 아이 뒷바라지 때문에 부부는 영국 생활 3년차인 지금까지 그 흔한 오페라나 뮤지컬 한번 보러 간 적이 없단다. “런던아이(수레바퀴 모양의 관람차)가 유명하다고 해서 어렵게 시간을 내서 한번 가봤었다. 템즈강가를 한참 걷고 있는데. 런던아이가 강 건너에 있는 게 아닌가? 시간이 없어서 결국 못 타고 그냥 돌아왔다”고 하며 어이없다는 듯이 웃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는 뛰어다니는 인웅이를 붙잡아 밥 한 술 더 떠먹이려고 애를 썼다.
유럽생활 7년차지만. 고국에 대한 그리움도 잊지 못했다.
“물론 나오고 싶어도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못 나오고 있는 친구들도 많고. 내가 이 자리에 서있을 수 있기까지 많은 운이 따랐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을 떠나 산 지가 오래 된지라 이젠 한국에서 사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가끔씩 들기도 한다.”
울버햄프턴에 살던 시절. 한국 식당이 있는 뉴 몰든을 가기 위해 그는 두 시간 이상을 차로 달려야만 했다.
#레딩은 나의 운명
웨스트햄에서 해고된 지 얼마 안 되서 다시 최하위인 찰턴의 시즌 세 번째 감독으로 부임한 알란 파듀가 이야깃거리로 나왔을 때. 그는 지금 자신의 성공가도를 같이 달리고 있는 레딩과의 특별한 인연도 들려주었다.
“04~05시즌 파듀 감독의 웨스트햄과 지금의 레딩이 프레미어리그 승격을 다투는 플레이오프 진출의 마지막 티켓(리그 6위) 한 장을 놓고 마지막까지 싸웠었다. 그런데 레딩이 이미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된 상태였던 우리(울버햄프턴)에게 지는 바람에 웨스트햄에 6위 자리를 내주었고. 결국 웨스트햄이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프레미어리그로 승격했었다.”
#“난 스타처럼 뜨고 싶지 않다. 난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다.”
26일 자정에 열린 첼시전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그는 동료들이 거둔 값진 무승부를 대단히 자랑스러워했다. 주말 맨유전에 대한 출전 예상을 조심스럽게 묻자 “첼시전에 선발로 나온 친구들이 너무 잘 해줘서 나 못 나올 것 같아요”라고 겸손과 너스레를 섞어 말했다.
식당에서 나와 차로 걸어가면서 ‘그렇게 열심히 뛰었어도 복귀전에서 단 몇 분 밖에 안 뛴 박지성의 기사가 톱 뉴스더라’라고 넌지시 물었더니 “영국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는 지성이와 비교되거나. ‘스타’로 뜨는 다른 친구들을 봐도 난 질투 나거나. ‘나도 한번쯤 저렇게 뜨고 싶다’라는 생각이 별로 안 든다. 원래부터 난 그런 거랑 잘 안 어울리는 것 같다. 난 그냥 내가 좋아하는 축구 계속 하고. 가족들이 행복하면 그만이다”라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단순히 그를 ‘겸손하고 욕심 없는’ 사람으로 보이게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찌 보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로 인해 가족들이 행복해지는 것이야말로. 하루하루를 빠듯하게 살아가며 자신들을 잃어가고 있는 한국인들이 진정으로 꿈꾸는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런던 | 홍재민통신원
기현이형 ! 열심히 해줘 ! 한국에서 항상 응원하는 사람들 잊지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