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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humorbest_534184
    작성자 : ㅇΩ
    추천 : 36
    조회수 : 2939
    IP : 1.231.***.191
    댓글 : 0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2/09/25 22:43:09
    원글작성시간 : 2012/09/23 00:40:50
    http://todayhumor.com/?humorbest_534184 모바일
    우리는 사랑한 적이 없다.

    오늘 기분이 좋아서 술을 한 잔 했다.

    사랑.. 그 까짓 게 뭐라고 마음 아파할까. 
    난 사랑의 존속을 믿지 않는다. 남녀 간에도 부모 자식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난 회의적이다. 
    사랑은 결국 호르몬과 신경 전달물질의 장난이지. 
    가슴 뛰던 설레임과 갖고 싶어 미칠 것 같던 욕심도 다 수그러들고, 
    결국 정과 의리로 남는 그것도 사랑의 한 형태라면 사랑이겠지만.
    너는 너일 뿐인데 밀고 당기기에 의해 더 좋아지고 싫어지는 것도 무슨 감정 갖다 사칙연산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네가 날 밀어냈기 때문에 내가 더 매달리게 되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싸구려 감정이겠지. 
    이걸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내 엄마의 사랑이 아깝다.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고 너도 나에게 많은 것을 바라진 않았지만, 우리는 모든 부분에서 달랐다.

    나는 너와 손 잡고 걷기만 해도 좋았는데 너는 걷는 것을 싫어했다. 
    겨우 15분 걷고도 다리가 아프다며 짜증을 냈지. 
    이해한다. 당신이란 사람은 얼마나 여유가 없길래 걷는다는 행위가 그저 목적지에 가기 위한 수단일까. 
    나는 그런 네가 마음 아팠다. 그래서 짜증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뒤로 우린 10분 이상의 거리는 택시를 탔다. 우리는 걷는 법이 다르니까. 

    너는 항상 보고싶어, 사랑해 따위의 말을 쉽게도 했다. 
    난 그런 말에 네가 듣고 싶어 하는 대로 대답해 줄 수가 없어서 미안했다.
    사랑한다고 말해버리는 순간, 널 평생 사랑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이 들어서. 
    그래서 나는 솔직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쓰고 그림도 그렸다. 멋진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걸 보고 웃는 네 얼굴이 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종이를 자르고 덧대어 편지를 열면 편지 위에 나무가 서게끔 만들었다. 
     생각보다 구조가 복잡해져서 몇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너는 그걸 읽고 쑥스러워하며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아마 내 편지는 다음 날 세탁기에서 나왔겠지? 그래도 네가 읽은 후니까 괜찮다.
    원래 덤벙대는 성격이니 이해한다. 내가 선물한 옷도 좋다고 매일 입고 다니더니 락스 뿌려서 망쳤잖아. 
     우리는 감정을 나누는 법이 다르니까. 

    너는 내가 영화를 함께 본 후에 그 영화의 잔상에 대해 얘기하는 걸 싫어했다. 
    재미 있었으면 됐지 뭘 더 얘기하냐 했다. 
    너는 내가 쓸데없는 상상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싫어했다.
     내가 '만약'이란 단어로 얘길 꺼내면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대답하거나 대충 대답했다.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했지만 너는 비 오는 날에는 약속을 취소할 정도로 끔찍해 했다. 
    이해한다. 너에게 영화란 시간을 보내는 방법 중 하나였고, 나에게 영화란 감정을 느끼는 통로였으니까. '
    만약'은 너에겐 낭비의 단어, 나에겐 마법의 단어였고, 비는 너에겐 불쾌한 습기와 젖은 바지, 나에겐 소염제였으니.

    우린 너무 자주 다퉜다.
    결정적인 원인은 우스웠지만 너에겐 우스운 문제가 아니었겠지. 
    내가 살이 쪄서 너는 불만이었다. 내가 아프고, 그것 때문에 수술을 하고, 
    2주인가 3주 쯤 되었을 때인가 넌 회복 중인 나에게 살은 빼고 있는 거냐 물었다. 
    살찐 사람들은 게으르며 자기 관리를 못하는 사람들이라 했다. 
    물론 나는 게을러서 살이 쪘다. 음식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다이어트를 하면 또 금방 빠지는 체질을 핑계로 나태해진 탓이다. 
    하지만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난 함부로 생김새로 다른 이를 평가할 자격도 안 된다. 
    그래도 이해했다. 너는 다른 사람을 배려해주는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으니까. 
    너는 나보다 착한 자식이었는데도 맞고 자랐고, 나는 못난 자식이었는데도 대화로 깨우치며 자랐다. 
    우리는 다르게 살아왔으니 생각하는 법도, 말하는 법도 다른 게 당연하지.

    마지막이던 그 순간에도 너는 내게 화를 냈다. 그래서 내가 말하게 됐다. 
    '우리 시간 좀 갖자. 나도 생각 좀 해볼테니 술 적당히 마시고 잘 지내고 있어.' 
    나도 술을 좋아하지만 너는 술을 너무 자주 마셔. 그래서 걱정이 됐다.

    며칠 뒤 새벽에 넌 술을 마시고 짧은 문자를 보내왔다.
     '아니? 먼 소리야? 헤어져ㅕ 안뇽'이라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 후로 우린 서로 연락하지 않게 됐다.
    일부러 대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난 그냥, 그 때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몰랐다.

    그렇게 된 지가 벌써 세 달이 다 돼간다. 
    나는 오늘 마트에서 두부와 파를 사오는데, 
    활짝 웃으며 미용실에 가는 중년에서 노년 사이의 아줌마를 봤다.
    아줌마가 웃어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여자는 예뻐지려면 그렇게 기분이 좋은가 보다.
    집에 와서 거울을 보니 내가 문득 예뻐보였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살 찌기 전의 내가 더 예뻤겠지만 지금의 나도 여전히 내 얼굴을 갖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았는데, 
    그게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래, 살 좀 쪘는데 그게 뭐. 나는 아직도 나잖아. 

    나는 아마 널 사랑한 적이 없었을 거다. 
    내가 네게 느낀 감정이 뭔지 알 순 없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널 사랑했다면 주저없이 사랑한다고 말했을 거다. 나는 그냥 그런 사람이니까.
    나는 널 알아가고 이해하려고 노력은 한다고 했는데, 끝까지 널 믿지 못했다. 

    너 또한 날 사랑한 적이 없었을 거다. 
    네 친구들 사이에서 한참 어리고 보기 좋은 여자친구가 말 없이 옆에서 웃어주며 너를 빛내주는 게 좋았을 뿐이지. 
    그래서 넌 내가 내 생각을 말하는 게 듣기 싫었을 테고, 살이 찐 게 그렇게도 화가 났을 거다. 
    내가 너라면 사랑하는 사람의 생각이 그 누구의 생각보다 궁금했을 테고, 
    그 사람이 살이 찌든 마르든 그게 건강에 염려될 정도가 아닌 이상 상관하지 않았을 거다. 
    애초에 넌 그다지 멋진 외모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난 네 옷장을 통째로 갖다 버리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 또한 너의 취향이기에 존중했다.
    너는 그것도 사랑이라고 믿고 있겠지만, 네가 듣기 싫어하는 내 생각은 그렇다. 
    그러므로 네가 그렇게 읊던 '사랑해'를 말해주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을 거다.

    여기까지가 내가 그 '생각할 시간'동안 생각한 내용인데, 오늘에서야 정리됐다.

    오늘 갑자기 내가 예뻐보이길래, 그래서 기분이 너무 좋아서 한 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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