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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military_53413
    작성자 : 낡은시계소리
    추천 : 14
    조회수 : 1478
    IP : 182.224.***.185
    댓글 : 35개
    등록시간 : 2015/02/25 14:01:44
    http://todayhumor.com/?military_53413 모바일
    투스타랑 술 마셨던 이야기
    문득, 갑자기 떠올라서 적어봅니다.

    장성군에 육군보병학교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했었어요.

    참고로 년도랑 어떤 보직이었는지는 적지 않겠습니다.

    육군 내에는 몇 가지 땡보가 있기 마련인데

    제가 근무했던 육군보병학교도 그런 곳이긴 했어요.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는 장교들은 최소 대위였고 소령이 더 많이 근무하는 곳이었죠. (적어도 제 시야가 닿는 범위 내에서는요.)

    학교장이 투스타였는데, 투스타를 모시는 당번병도 저랑 같은 생활관을 사용하는 선임이었구요.

    각각 부서들 별로 다 알고 지내는 본부중대 병사들이 있어서 서로 네트워크도 빨랐죠.

    예를 들어 주말에 학교장이 어디어디 막사를 둘러볼지도 모른다는 루머가 돌면

    언제 올지 기약도 모른 채 막사를 청소한다기 보다는

    중대장이, "야, 오늘 학교장님 방문하시냐?"

    당번병이, "....(머리 속 스케쥴을 뒤지다가) 안 오실겁니다."

    그럼 청소, 잡초뽑기, 화단정리, 복도 왁싱 등등 모조리 캔슬. 그냥 휴일 모드가 되는 마음 편한 나날들이 많았죠.

    그러다가 학교장이 제가 근무하는 부서의 공로를 치하한다는 뜻에서 같이 회식을 하게 되었어요.

    참여 인원은, 우리 부서(소령, 대위, 상사, 상병인 저, 후임)와 학교장, 수행원, 당번병 이정도였을 거에요. 기억은 가물가물하네요

    다같이 모여 앉아 소고기를 구어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술을 마시게 되었어요.

    소주랑 맥주가 나오더라구요.

    소맥이라든가 폭탄주라든가 그렇겐 안 부르고 [사랑과 우정의 잔]이라고 하시더라구요.


    아무튼, 학교장이 직접 제조한 [사랑과 우정의 잔]을 계급 순대로 마시게 되었죠.

    마시기 전에 그 자리에 일어서서 잔을 건네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말을 하게 되었구요.


    근데 이게 계급 차가 무지막지하게 크면 실감이 안 난달까. 무섭지가 않달까.

    솔직히 짬 없는 막내가 가장 무서워하는건 생활관 내 최고참보다는 바로 위 맞선임인 경우가 많잖아요? (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첫 스타트를 끊은 소령이 더듬더듬, 감사의 말을 마친 뒤 원샷했고

    두번째가 대위의 차례였어요.

    그런데 제가 설명은 안해놨지만, 대위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어요.

    매우매우 순수한 기독교 신자였어요.

    나쁜 의미 하나도 안 섞고 기독교 외길로 목사가 되었으면 깨끗하고 훌륭한 목사가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기독교 신자였어요.

    그래서인지 학교장이 [사랑과 우정의 잔]을 내밀었는데, 거부하더라구요.

    기독교를 믿기 때문에 술을 안 마신다면서요.

    그 순간의 분위기는 아직도 생생해요.

    학교장은 두 번, 세 번 술을 권했어요. [사랑과 우정의 잔] 이 것만 마시라구요. 나도 젊었을 적에는 자네처럼 기독교를 믿었고, 술도 안 마시고 그랬지만 술을 마시는 것과 신앙생활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충분히 병행할 수 있는거라며. 괜찮으니까 마시라고 말이에요. 그 잔만 마시면 더 이상 술을 권하지 않겠다는 늬앙스를 풍기면서요.

    그러나 대위는 한사코 거절했어요. 죄송합니다. 못 마시겠습니다. 소신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학교장은 조금 당황했어요. 잔을 들고 있는 손도 창피해보였구요.

    학교장과 대위를 제외한,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의 생각은 똑같았을 거에요. '아니 이 색기가 미쳤나.'

    마주보고 있는 평행선처럼 두 사람은 실랑이를 벌였어요. 

    그러다가 결국학교장이 한 발 물러나면서 끝났습니다. "정말 독실하구만."

    하지만 다운된 분위기는 끝나지 않았죠. 

    대위는 자기 자신이 자랑스러웠을 거에요. 외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신을 지켜냈으니까요.

    하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못했어요.

    다음 잔을 받은건 상사였어요.

    어떻게든 분위기를 만회해보려고 온갖 미사여구와 학교장을 칭송하는 말을 열심히 했어요. 

    그 있잖아요. 영광이니, 빛난다느니, 위엄있다느니, 뭐 그런 것들이요.

    그러나 학교장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기엔 역부족이었죠. 

    어색함이 가시질 않았어요. 모두들 시선은 상사를 향해, 그 다음 잔을 받는 사람을 향해 쏟아부었어요.

    부디 학교장의 기분을 좋게 만들 멘트를 해달라고 말이죠.

    이거 어떻게든 학교장의 기분을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 순서가 끄트머리였던게 참 다행이라고 느꼈어요.

    덕분에 앞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들은 하면 안되겠구나를 깨달았으니까요.

    머리속으로 멘트를 정리할 시간도 충분했구요.

    그리고 제 차례가 왔어요.

    벌떡 일어나 학교장으로부터 [사랑과 우정의 잔]을 두 손으로 받은 뒤 말했습니다.

    "학교장님."

    "음?"

    "저는, 일년 전, 이등병일때 학교장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강당에서 부대 내 구타 및 악폐습을 없애기 위한 연설을 하셨을때 저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학교장님께서는 '#$%#^#$'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은 이등병이었던 제게 크게 와닿았습니다. 저는 학교장님 덕분에 무사히 일년을 보냈고 지금 이렇게 상병이 되었습니다. 저 또한 학교장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깨긋한 부대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토씨는 좀 틀릴 거에요. 위에 적은거보다 더 멋있게 말해던 거 같지만 정확히는 기억나진 않아요. 많이 긴장했었으니까요.

    캬~, 학교장이 감탄하더라구요.

    "여기 장교들보다 말하는 솜씨가 훨 낫구만."

    흡족해보이는 표정이었어요. 거기에 함께있던 사람들도 모두 한시름 놓은 표정이었어요.

    어찌되었든 분위기는 반전되었고, 마무리는 제 후임이 지었어요.

    "항상 하늘에 떠 있는 별만 봤는데, 이렇게 땅에 계신 별을 가까이서 보게 되서 눈부십니다."

    라던가.., 속이 뻔한 말이긴 했지만 학교장을 웃게 만들었어요. "껄껄껄."

    이때다 싶어 다들 웃으면서 분위기를 화목하게 만들었구요.

    그 이후는 평범한 회식자리처럼 끝났어요.

    쓰고나니 결말을 어떻게 지어야할지 모르겠네요.

    밤 늦게 부대 복귀하니 제 경계근무는 다른 사람의 순서를 앞당겨 다음날로 미뤘다던가, 생활관 사람들이 미리 모포를 깔아놔서 씻고 바로 잠에 들었다던가 라는, 평범한 일상생활로 넘어가게 된 뭐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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