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가 얼굴을 가리고 누워 있죠..... 그 나무는 벚꽃나무예요. 백골들 위로 뿌리가 뻗고, 그 피를 자양분으로 화려한 벚꽃이 피었죠. 저 소녀의 얼굴이 꿈에 계속 나타났어요 그것도 며칠씩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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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있음 광복절이군요.. 잊어먹고 있었는데 한 블로그에서 이런글을 읽게 됐습니다. 더불어 저 그림두 봤구요.. 길지만 한번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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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 회사에 한 음반회사 관계자가 찾아왔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헌정 공연이 있는데 그 공연을 준비하는 가수 임상훈씨를 취재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죠. 갑자기 떨어진 광복절 특집 아이템 찾기에 골몰하고 있던 저는 이게 웬 떡이냐고 덥석 물어버렸고, 다음날 할머니들이 일본 대사관 앞에서 벌이는 정기 수요시위부터 촬영하기 위해 동작 빠르게 달려나갔습니다.
거기서 만난 임상훈씨와 그 일행은 "위안부 할머니 헌정 공연"과는 전혀 번짓수가 달라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톰 머리 번개맞은 듯한 헤어스타일에 갈색 선글라스를 끼고. 레게 머리와 헐렁헐렁한 힙합들을 걸치고 "일본은 사죄하라"고 외치고 있는 겁니다. 임상훈씨가 자기 소개를 하더군요.
"8월 14일 연강홀에서 여기 계신 문필기 할머니와 함께 공연을 할 예정인 가수 임상훈입니다. 이상한 사람들이 끼어 있다고 생각하셨죠?"
문필기 할머니 역시 위안부셨습니다. "옛날엔 노래 잘했다."고 웃으시는 모습이 그 끔찍함을 상상하기 어렵게 만드시는 분이셨셨지요. 아톰머리 번개맞은 임상훈씨와 염색한 머리 새끼줄 꼬듯 꼰 레게들, 그리고 머리 하얗게 센 문필기 할머니와 함께 광주 나눔의 집을 찾은 것이 8월 13일.
임상훈씨는 저를 역사관으로 이끌었습니다. 걸으면서 저에게 툭 던지는 고백(?).....
"저 원래 일본 음악을 일본 사람보다 더 좋아했거든요. 더 잘 알았고...."
"뭐 그럴 수도 있죠. 일본 음악이 뭐 나쁘나."
"생각이 없었다는 게 문제죠. 일본에 대한 생각..... 근데 언젠가 여기 있는 이 그림을 보면서 전기맞은 것 같이 충격을 먹었어요."
그가 가리킨 것은 "빼앗긴 순정"이라는 그림이었습니다. 돌아가신 고 강덕경 할머니의 그림.
몇 번을 보고 또 본 그림이었다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그 그림 앞에 서면 거기에 빨려들어가는 듯 했습니다. 웅얼웅얼거리는 그의 말을 담느라 카메라를 바짝 들이밀어야 했지요.
"한 소녀가 얼굴을 가리고 누워 있죠..... 그 나무는 벚꽃나무예요. 백골들 위로 뿌리가 뻗고, 그 피를 자양분으로 화려한 벚꽃이 피었죠. 저 소녀의 얼굴이 꿈에 계속 나타났어요 그것도 며칠씩이나......"
그는 그 충격을 바탕으로 노래 하나를 지었습니다. 문필기 할머니가 공연에서 그 노래를 부르게 되어 있었죠. 젊은이들이 춤추고 노래 연습하는 걸 즐겁게 지켜보던 할머니가 자기의 노래를 갈라진 목청에 싣습니다.
" 난 아파요. 난 울었죠. 날 가뒀죠. 꽃 피는데 꽃 피는데...."
먹먹해지더군요. 가사는 할머니가 부르기 쉽게, 또는 할머니의 가장 솔직한 회고처럼 단순하고 직설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노래를 부르시는 동안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는 말을 잃었답니다. 문필기 할머니의 아픔, 울음, 꽃들이 만발한 계절에 빼앗긴 순정...... 할머니는 젊은이들의 율동을 따라하며 노래했습니다.
"난 아파요... 난 울었죠..... 날 가뒀죠...."
공연 당일, 무대에 오르기 전 뒤켠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에게 카메라를 들이댔습니다. 판박힌 질문이지만 안할 수도 없는 질문, 지금 심경 어떠세요? 할머니는 답답하다는 듯,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해마다 8월이 되모, 얼매나 가슴이 답답하고 진저리가 쳐지는지 몰라. 잊고 살다가도 8월만 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니까 잊어먹지도 못해. 생각해 봤어요? 이 할머니가 어떤 심경일지."
8.15특집 아이템 아니면 할머니를 찾을 일이 없었을 제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습니다. 그리고는 총총히 그 자리를 벗어났지요. 하릴없이 공연장을 오가다가 노니 장독 깬다고 관중들 인터뷰나 따자 하고 관객석으로 향했습니다, 뜻밖에도 많은 인파가 몰려와 있었습니다. 특히 중고등학생들.....
때로 방송 제작하다 보면 닭살돋는 인터뷰도 필요합니다. 빤한 내용이긴 하지만 그래도 "관심 있어 왔다." "친구들끼리 가자고 했다" 뭐 이런 자발적인 참여의 느낌을 기대하고 카메라를 갖다댔는데 그렇게 밝고 깜찍한 아이들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저를 경악시켰습니다.
"중간소집일인데 학교에서 가라고 해서...."
"선생님의 강요로....."
"갔다 오면 현장학습 인정되거든요."
"공연내용요? 모...르는데요."
버럭 오기가 났습니다. 그래서 인터뷰를 수십명은 했습니다. 제발 스스로 온 놈 한놈만 걸려라. 나 같이 일 땜에 온 놈 말고, 다른 친구들처럼 학교에서 가라고 한 놈 말고, 평소에 관심이 많았어요 하는 놈이나 년 하나만 걸려라... 뭐에 홀린 듯이 객석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방송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에게 필요했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하지만, 거짓말처럼 없더군요. 그렇게 없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1년 뒤, 저는 또 나눔의 집을 찾았습니다. 역시 8월이었죠. 광복절 아이템을 찾다가 찾다가 "또 나눔의 집이냐? 칙칙하다"라는 타박을 팀장한테 받으면서, " 할 수 없잖아요 씨..."라고 변명하면서 말입니다.
이번에 제가 만날 사람은 사진을 전공한 나이 스물의 여대생이었습니다. 이름은 경민이였는데, 그녀는 방학을 반납하고 나눔의 집에서 자원봉사 중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사진 전공 학생으로서 할머니들의 모습을 담고 싶은데 모델료를 낼 수가 없으니 '몸으로 때우는' 거랍니다. 작년 공연장에서의 무심한 관객들을 떠올리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물으니 역시 TV에서 본 "빼앗긴 순정" 그림의 충격을 들더군요....
청소부터 수발까지 궂은일을 도맡던 그녀에게 뜻밖의 일이 떨어졌습니다. 2002 미스코리아들이 나눔의 집을 방문하는데 역사관 안내를 맡으라는 거였지요. 선배한테 교육받고, 유물 및 기록들 다시 공부하고, 가이드 연습하고, 경민이는 아침부터 부산했습니다.
늘씬늘씬에 조각같은 몸매의 미스코리아들이 경민이의 인도를 받아 역사관 이곳저곳을 들여다 봅니다. 그녀들은 탄성과 신음을 흘리면서 우아한 걸음걸이로 난생 처음 보는, 그리고 지금까지 별 생각이 없었던 (한 미스코리아의 고백) 사람들과 그들의 흔적을 답사했지요. 그러는 도중 경민이가 한 방에 이르렀습니다.
두어평 남짓, 그리고 야전 침대가 놓여진 칙칙한 방, 바로 위안소의 실제 모습을 재현한 방이었습니다.
"들어가 보세요."
경민이가 미스코리아들에게 강한 어투로 말합니다.
"누워 보세요."
미스코리아들이 흠칫거리면서 주저하자 경민이는 다시 단호하게 말합니다.
"다 누워 보세요. 차례차례"
미스코리아들이 내키지 않는 동작으로 침대에 눕자, 경민이가 딱딱하게 말을 잇습니다.
"기분이 어때요? 지금 밖에선 군인 3-40명이 줄 서 있는데...내일도 모레도, 계속 그 인원을 받아야 되는데....."
나는 잠시 생각했습니다. 경민이가 너무 오버하는 게 아닌가... 그 말투는 다분히 명령조였고 시니컬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죠. 아마 미스코리아들 그렇게 기분 좋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 생각을 하면서 관람장 밖으로 나오는데 경민이가 또 미스코리아들을 한 줄로 세우고 뭐라고 뭐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무슨 말을 하나 가 봤더니.....
"미스코리아 여러분, 꼭 한 번 더 오세요. 처음 와서는 잘 몰라요. 꼭 두 번은 와야 되요.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아요. 한 번만 더 오세요."
조금은 오버성의 격한 어투로 말을 맺은 경민이는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고 휙 뒤돌아서 가 버립니다. 화난 것도 같도 토라진 것도 같은 경민이를 쫓아가서는 물었죠.
"근데 왜 두 번이냐?"
"여기 처음 오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가 필요해서 대개 오거든요. 정치인이든, 수학여행단이든, 아까같은 미스코리아든..... 만약 두 번 여길 찾게 되면 그건 정말 할머니들을 위해서 오는 걸 테니까요...."
어딘지 모르게 날이 선 그녀의 답변에 솟아나는 식은땀을 감추면서 저는 이렇게 설레발을 쳤습니다.
"하하하 난 두 번째다 경민아."
그러자 경민이, 세 마디의 말로 열적게 웃고 있던 저를 얼음인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아저씨는 8월에만 오잖아."
저는 경민이가 별안간 딱딱해진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미 그곳 식구가 되어 버린 경민이에게 저나 미스코리아들은 자기 필요에 의해 한 번 왔다가 사라질, 그런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자원봉사 일과가 끝나고 저녁을 먹은 다음, 그녀는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할머니들의 사진을 찍는 것이죠. 얼마전 귀국한 지돌이 할머니는 수십년간의 타국살이 와중에 우리 말을 잊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경민이에게서 "고향의 봄" 노래를 배우고 있었죠. 하얗게 머리 센 할머니가 노래를 부릅니다.
"나이 사던 고시앙은 꼬피는 샨골......." 중국어도 아닌 것이 우리말도 아닌 것이, 하지만 할머니는 악보에서 눈을 떼지 않습니다. 그 악보에는 평생 처음으로 써 본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글자라기보다는 그림에 가까운 지.. 돌.. 이..
그리고 경민이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어떤 할머니가 자신의 사진들을 겹겹이 쌓아놓고 경민이를 부릅니다. 모두 경민이가 찍어 준 사진들이죠.
"야 어느 사진이 제일 잘 나왔냐?"
"이게 제일 낫네. 근데 갑자기 왜 사진들을 다 내놓고 난리야?"
"죽은 다음에 액자에 넣을라고......."
그러자 경민이는 제가 카메라를 놓칠만큼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죽긴 왜 죽어? 자꾸 왜 그런 소리를 해? 천년만년 살아. 죽긴 왜 죽어."
알고보니 할머니들은 경민이가 찍은 사진과, 당신들이 원래 갖고 있던 사진들 중에 가장 예쁜 것들을 추려 두고 있었습니다.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삶, 마지막 모습이라도 고운 자태를 보이고 싶은 마음일까요. 경민이는 또 오버를 하면서 할머니를 질타하고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결코 버릇없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경민이는 일기를 꺼냈습니다. 그 일기는 특이하게도 친구 '미설이'에게 보내는 편지체로 되어 있더군요. 그녀가 황금같은 대학 1학년의 여름방학을 고스란히 바쳐 만나고 딩굴고 부대꼈던 할머니들의 면면이 생생한 사진과 글로 아로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날 그녀는 그런 일기를 썼습니다.
"미설아......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이 할머니들 중에 누가 남아 계실까. 지금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때는 어쩌면 이런 할머니들이 계셨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회사로 돌아와서 작년 수요 시위 때의 화면을 들여다 봤습니다. 나눔의 집 관계자에 따르면 거기에 모습을 보이신 할머니 두 분이 세상을 뜨셨다더군요. 과연 10년 뒤에 "경민이의 여름방학"이라는 제목으로 방송된 이 테잎을 돌이켜 보면 과연 그 중에 누가 생존해 계실지 모를 일입니다. 많은 분들이 경민이가 예쁘게 찍어 준 사진을 앞세우고 고달프고 끔찍했던 이승을 떠나시겠죠. 그들의 빼앗긴 순정을 아프게 돌아보면서 말입니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면서 저는 극도로 분노했습니다. 그 할머니들의 발걸음을 막기 위해, 일본에 가서 "과거사는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는 대통령에게 혹시 항의나 하지 않을까, '난동'이나 부리지 않을까 해서 나눔의 집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출구인 나들목을 파헤쳤다는 기사를 보며 책상을 치면서 씩씩거렸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지금이 5공 때인가 6공 때인가. 도대체 '참여 정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광주경찰서장의 과잉충성일 뿐이라면 거기에 대한 단호한 대처가 필요할 것입니다. 망월동 경비가 뚫린 것만큼이나 대통령 자신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는 과잉 충성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잉충성을 묵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나마 대통령에 대한 충성도 아니라, 왜곡된 역사와 강요된 침묵에 대한 충성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이유.... 일본 방문길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은 그 충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구를 받기에 모자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 국민과의 대화에 나선 노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질문에 "자꾸 과거를 들먹이면..... 과거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보는 다수의 일본인들에게까지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투로 이야기를 하더군요.
토론의 달인이며 서민적인 레토릭을 탁월하게 구사할 줄 안다는 대통령입니다. 딱딱한 의회 연설도 아닌 그 솔직담백한 대화의 장에서, 알기 쉬운 예와 근거를 통해 일본 국민들에게 과거의 문제가 무엇이고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왜 설득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좋은 두리뭉실 속에 창씨개명은 조선인의 자발적인 참여에 이루어졌다는 망언이나 위안부 할머니들의 발길을 묶기 위해 나들목을 파헤치는 망동이 활개를 칠 수 있았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오버'일까요?
노무현 대통령은 '나눔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을까요? '빼앗긴 순정' 그림 앞에 서 본 일이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경민이의 표현을 빌자면 노무현 대통령은 그곳을 두 번 찾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문필기 할머니가 제게 찌르듯이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얼매나 가슴이 답답하고 진저리가 쳐지는지 몰라. 잊고 살다가도 8월만 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니까 잊어먹지도 못해. 생각해 봤어요? 이 할머니가 어떤 심경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