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세 명의 한국아이의 아빠가 있습니다. 그는 한국인으로 살아가는게 당연한 줄 알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당신은 한국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오늘도 “I have a Dream"을 외칩니다.
저는 한국에서 16년째 살고 있는 한 외국인의 아내이자, 세 아이의 엄마입니다. 남편은 소설가 박범신의 소설 “나마스테” 주인공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사연을 올리게 된 이유는 제 남편의 사연 때문인데요.
제 남편은 이름이 참 많습니다. 누군가는 민수, 누군가는 D.P. Lama, 누군가는 텐진이라고 사람들은 부릅니다. 이제 남편의 이야기를 하고자합니다.
(이야기가 조금 길 수 있지만, 꼭 한번 끝까지 읽어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제 남편은 민수라고 불리는 "이방인" 입니다.
「네팔 국적(D.P. Lama)을 가진, 티베트인 텐진」
1950년대 초 제 남편의 부모님, 그러니까 저의 시부모님께서는 당시 중국 정부의 폭정에 의해 나라를 점령당한 티베트에서 인도로 망명을 하셨습니다. 그런 후 다시 네팔로 망명하셨고 네팔에서 저의 남편을 낳았습니다. 민수씨는 네팔에서 티벳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곤 네팔에서 계속 살다가 20대 초반인 1997년에 미국으로 가는 길에, 한국에 잠시 들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국에 머물고 있습니다. 자신이 태어났던 나라에서도 “이방인”으로 살았고, 지금 있는 한국에서 또 나머지 반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민수씨에게 제2의 고향인 한국에서도 ‘이방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 이제는 이방인이 아닌, "세 아이의 아빠로 살고 싶습니다."
큰 딸이 올해 초등학교 입학했습니다. 둘째는 5살, 셋째는 3살입니다. 아이들은 엄마인 저를 따라 한국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 다문화가족입니다. 아이들은 엄마의 나라 한국 이름도 가지고 있고, 아빠의 나라 티베트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아빠가 국적이 다르다는 사실도, 반반씩 다른 피가 흐르고 있는 사실도,아빠의 가족들과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실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우리 아빠이고, 당연히 우리 가족이라합니다. 아이들은 다름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엄마,아빠와 함께하는 행복한 우리 가족이라고 합니다. 큰 딸에게 물었습니다.
- 아빠가 어느 나라 사람이지? "티베트 사람이요."
- 우리 가족 중에 외국인이 있니? "아빠만 외국사람이예요. 그런데 우리 아빠예요."
내년이 되면 남편은 마흔이 됩니다. 인생의 절반을 이방인으로 지냈지만, 이제는 세 아이의 아빠로, 한 사람의 남편으로 살고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민수씨는 한국 국적을 얻기 위해2013년 1월, 귀화를 신청했었습니다.
♡ 저를 만나기 전, 남편의 “처절했던 시간들...”
남편은 저를 만나기 전 몇 년간, 미등록 외국인노동자로 살았습니다. 네팔에서는 그냥 평범하게 살았지만, 한국에 오면서 남편의 삶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소위 3D 업종이라는 열악한 공장에서 일하면서, 네팔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인격적인 무시, 집단 폭행, 임금 체불 등을 겪었습니다. 인간으로 최소한의 대우는커녕 닭장에서 자기도 했고, 하루하루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한번은 밤새 일하고, 잠깐 눈 부치고 출근했는데 조금 늦었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해고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그의 부당함을 들어줄 곳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출처 : http://tnsrb.tistory.com/171>
남편만 그렇게 산 것이 아니라, 2000년대 초반 수많은 외국인노동자들의 삶이 그랬습니다.전기 충격기와 그물총을 사용하여 미등록 외국인노동자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연행하고 추방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도망치다가 죽거나 두려움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 외국인노동자들이 늘어났습니다.
남편의 천막농성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외국인도 인간이라고” 외치면서, 동물에게도 하지 않는 학대를 받는 노예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외국인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요구했습니다. 천막을 치고 380일을 명동성당 앞에서 농성하며, 푹푹 찌는듯한 더위에서도, 뼛속까지 파고드는 차가운 칼바람 속에서도 농성을 멈출 수 없던 단 하나의 이유, 그것은 바로 “외국인노동자에게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을 만난 것은 바로 그 천막이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 한국 속의 작은 티베트, “포탈라”
첫 아이를 낳은 지 백일 즈음. 자정도 넘은 시각에 갑자기 남편과 친구들 몇 명이 집으로 왔습니다. 결혼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라 저는 무슨 일이 났나 싶었습니다. 남편이 말하기를 “자기야, 늦은 밤 말도 없이 미안해. 근데 지금 티베트에서 200명이 넘는 티베트인들이 죽임을 당했데. 그래서 우리가 급히 만나서 집으로 왔어.” 세상에, 무슨 일인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저는 대접할 것이 마땅치 않은 저희 살림에 미안하게도 라면과 맥심커피를 따뜻하게 대접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티베트라는 나라와, 네팔 국적의 티베트인인 남편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티베트의 평화와 자유를 앗아간 중국정부가 평화의 상징이자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을 개최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티베트인들이 중국정부에게 물었고, 중국정부는 이에 탱크와 총을 앞세워 티베트인 (공식집계)200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으로 답했습니다. 남편은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말살당하고 있는 조국의 역사와 문화를 한국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고민 끝에 티베트 음식점을 차리기로 결정하고, 남편이 알고 있는 티베트 문화를 한국사회에 올바로 알리고자 여러 가지 일을 시작했습니다. 또 여러모로 전해지는 후원금을 모아 인도와 네팔에 흩어져 살고 있는 티베트 난민촌, 고아원, 양로원, 응급병원 등에 한국인들을 대신하여 후원금을 전달해드리는 일들을 7년째 하고 있습니다.
<참고-그 동안 후원전달 내역 http://cafe.naver.com/potala/976>
♡ 가족 삶의 터전, 조국의 그리움을 담은 “우리의 삶 지키기”
전세를 빼 월세로 이사를 하고, 빚을 내어 어렵게 마련한 삶의 터전인 티베트 음식점에서 하루 19,000원도 팔아보았고, 가게 세를 내지 못해 가게를 닫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전전긍긍 버티며 2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온 명도통고서는 남편의 삶을 아니,저희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기에 충분했습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을 줄 테니 나가라”
그 통고서에는 이유도 없었고, 우리 가족의 삶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주변에 알아보니, ‘명동도시환경정비사업’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전 재산과 어마어마한 빚을 내어 투자한 비용이 약 1억9천만원 이었습니다만, 개발사의 입장은 보증금 2천만원만 돌려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희가 꿈꾸었던 소박한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습니다. 어떻게든 열심히 벌어서 빚을 갚고, 아이들 공부시키고, 홀로 계시는 저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기를 꿈꾸었는데. 저희는 그렇게 원치 않는 철거민이 되었습니다.
<출처 : 코리아 타임즈 기사>
♡ 자랑스럽고 떳떳한 “나의 남편, 멋진 아빠”
2011년 9월, 일부 세입자들이 이전 약속을 하고 떠난 건물의 철거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남아있는 상인들이 있었고, 저희를 포함한 상인들은 이전할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하라고 끊임없이 대화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요구는 단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먹고 살고자 했던 우리의 터전, 남편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던 그 음식점을 지키고자 저항했지만, 우리에게는 맨몸 말고는 저항할 수 있는 무기가 없었습니다. 300명이 넘는 폭력배인지, 철거업체 직원인지 구분이 가지도 않는 그 무리들 앞에서 외국인인 남편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이 이런 나라입니까? 한국 땅이 이런 겁니까?” 라고 소리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저는 당시 사건으로 (셋째를 임신 중이었는데) 철거업체 용역에게 차여, 유산될 위기에 처해 병원에 입원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이 현행범으로 체포가 되었습니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해 내쫓기는 상황에서도 남편은 “법치주의”라 하는 한국의 법에 호소하고자, 고소하러 갔던 명동파출소에서 오히려 철거업체직원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년이 넘는 시간동안 남편은 재판을 받았습니다. 대법원까지 재판을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남편이 폭력을 행사했다는 억울한 누명은 벋을 수 있었지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업무방해, 공무집행방해] 라는 죄를 지은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벌금 500만원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유치장에 있던 시간을 빼고 벌과금 납부 명령서가 나왔습니다.)
남편은 시사매거진 2580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아빠가 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남편이 외국인이니까 부당함에 말하지 않고, 힘과 가진 것이 없어 순종하며 살고, 법과 제도가 없으니 굴복하는 그런 삶을 살았다면. 비록 남편이 “한국의 법을 3가지나 어긴, 벌금을 판결 받은 죄인”이지만 자랑스럽고 떳떳한 “나의 남편”이라고 아마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저의 남편이 멋진 아빠라고 생각합니다.
♡살려고 발버둥 치지만 자꾸만 남편을 “밀어내는” 한국 땅
남편은 말합니다. “나의 20대를 한국에서 다 보냈고, 내 아이들은 한국인이고 나는 그들의 아빠니까, 아들 둘이 자라면 군대를 갈테니, 나에게 아픈 시간을 주었지만 또한 나에게 성숙함을 안겨준 나라, 이제는 한국에서 이방인으로 구별되기보다 하나가 되고 싶다.” 그래서 귀화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성실하게 생업에 종사하고 있기에, 국민으로써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있기에, 세 아이를 키우고 있기에 저희는 아무 문제없이 남편의 귀화가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참... 무심하셨습니다. 아니 한국정부는 참 무심했습니다. 명동에서 일어난 그 아픈 과거로 인해 남편은 2013년 1월에 신청했던 귀화까지 불허처분을 당했습니다. 단지 세 아이의 아빠로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남편의 바람은 이렇게 거부를 당한 것입니다.
현 국적법 제5조 3호에 따라, 외국인의 귀화요건으로 “품행이 단정할 것”이 중요한 심사 기준이 되는데, 남편이 바로 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조항은 이미 지난 2012년 1월 국가인권위에서 귀화허가 심사의 투명성이 보장되지 않고, 구체적인 기준이 없어 평등권을 침해하는 차별행위에 해당한다며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하라고 권고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법무부는 이러한 권고안을 무시해 왔고, 바로 그로 인해 저의 남편이 귀화를 거부당한 것입니다.
♡ 삶을 건 투쟁, “귀화불허 처분취소”
귀화불허 처분으로 끝나지 않기에 제가 이렇게 사연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현행 출입국 내규에 의하면 벌금 200만원 이상의 판결을 받은 자에 한해서 강제퇴거 명령 대상자가 될 수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강제로 본국으로 돌려보내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현재 출입국의 내규는 애매하게 적용되고 있어, 벌금 50만원을 판결 받은 외국인도 강제퇴거명령이 발부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난 6월 7일 벌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남편은 지명수배자가 되고, 혹 체포가 된다면 즉시 강제출국 될 우려때문에 어렵게 돈을 빌려 벌금을 납부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이러한 상황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를 응원하는 주변 지인분들과 함께 귀화불허처분취소 행정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귀화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에서 혹, 출입국에서 남편의 비자를 연장해 주지 않는다거나, 강제출국 명령을 받게 되거나 하면 저희 가족들은 생이별을 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벌금을 판결한 법원을 원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하고 싶지 않습니다. 합리와 배려가 결여된 귀화 제도, 강제퇴거 등 외국인에게만 더욱 차별적인 이중, 삼중의 처벌을 원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아이들에게 지금보다 차별이 없어진 더 나은 사회를 선물해주고 싶은, 용기를 내어 부당한 제도를 바꿔나가는 당당한 부모로써 기억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으로 싸워 이겨내고 싶습니다.
법과 제도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 주지 못해, 스스로 삶을 지키고자 했던 한 외국인의 삶을 한국은 어찌 이리도 처절한 절규로 만들까요? 억울하다는 말로는 다 설명하지 못할 일들을 겪고도, 한국이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하는 남편에게 저는 부인으로 어떤 위로를 보내야 할지요. 저의 남편에게 힘을 내라고 응원하는 여러분들의 목소리와 마음을 전해주세요.저의 남편에게 쓰러지지 말고, 끝까지 싸워 이겨내라는 격려를 전해주세요.
※ 아래의 링크는 이번 민수씨의 일과 관련하여 응원하는 목소리 입니다.
1) 한국사회의 이주민 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시며, [외국인이주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의 석원정 선생님께서 쓰신 기사입니다. (프레시안 뉴스)
“민수씨와 가족에게 용기를!”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7461
2) 『말해요 찬드라』, 『아빠 제발 잡히지마』의 저자이자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대표이신 이란주씨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부천타운 뉴스)
이란주가 만난 사람 ⑤- 세 아이 아빠, 티베트 사람 민수 씨
http://bc.weeklytown.co.kr/Article/Detail.asp?Code=6006&Serial=31497
3) 한겨레 신문 (2014년 4월 3일) 사설에 실린 내용입니다.
[사설] ‘나마스테’ 내치며 ‘품격 있는 나라’ 될 수 있나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631113.html
4) 법보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법보신문)
“티베탄 민수, 힘내라”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2144
“티베트 난민 민수씨 귀화불허 철회하라”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1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