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그리고 나 ★
1
이상한 일은 그날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삐릴리, 삐리리리... 정적을 깨뜨리는 전화벨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었다.
'대체 누구야? 이 밤중에.'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나는 우선 창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은 아직 어둡기만 했다. 한밤중인 것이었다.
어떤 자식이......
투덜거리며 내가 침대에서 내려서는 사이에도 삐리리리, 삐리리리 전화벨은 끈질기게 울어대고 있었다. 잠은 순식간에 달아나버리고, 짜증을 넘어서 불안한 예깜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고향의 부모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거실로 나서면서 시계를 보니 세시 반이었다. 이런 시간에 혼자 사는 내 아파트의 전화벨이 울리는 것은 참으로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내 주변에는 내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도 결코 흔치 않은 것이다.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서 나는 꼭 필요한 사람들 외에는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나는 마음이 다급해져서 거실의 불도 켜지 않은 채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나는 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음악이 조금 낮아졌다. '장난전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빌어먹을, 하고 욕설을 삼키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상대를 불렀다.
"여보세요, 말씀을 하세요."
상대는 역시 대답이 없었다. 음악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쌍, 하고 내가 수화기를 막 귀에서 떼려는 순간이었다.
"저, 정화예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여자의 목소리가 뒤늦게야 들려왔다. 정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누구시라구요?"
"정화라니까요."
나무라는 듯한 말투였다. 왜 모르는 척하느냐는 듯한, 정화, 정화...
아무래도 모를 이름이었다.
"여보세요, 어디다 전화하셨습니까?"
"여인수 씨 댁에다 했어요."
여자는 기가 막히다는 듯 대답을 해오고 있었다. 여신수... 확실히 내 이름이었다.
"제가 여인숩니다만... 전 아가씰 잘 모르겠는데요."
"고맙지만 아가씨가 아니라 아줌마예요. 아시잖아요?"
여자는 나직하게 소리내어 웃기까지 했다. 그 목소리 뒤로 깔리는 음악은 점점 빨라지면서 뭔가 불길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건 뭔가 상당히 최신 스타일의 장난전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새삼스럽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것 보세요. 어떻게 내 전화번호하고 이름을 아시는지는 모르지만 전 댁을 몰라요. 전화 끊으세요."
"끊지 말아요, 인수 씨!"
여자는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건 정말, 하고 나는 고개를 흔들지 않을 수 없었다. 되게 걸려버린 모양이었다.
"전 댁을 모른다니까요."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죠? 헤어진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갈수록 태산이었다.
"우리가 만났었다구요?"
"너무해요. 바래다주지도 않고 혼자 가버린 것도 섭섭한데... 난 그래도 인수 씨 걱정이 돼서 전화한 건데......"
"......."
"많이 취하셨는데 잘 들어가셨어요? 차는 두고 가시라니까 부득부득 몰고 가시더니......"
"차라구요?"
"그래요, 빨간색 지프."
확실히 내 차는 빨간색 지프였다. 하지만 나는 어제 차를 몰고 외출하지 않았다. 내 차는 엊그제 추돌사고로 범퍼가 일그러진 관계로 요 앞 카센터에 들어가 있는 중이었다. 오늘 오후에나 들르라고 배가 나온 사장은 말했었다.
"전 어제 차 몰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침묵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도대체 왜 그러느냐, 섭섭하다...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지금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란 말인가.
"이것 보세요. 왜 이런 전화를 하시는지 모르지만 전 댁을 몰라요. 어제 차 몰고 나가지도 않았고, 초저녁에 들어와서 라면 하나 끓여먹고 텔레비전 보다가 내내 자던 중입니다. 아시겠어요? 끊으세요!"
" 인수씨, 잠깐만요!"
여자는 다시 다급하게 외치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절박해서 나는 또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말았다. 음악소리는 도로 느려지고 낮아지고 있었다.
"어쨌든 다 좋아요. 무사히 들어가셨으니까 됐구요. 오늘 아침도 산에 가실 건가요?"
기가 찰 일이었다. 여자는 내가 아침마다 동네 뒷산을 오른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처구니없어진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여자가 말을 이었다.
"가시지 말았으면 해요. 지금 밖에 비가 내리고 있거든요."
비?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 그 한마디는 무언가 불길한 느낌을 전해오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새벽, 저 음울한 음악, 정체 모를 여자의 엉뚱한 소리......
"꼭 가셔야 될 거면 조심하시라고... 그 말씀 드릴려고 전화한 거예요. 인수 씨 조심하셔야 돼요."
조심하셔야 돼요 할 때 여자는 속삭이듯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순간 머리끝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이 아닌, 어딘가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같았다. 그런 느낌을 떨치기 위해서라도 나는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무슨 장난하는 거요!"
" 미안해요. 끊을게요. 그렇지만 정말 조심하셔야 돼요. 지금 밖엔 비가 오거든요. 제 전화기에도 물이 새요. 미안해요. 더 얘기할 수가 없네요......"
여자 편에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렇지만 나는 수화기를 든 채로 우두커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전화기에 물이 샌다... 미친 여자가 아닌가. 그래, 하고 나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여자의 장난이었다. 그렇지만... 미친 여자가 어떻게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겠는가. 내 차가 무언지를 어떻게 알며 아침에 산에 오르는 버릇까지도 알다니. 아니, 여자는 비가 와도 후드가 달린 운동복을 입고 악착같이 산을 오르는 내 성미마저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더듬어보았다. 정화, 정화...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탤런트 엄정화뿐이었다. 내 기억 속에는 없는 이름이었다. 어젯밤 나의 행적은? 여자에게 말한 대로였다. 어제 나는 여성잡지 편집장과의 약속이 취소되는 바람에 일찍 집에 들어와서 내 장기인 '특제라면'을 끓여서 소주 한 병과 함께 먹어치웠고, 거실에서 뒹굴뒹굴하면서 열두 시가 가깝도록 텔레비전을 봤고, 그러다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내 지프는 분명히 카센터에 들어가 있다... 여자의 말과 연결이 될 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틀림없었다... 이렇게 생각을 더듬어가던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다시 오싹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들고 있는 수화기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분명 여자 편에서 전화를 끊었으면 뛰이뛰이뛰이 하는 신호음이 들려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런......
나는 소스라쳐 수화기를 내려놓아버렸다. 여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지금 밖엔 비가 오거든요. 제 전화기에도 물이 새요... 나는 무엇에 데인 사람처럼 베란다로 뛰쳐나갔다. 정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가 아니라 부슬부슬 봄비처럼 내리는 보슬비였다. 붉은 나트륨등 불빛을 받아 방울방울 부서지고 있는 한밤중의 보슬비... 아파트 광장을 내려다보던 나는 문득 한 여자의 모습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철에 걸맞지 않게 바바리코트의 깃을 세우고 긴 머리채를 비에 적셔가며 1304호 내 아파트를 올려다보는, 하지만 그건 환영이었다. 아파트 광장에 여자는 없었다.
빌어먹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환영까지 본다는 건 여자의 말이최면효과를 가져왔다는 얘기가 아닌가. 누군가 일부러 장난을 한 거라면 백이십 퍼센트의 효과를 본 셈이었다. 이 꼴이 뭐람... 하지만 그 생각은 내게 하나의 위안을 주었다. 그랬다. 이건 장난이었다. 누군가가 여자를 시켜서 장난을 친 것이었다. 누굴까? 하지만 곧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그런 장난을 걸어올 만한 친구는 없었다. 아니, 내게는 친구라고 부를 만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자체가 없었다. 나는 업무상의 일 외에는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는 편이엉T다. 억지로 갖다붙이자면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렇게 짓궂은 장난을 해올 정도로 무관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일부러 해온 장난전화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뭘까, 뭘까. 제 전화기에도 물이 새요... 머리를 쥐어 뜯고만 싶었다.
미친 년!
정체 모를 그 여자를 향해 내가 욕설을 토해냈을 때 삐리리리, 삐리리리 다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은 것처럼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삐리리리, 삐리리리... 역시 그 여자라는 생가이 들었다. 삐리리리, 삐리리리... 나는 꼼짝도 않고 서서 혼자 울고 있는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삐리리리, 삐리리리...... 전화기에서 파란 불꽃이 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딘지 모를 곳에서 물이 새는 수화기를 들고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젖은 목소리도 들려왔다.
'저, 정화예요.
받으세요, 인수 씨.
인수 씨, 걱정이 돼서 그래요.
산에 가지 마세요. 아셨죠?
정 가시려면 조심하셔야 돼요.
지금 밖엔 비가 내려요. 제 전화기에도 물이 새구요.'
아악--- 소리를 지르고만 싶었다. 삐리리리, 삐리리리... 전화벨은 끈질기게도 울어대고 있었다.
"그만 좀 해!"
더 참지 못하고 나는 와락 전화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예 깨뜨려 버릴 셈으로 막 전화기에 손을 뻗는 순간 거짓말처럼 벨소리가 끊겼다. 허공에 손을 뻗은 채로 나는 엉거주춤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달려드는 내 모습을 보고 내 마음 속의 광폭한 생각을 읽고 벨소리가 멈춘 듯한 형국이었다. 새침한 여자애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는 전화기를 내려다보다가 나는 그만 스르르 주저앉고야 말았다.
2
그만 잠이 들었던가 보다. 나는 거실에서 눈을 떴다. 어느새 창밖이 훤해져 있었다. 찌뿌듯한 몸을 일으키는 내 눈에 맨 처음 들어온 것이 전화기였다. 꿈이었겠지... 하지만 새벽녘 그 여자의 목소리는 너무도 생생하게 내 뇌리에 남아 있었다.
'오늘 아침도 산에 가실 건가요?
가시지 말았으면 해요. 지금 밖에 비가 내리고 있거든요.
꼭 가셔야 될 거면 조심하시라고......
정말 조심하셔야 돼요, 인수 씨.'
빌어먹을...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일어났다. 베란다로 나가보니 아직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경비원이 비옷을 걸치고 아파트 광장에 떨어진 잎새들을 쓸고 있었다.
'장난일 거야'
누가,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장난임에 틀림없었다. 밝아진 날이 주는 안도감으로 나는 힘을 낼 수 있었다.
산에 가지 말라고?
나는 흐흥, 하고 혼자 코웃음을 치면서 운동복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하얀 양말을 신고 하얀 트레이닝복 하의를 입고 위에는 빨간색 스포츠 셔츠를 입고 그 위에 후드가 달린 연두색 윈드재킷까지 걸쳤다. 이 정도면 보슬비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현관으로 나서서 목이 긴 하얀 농구화를 신는 동안 내 시선은 저절로 전화기 쪽으로 갔다.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가지 마세요, 인수 씨.
흥, 하고 나는 다시 코웃음을 쳤다.
미친 년......
전화기를 향해 욕을 해주고 나는 아파트를 나섰다. 엘리베이터는 마침 13층에 와 멈춰 있었다. 이런 작은 행운이 얼마나 기분좋은 것인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나는 혼자 휘파람을 불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호기롭게 1층 버튼을 눌렀다. 휘이잉---낮은 진동음을 내며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12, 11, 10... 하고 바뀌는 번호판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돌연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엘리베이터가 13층에 와 멈춰 있었을까. 내 앞집인 1303호는 벌써 보름째 비어 있었다. 이사를 가고 오는 과정에서 뭔가 날짜가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가 13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은 나 혼자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13층에? 설마 내가 어제 저녁 들어온 후로 아무도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홀수 짝수로 운행하는 엘리베이터도 아니니만치 13층에서 내릴 사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것도...?
나는 다시 뒷덜미가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자의 불길한 전화와 뭔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리는 내 가슴은 서늘한 한기에 싸여 있었다. 늙수그레한 경비는 마침 내가 나서는 출구 앞을 쓸고 있었다. 작가 선생님, 작가 선생님 하면서 늘 삼류 르포라이터인 이편이 무안해질 만큼 공손하게 인사를 하곤 하는 사람이었다. 내 발소리에 고개를 든 그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그의 태도였다. 평소와는 달리 내 얼굴을 빤히 바라다볼 뿐 먼저 인사를 해오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내가 먼저 인사를 해도 그는 답례를 하지 않았다. 그저 우두커니 내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는데, 그 얼굴에는...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수고가 많으시네요."
거듭 인사를 해도 마찬가지였다. 대답 없이 작지 않은 눈을 껌뻑거리는 모양이 미련스럽기까지 했다.
'이 양반이 왜 이러지?'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나는 그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 혹시 1303호에 어제 누가 이사왔어요?"
"아, 아뇨......"
더듬는 목소리, 고개를 흔드는 동작에도 맥이 풀려 있었다. 나는 거듭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의 앞을 지나쳤다. 어떻게 된 것이 이상한 일의 연속이었다..
정말 조심하셔야 돼요. 인수 씨.
미친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귓전을 때렸다. 웃기지 마, 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나는 윈드재킷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산에 오르는 기분은 또 각별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용하지 않은가. 인적 끊어진 이런 날의 산은.
가자!
미친 여자의 전화도 엘리베이터의 일도, 경비의 이상한 행동도 모두 털어버리고 나는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아파트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오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그 늙수그레한 경비는 아직도 우두커니 서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작은 동작이었지만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3
이슬비가 내리는 길을 따라 약수터가 있는 뒷산을 향하면서 나는 기분을 밝게 가지려고 애를 썼다. 미친 여자의 전화도, 엘리베이터의 일도, 경비의 이상한 행동도 잊어버리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우연한 일들의 연속일 뿐이라고. 그렇지만 이상한 일은 계속되었다. 차도에서 갈라져서 산기슭으로 향하는 좁은 길로 접어들면서 비에 젖은 산의 전경을 보기 위해 막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무언가 강렬한 색깔 하나가 내 눈을 찔렀다. 그것은 선연한 연두빛이었다. 연두빛의 점이었다. 아니, 연두색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우리 동네 뒷산은 세 개의 봉우리가 잇따라 늘어서 있고, 그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를 능선길이 이어 주고 있었는데 첫봉우리로 오르는 길에는 나무가 거의 말라죽어서 중년사내의 벗겨진 머리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길을 오르는 사람은 멀리서도 볼 수가 있었다. 바로 그 길을 형광처리한 것처럼 빛나는 연두색 옷을 입은 사람이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흠칫, 놀라서 나는 내가 입은 윈드재킷을 내려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걸친 연두색 재킷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너무 야하지 않나 하고 처음에는 꺼려했을 만큼 화려한 색상이었다. 그 동안 날마다 산을 오르면서도 나는 내 재킷과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저기 첫봉우리로 향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연두색 옷차림의 누군가가 올라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잠시 우두커니 멈춰서서 그 연두색 점, 연두색 옷을 입은 사람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산에 상당히 익숙한 사람인 듯 그는 만만찮은 속도로 정상을 향하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정상에 섰다. 그 봉우리에 멈춰서서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고 나는 느꼈다. 다시 뒷덜미가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마치 멀리서 눈싸움을 하듯 봉우리 위의 연두색 점을 올려다 보았다.
넌 누구냐......
한참 만에야 연두색 점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번째 봉우리 쪽을 향해 내려가는 그를 더는 볼 수 없었다. 봉우리에 가려졌기 때문이었다. 누구일까... 고개를 갸웃하다 말고 나는 나 자신을 향해서 피식, 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얼빠진 생각이란 말인가.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색상은 아니지만, 세상에 연두색 재킷이 한 벌 뿐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사입은 메이커에서 같은 옷을 수백벌, 수천 벌 만들어냈을 수 있지 않은가. 그 중에 하나를 사입은 사람이 우연히 내 앞에 나타났을 뿐이다. 공연히 그 여자의 전화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기 때문이지, 별다른 일일 수가 없었다.
'정신차려, 응?'
나 자신에게 타이르면서 나는 비로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이상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수터를 지나서 가팔라지기 시작하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철봉과 나무벤치, 탁자 따위를 만들어놓은 공터가 있었다. 대개 노인들이 어울려 체조도 하고 한담을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술추렴을 하기도 하는 장소였다. 낯익은 얼굴들끼리 인사를 나누게 되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내리는 비 때문에 노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우산을 든 사내가 하나 벤치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내 발소리에 사내가 우산을 젖혔을 때야 나는 그가 산 아래 있는 목욕탕 주인임을 알 수 있었다. 퉁퉁하게 살이 오른 몸집의 그는 이틀에 한 번 꼴로는 나와 마주치곤 했는데, 어느 날 동행하고 있던 사내와의 대화를 듣고 그의 직업을 알아냈던 것이다. 무슨 정치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손을 눈높이로 들어올리면서 '안녕하쇼?' 하고 약간 불량기 있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게 그의 버릇이었다. 당연히 오늘도 그러리라고 생각하고 나는 속으로 웃음을 참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여느날과 달랐다. 다가서는 나를 그저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경비가 보였던 것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먼저 '안녕하세요?'하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어도 마찬가지였다.
"아, 예......"
답례라는 게 그뿐이었다. 그리고 역시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들이?'
의아해진 마음이 평소와는 달리 말을 건네게 했다.
"오늘은 사람들, 별로 없죠?"
목욕탕 주인 사내는 이제 뭔가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이 되고 있었다. 저절로 상체가 뒤로 젖혀졌고, 바보처럼 헤---하고 입이 벌어졌다. 어찌된 일일까. 나는 부러 한 마디를 더 건네보았다.
"누가 나왔던가요?"
"......"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의아스러운 것을 넘어서 슬며시 화가 치밀어올랐다. 빌어먹을, 하고 소리나지 않게 욕설을 씹으면서 나는 그를 지나쳐 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날이란 말인가. 왜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이 모양들이란 말인가. 혹시, 하고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려보았다. 이상한 것은 없었다. 그럼 도대체 왜?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오르막길이 휘어지는 지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목욕탕 주인 사내는 역시 아까의 경비처럼 물끄러미 나를 바라다보고 있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원 미친 놈들 같으니......"
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욕설을 뱉으면서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첫봉우리를 향해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비에 젖은 후드가 벌써 머리에 촉촉하게 달라붙어왔다. 이마에 와닿는 이슬비의 촉감. 콧날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나는 비오는 날 아침의 산을 즐기려고 애를 썼다. 별일은 없으리라. 아무 일도 아니리라.
4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면서 무심코 두 번째 봉우리 쪽으로 눈길을 주던 나는 하마터면 아,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두 번째 봉우리의 정상에 아까의 연두색 점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이제는 점이 아니었다. 팔다리를 갖춘 사람의 형상이었다. 연두색 재킷 아래는 하얀 운동복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운동복 바지를 내려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얀 운동복에 후드가 달린 연두색 윈드재킷... 그와 나는 똑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목욕탕 주인의 놀란 얼굴이, 경비의 넋나간 표정이, 그리고 새벽녘 그 여자의 전화가 연달아 떠올랐다. 가슴이 서늘하게 욱죄어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설마......
내가 혼자 고개를 흔드는 사이에 사내는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세 번째 봉우리 쪽을 향해 내려간 것이었다.
설마......
내 가슴 속에 떠오르는 어떤 끔찍한 예감을 떨쳐버리려 애쓰면서 나는 천천히 두 번째 봉우리를 향해 걸음을 옮겨놓았다. 이슬비 사이로 안개가 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좌우의 소나무와 아카시아 나무에서 후두둑 후두둑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 물방울처럼 내 가슴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생각들......
'아닐 거야.'
나는 거푸 고개를 흔들면서 빗속을 걸어나갔다. 맞은 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우산을 든 한 노인이 두 번째 봉우리를 막 내려오고 있었다. 두 번째 봉우리로 오르는 길은 벌건 황톳길이어서 노인은 균형을 잡지 못해 안간힘을 쓰며 내려오고 있었다. 조심조심 잔걸음을 내디디며 내려오는 노인을 지켜보면서 나는 한 마디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조심하세요, 아저씨."
그 소리를 들은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 표정은... 경비나 목욕탕 주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다시 내 가슴에 서늘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예감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나는 한 마디를 더 건네보았다.
"요쪽을 밟고 내려오세요."
풀이 자란 쪽을 가리키는 내 손짓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노인은 내게 질문을 던져왔다."
"어느새 한 바퀴 돌고 오는 거요?"
"네?"
"아, 어느새 한 바퀴 돌았냐구. 방금 아까 저기 있더니."
노인은 봉우리 너머를 턱으로 가리켜 보이고 있었다.
"전 지금 처음 올라오는 건데요."
"......"
노인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결코 헛되 예감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노인에게 한 발 다가섰다.
"저쪽에서 누구 만나셨어요?"
"아, 자네하고 만났잖아. 인사까지 해놓구선."
"......"
노인은 눈을 부라려 보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절 만나셨다구요?"
내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아, 그랬잖은가. 땀 닦으라고 이렇게 손수건까지 줘놓구선."
노인은 왈칵 화를 내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구겨진 손수건을 하나 꺼냈다. 빨간색 바탕에 황금색 꽃무늬가 들어간 그 손수건은... 내가 늘 운동복에 넣고 다니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운동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수건을 꺼냈다. 영락없이 똑같은 손수건이었다. 서로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내려다 보면서 노인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얼마나 지났을까.
'가자!'
나는 속으로만 소리치면서 밀치듯 노인을 지나쳤다. 그리고 숨가쁘게 두 번째 봉우리를 달려올랐다. 이번에는 뒤를 돌아보고 어쩌고 할 여유조차 없었다. 어디 있는가. 그 연두색 재킷은 어디 있는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저만치 세 번째 봉우리를 향하는 긴 능선길을 그는 걸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평소의 내걸음처럼.
'잡아야 된다.'
나는 달음질쳐 두 번째 봉우리를 내려섰다. 연두색 재킷도 흉내를 내듯 내달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서라!'
숨이 차게 능선길로 접어들었을 때, 연두색 재킷은 세 번째 봉우리를 향해 치달려올라가고 있었다. 녀석은 내가 쫓아가는 그만큼씩 달아나고 있었다.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아싸.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허덕허덕 헐떡이면서도 나는 숨차게 그 뒤를 쫓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젖은 땅 위에 새겨진 사내의 발자국이었는데, 잠시 멈춰서서 맞춰보니 내 발자국과 똑같았다. 즉, 사내는 신발마저 나와 같은 것을 신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놓칠 수 없다!'
나는 더욱 숨차게 달음질치치 않을 수 없었다. 녀석이 막 세 번째 봉우리의 정상에 올라서는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한 것은 이미 산 위까지 자욱하게 안개가 깔렸는데도 불구하고 녀석의 모습이 눈에 훨히 들어온다는 점이었다. 녀석과 나를 잇는 길만이 무엇으로 닦아낸 것처럼 맑게 개어 있었다. 그 길을 나는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올라갔다.
하지만 막상 다다른 세 번째 봉우리의 정상에서 나는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저만치 산 아래, 아파트단지와 고속도로로 이어지는 길을 살펴보고, 심지어는 키가 작은 소나무들 사이를 기웃거리기도 해보았지만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다시 발자국을 떠올렸다.
'그렇지!'
나는 허리를 굽히고 녀석의 발자국을 찾기 시작했다. 내 것과 똑같은 그 발자국은 정상의 한구석에 치우쳐 서 있었다. 송신탑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 발자국을
따라갔다. 철탑 아래는 제법 높은 낭떠러지였는데, 등산객을 위한 배려인지 철탑의 안전을 고려한 것인지 축대를 쌓아놓아서 많은 사람들이 산 아래 조망을 즐기곤 하는 곳이었따.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녀석의 발자국은 거기서 끝나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돌아서 간 것이 아닌가 하고 주위를 살펴보아도 녀석의 발자국은 오직 그 한 줄뿐이었다. 그렇다면 축대 위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나는 조심스럽게 축대 끝에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대충 7, 8미터쯤 될까. 제법 아찔한 높이였다. 하지만 그 아래에도 녀석의 흔적은 없었다.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축대 끝에서 어디로 날아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비가 오는 하늘로 고개를 들던 나는 등뒤에 돌연한 인기척을 느낄 수가 있었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던 나는 그만 심장이 멈춰버리는 듯한 느낌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녀석이 들여다보이는 빨간 셔츠까지 그리고 젖은 후드에 싸인 저 얼굴은... 바로 내 얼굴이었다. 눈밑에 찍힌 콩알만한 점까지도 똑같았다. 이를 드러낼 듯 말 듯 희미하게 웃는 저 웃음까지도 녀석이 한 걸음 물러났고 나는 끌리듯 한 걸음 다가섰다. 다시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갑자기 세상이 온 통 하얘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아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니, 질렀다고 생각했다. 그뿐이었다.
5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비가 게인 뒤였다. 대체 얼마나 오랜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질펀하게 비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몸의 뒷부분은 온통 흙투성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녀석은 어디로 갔을까. 주위르 두리번거리던 나는 나도 모르는 새 아---하고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축대가 무너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채 무너지지 않은 축대의 끄트머리에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누워 있었던 것이었따.
이럴 수가......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면서 무너진 축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흙과 돌이 엉망으로 뒤엉켜 무너져버린 그 속에 휘말려들었다면 아마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 같았다. 푸르르 진저리를 치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녀석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젖은 흙 위에 그토록 선명하게; 찍혀 있던 녀석의 발자국마저도 사라져버렸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마찬가지였다.
6
집으로 돌아온 나는 두 통의 전화를 받았다. 첫 번째는 카센터 주인으로부터였다.
"아, 이제 들어오셨군요. 이거, 뭐라고 말씀드려야 될지 모르겠는데... 한 며칠 더 손을 봐야겠습니다. 실은... 우리도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는데, 선생님 차가 요 앞에 가로수를 들이받고 서 있었어요. 아, 우리야 가게 안에 잘 넣어뒀죠. 우리 애들 짓인가 하고 닦달을 해봤지만 아무도 그 차를 끌고 나간 적이 없다고들 하고... 하여튼 죄송합니다. 우리 잘못이니까 무료로 수리를 해드려야죠. 죄송합니다. 글쎄, 우리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우리가 소홀한 거죠, 뭐. 그런데 오늘 보니까 선생님 차, 브레이크가 안 듣더군요. 모르고 계셨으면 큰일날 뻔하셨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아, 그것까지 포함해서 다 무료로 해드릴게요. 걱정 마십시오."
두 번째는 국민학교 동창인 승한이 녀석이었다.
"야, 방금 연락받았는데 정화가 죽었대. 뭐? 정화가 누구냐구? 얘 좀 봐. 너 그렇게 따라다니던 정화도 몰라? 모른다구? 아, 아. 그렇지. 정화는 걔 어렸을 때 이름이고 학교 들아가면서부터는 나영이라고 했지. 나영이라니까, 알겠지? 그래, 그래. 그 나영이가 정화라니까. 걘 지금까지도 너만 생각했어. 정말이야, 임마. 결혼? 물론 했지. 그런데 이혼했어, 이유는 모르고... 걔 그 후로 신경쇠약에 걸려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요양한다더니 또 무슨 암에 걸렸다고 소문들었는데 어제 죽었대. 아, 서울에서지. 걔네 사촌오빠 있지? 동철이 형 말야. 그 형이 그 일 땜에 올라왔다고 전화해왔더라. 어때? 한번 가볼래? 그래도 네 첫사랑 아니냐, 이 무심한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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