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 게시판 |
베스트 |
|
유머 |
|
이야기 |
|
이슈 |
|
생활 |
|
취미 |
|
학술 |
|
방송연예 |
|
방송프로그램 |
|
디지털 |
|
스포츠 |
|
야구팀 |
|
게임1 |
|
게임2 |
|
기타 |
|
운영 |
|
임시게시판 |
|
오랜만에 부산 집을 찾았다. 서울에서 내가 내려왔을 거라는 걸 꿈에도 모른 채 쇼파 위에 잠들어 있는 엄마.
슬그머니 엄마 옆에 누워 당신을 꼬옥 안으며, 오늘도 고단히 하루를 보내셨을 잠든 엄마 귀에 엄마, 아들왔어요 하며 장난을 쳐본다.
소리 없이 깜빡이고만 있는 옅은 티브이 불빛에 비친 엄마 얼굴을 보고 있자니, 살짝 찡그린 채 눈을 감고 있는 엄마의 눈가의 주름이 갑자기 도드라져 보였다.
우리 엄마는 잘 웃으셨다. 중학교 때부터 남들보다 어린 나이에 집에서 떨어져 생활한 나한테는
매주, 혹은 격주마다 집으로 돌아가 환히 웃으며 반겨주는 엄마 품에 포옥 하고 안기는 것이 너무 좋았다.
멀리 떨어져서 더 애틋한 것일까, 나는 엄마에게 어리광 부리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 시절의 나는, 엄마 아빠의 자랑거리였고 귀염둥이였다.
중학교 첫 시험에서 17점이라는 점수를 받은 나를 꼭 안아준 우리 엄마의 눈가에 주름은 한 줄 늘었다.
그 뒤로 무던히 노력했던 것 같다. 다행이 중학교 생활을 잘 마치고 좋은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때 나는 시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질 않지만 10대의 마지막 자락에서 그 때의 심금을 울리는 시들이 나는, 참으로 좋았다.
황동규 시인의 시들도 좋았고, 김소월의 진달래꽃도 좋았고, 한용운의 님의침묵도 너무 좋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열병처럼 시작된 첫사랑이 내게도 있었다.
지금도 떠올릴 수 있는 그 애의 환하게 웃는 얼굴.
나에게 말을 걸던 그 애의 입모양.
말할 때마다 오므리던 그 애의 입술.
나에게만 불러주던 나만의 애칭. 독특하고 화사했던 그 애만의 향기.
그 애는 언제나 알 수 없는 빛이 그 애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항상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내 마음을 훔쳐간 건 그 애의 눈.
그 애의 눈은 정말로 예뻤다. 아름답다거나 귀엽다는 표현보다는 예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문득 생각해본다.
쌍커풀이 지고 눈이 크고 웃을 때는 눈이 살짝 감기며 쌍커풀 자국만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그런 눈.
매번 숨가쁜 연애가 끝나고 요즘처럼 혼자 있는 밤이면 가끔 그 애 생각이 난다.
내가 가장 반짝일 수 있었던 그 순간이,
그리고 함께 반짝반짝하던 우리 둘의 모습도.
손 잡고 걸었던 그 어딘가 횡단보도에서 눈이 부시도록 빛나던 우리들의 최고의 순간 역시.
군에 입대하고 일병말 상병초 즈음, 이별 편지를 받았다.
‘잘 지내, 다음 사랑에겐 도망칠 곳을 만들어 두는 사랑은 하지 않을게. 내 사랑이 되어줘서 너무 고마웠어’.
그렇게 6년 남짓한 나의 첫사랑은 끝났고, 그녀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다음 휴가에 집으로 돌아가서 난, 엄마 품에 안겨 아무 말 없이 펑펑 울었다.
여름이 어느새 이울고 가을이 흠칫 다가온 서늘한 그 날에 엄마의 눈가에 주름은 한 줄 늘었다.
그 애는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의 냉정과 열정사이를 좋아했다.
그 때문에 유럽, 피렌체의 두오모도 갈 정도로.
나는 그 책을 한 번도 읽지 않았었다. 그다지 일본 소설에 관심이 없던 이유도 있겠지만
그걸 읽었을 때 그 애가 바라는 쥰세이나 마빈의 모습처럼 내 자신이 가식적으로 변하지 않을까 하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그 애에겐 이 책을 이미 다 읽었다고 했다.
하지만 내겐 억지로 내 스스로가 쥰세이나 마빈이 되는것 보다는 그냥 내 스스로의 모습이 되고 싶었다.
그게 어쩌면 평생 이길 수 없는 내 연적에 대한 조그마한 싸움이었다.
그녀에게 이별통보를 받은 뒤 어느 날, 문득 그녀가 좋아했던 책을 읽고 싶어졌다.
거기서 무엇을 느끼고 싶었다기 보다는 지난 사랑에 대한 반성이라고나 할까,
나는 그녀에게 쥰세이였을까, 마빈이었을까.
난 일부러 오랜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히 책을 읽었다.
마치 향이 좋은 차를 마시며 차가 줄어드는 것을 아쉬워 하듯이,
그녀와의 추억을 천천히 음미하듯이, 마치 이 책을 덮으면 끝이 정해져 버리듯이.
그렇게, 그렇게 책을 읽어나갔다.
라 미아 캄파나. 나의 들판. 라 미아 캄파나.... 그녀의 들판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겠지만,
소름 끼치도록 그녀가 사무쳤었다.
그 후로 몇 번 연애를 하고, 항상 연애를 할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연애를 해왔던 것 같다.
이젠 정말로 몸과 마음이 지쳐서일까, 꽤 오랜 시간동안 연애라는 것을 하지 못했다.
이 시간도 다음 연애를 위한 준비 기간이라는 걸 알지만 외로움이란 감정을 이겨내기가 쉽지만은 않다.
이렇게 저 깊은 슬픔 속으로 침잠하고 있는 내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갑자기 눈가의 주름과 함께 날 보며 웃었던 엄마의 환하게 웃는 모습이 생각났다.
아, 나는 아직 사랑받고 있구나. 나는 아직 사랑을 받고 있구나. 아직 힘을 내어 나아갈 이유가 있구나.
달려봐야겠다. 나를 사랑해주는, 내가 사랑하는, 그리고 앞으로 내가 사랑할 나의 사람들을 위해서 나아가봐야겠다.
마치 성큼 다가 왔었던,
엄마 품에 안겨서 펑펑 울었던 그 날처럼 바람이 스산하고 가슴이 먹먹하다.
나 때문에 많이 주름이 늘었을 엄마에게 내일은 사랑한다고 얘기해야겠다.
엄마, 사랑해요.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