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매일 작업실에 앉아 투박한 손으로 가죽을 꿰고 칼을 두들기며 하루를 꼬박 보낸다.
세상을 사는 요령도 없다. 투박하고 둔한데다 나에게 명령만 내릴 뿐이다.
이래라 저래라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난다.
나보다 나은 것도 없는 사람이 아버지라는 이유로 나를 좌지우지 하려는 게 맘에 들지 않는다.
왜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생각을 말하면 안 되는 것인가?
나는 생각 없는 인형인가? 왜 내 말은 들으려 하지 않는가?
오늘도 나는 이런 생각들을 가슴 속 불타는 분노의 덩어리 아래로 꾹 눌러 담을 뿐이다.
*
자정이 가까운 시간. 마을은 조용했다.
“헉, 헉, 호우님! 저 왔습니다!”
혹시나 길을 못 찾을까 싶어 저녁 즈음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체취를 뿌려 놓은 것이 효과가 있던 모양이었다. 전서령이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수고했다.
“별말씀을요. 제가 누구입니까”
-그 일은?
“네, 다 알아보았습니다.”
헐떡이는 전서령이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호우님, 지금이 기회입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출발하셔야 합니다.”
-어째서?
“지금 모피상이 세대 교체를 하는 중입니다. 지금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그 모피상이 팔을 고칠 능력이 있는 건 확실한가?
“그럼요! 제가 샅샅이 다 조사했습니다. 더한 상처도 치료했습니다.”
-..........
전서령의 말대로 세대 교체 중이라면 지금 가야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께름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무엇 때문이지? 어딘가 찜찜했다.
“여기, 그 모피상의 주소가 있습니다.”
전서령이 내민 영지에는 귀령문(鬼靈文)으로 모피상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있었다.
-이 놈!!!!
퍼억!!
나는 앞발을 들어 전서령을 할퀴어 바닥에 내려 쳤다.
“아, 아니 호우님 왜 이러십니까?!”
전서령이 바닥에 얼굴이 뭉개진 채 버둥거리며 물었다.
-이 영지!! 이 영지가 어디서 났느냐?!
전서령이 내게 건넨 영지는 한눈에 보기에도 상급품인,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내 질문에 전서령의 얼굴이 하얘졌다.
“아, 아니 그건 저기,”
-사실대로 말해라. 누구에게 이걸 얻었느냐?
내 목 깊숙이 울려나오는 소리에 전서령은 바들바들 떨었다.
“그, 그것이 저기,”
-..누구냐?
“네, 네??”
-누구에게 정보를 팔았나?
“아, 아닙니다! 저, 저는..”
푸컥!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전서령이 입에서 토사물을 내뿜으며 소멸해버렸고 바닥에는 모피상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종이만 남아 있었다.
누군가 우리를 노리고 있다.
*
아침에 일어나니 왼팔에 감각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손으로 주물러 보았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한참을 주물러보고 있는데 호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감각이 사라졌나?
“..응”
-..........
호우는 내 팔을 한참 내려다보고는 다시 나갔다.
(호우님이 요즘 이상하십니다.)
“그러게. 통 말도 없고.”
“그 팔은 이제 어쩔 수 없어.”
망량이 끼어 들었다.
“왜?”
“거기 죽은 영을 발랐던 거지? 그 동안은 팔의 생기로 그나마 유지 했지만 이젠 생기도 다 떨어져서 그러는 거야. 살아있는 생령을 넣어야 하는데.”
“..........”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계속 팔을 주무르는데 나갔던 호우가 입에 무언가를 물고 다시 돌아와 내 앞에 떨어트렸다.
툭-
-모피상의 주소다. 여기 가면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어? 진짜?!?! 왜 얘기 안 했어!!”
나는 너무도 신나 벌떡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영지를 주웠다.
“응? 근데 이게 뭐야? 도대체 읽을 수가 없잖아.”
옆에서 들여다보던 망량이 참견을 했다.
“내가 읽어 줄게!”
망량은 영지를 빼앗아 들었다.
“어?”
영지를 든 망량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반응에 호우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망량은 눈을 두리번거리며 호우의 눈치를 살폈다.
-말하라.
“어.. 이, 이 모피상은 명성이 높아. 나도 이름을 여러 번 들었어.”
“그래? 그럼 잘됐네!”
-그리고?
“그.. 그리고..”
-말하라고 했다.
망량은 손가락을 꼼지락 대며 망설이다 말했다.
“...이 모피상은 호랑이 사냥 전문가야..”
“뭐?”
호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망량을 바라보다 다시 영지를 물고 이번엔 천시 앞에 두었다.
-영기를 맡아라.
그 말에 천시는 뒤뚱거리며 앞으로 와 영지 앞에 섰다. 그리고 몇 분을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여기서 나오는 영기는 제가 기억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영의 영기를 알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어떤 영의 영기인지는 잘…)
“그건 걱정 마. 은수야-!”
내가 부르는 소리에 은수는 멀리서 은호와 부적을 정리하다 말고 대답했다.
“왜 불러-?”
“귀문록(鬼門錄) 좀!”
내 말에 은수와 은호가 뭔가 투닥거리는 듯싶더니 이내 은호가 볼멘 얼굴로 와서 귀문록을 주었다.
귀문록은 모든 귀신 종류의 대표 영기를 담은 책이다. 비령은 비령 특유의 영기가, 지박령은 지박령 특유의 영기가 있는 데 그 대표적인 영기들을 열람하도록 만든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영은 단일 성질보다는 고유의 특성들을 가지고 있고 기본 영기 위에 고유의 영기를 덧입은 형태가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귀문록 또한 특정한 영의 기운이 다 일일이 수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충 어떤 영인지 영기를 구분하기에는 썩 나쁘지 않았다.
“자, 이걸로 찾아봐.”
(네, 알겠습니다.)
천시는 자리를 잡고 영기로 귀문록을 한장씩 넘겼다. 그 사이 망량은 주머니에서 공깃돌을 꺼내 놀고 있었고 나도 뭔가 먹으러 주방에 갔다. 호우는 천시 앞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지키고 있었다.
“저기, 있잖아.”
공기놀이에 질렸는지 망량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왜?”
“부탁이 있는데.”
“뭔데?”
“저기.. 나 지하실에서 지내면 안돼?”
감각 없는 왼팔을 냉장고에 걸치고 빵을 꺼내 먹었다. 차갑지만 제법 맛있었다.
“왜 그래야 하는데? 그리고 거긴 은수가 창고로 쓰고 있잖아.”
“창고로도 쓰는데, 한 쪽에 자리가 남잖아. 거기 나한테 주면 안될까?”
“왜?”
나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망량은 얼굴이 점점 퉁퉁 붓기 시작했다.
“.....팔도 못쓰는 병신 주제에.”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빵을 먹느라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나지막이 중얼거린 망량의 말은 분명 욕 같았다.
“아, 아냐. 내가 영지 만들 수 있다고 했잖아. 그거 만들어 줄 테니 지하실 좀 줘. 도깨비는 동굴에서 살아야 하는데 여긴 그런 곳이 없단 말야.”
“싫은데?”
망량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졌다.
“이이..!! 이 나쁜 놈!!”
저번에 한 약속 때문에 나한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발버둥 치는 망량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푸하하- 성격 하고는. 알았어, 줄게. 오늘부터 써.”
“뭐? 정말?!”
나의 대답에 금세 얼굴이 환하게 바뀐 망량은 눈이 초롱초롱 해졌다.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다람쥐 가죽 줄까?!”
“아, 아니. 그런 건 너나 써.”
“그럼 뭔데?”
“네 이름을 알려줘.”
내 말에 망량은 얼굴이 잠시 발그레 해졌다가 눈가가 살짝 촉촉해졌다.
“..내 이름은 망부(忘斧)야.”
“..도깨비들은 성이 ‘망’씨야?”
지나가던 은호가 툭 끼어 들었다.
“아니야!”
“그럼 이름이 ‘망’자 돌림이야?”
“아니야!!”
기어이 화를 돋우던 은호에게 망량, 아니 망부가 달려 들었다.
둘은 한참을 바닥에서 뒹굴었지만 둘 다 힘이 제법이라 싸움이 끝나질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은수야! 여기 와 봐! 망량이랑 은호랑 싸워!”
내 말에 망부와 은호는 화들짝 일어나 서로 떨어졌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천시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어떤 영이냐?
(이건 암령(暗靈)입니다!)
천시의 말을 듣던 호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안나! 짐을 챙겨라! 오늘 당장 떠나야 한다!
*
호우와 은호,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짐을 챙겨 나섰다. 출발하기 전 호우가 챙기라고 한 부적과 모피상의 정보가 적인 영지, 그리고 간단한 캠핑용품들로 은호와 나의 배낭은 꽉 찼다.
“으.. 더워 죽겠는데 땀띠 날 것 같아.”
내 왼팔에는 다람쥐 가죽이 감겨 있었다. 이 가죽은 내가 떠나기 전 망부가 감아 준 것이다. 다람쥐 가죽이 가진 생령의 기운으로 지금 왼팔을 제법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거 봐! 생령이니까 이렇게 팔이 움직이잖아! 다람쥐를 죽여서 가죽을 벗긴 게 아니라고!” 우쭐거리며 은호에게 턱을 내밀던 망부의 모습은 정말 웃겼다.
-서둘러라. 달이 기울기 전에 모피상에 도착해야 한다.
차를 타고 세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계곡마을이었다. 아마 여름한철 장사해서 일년을 먹고 살 듯한 휴양지였다. 아직 휴가철이 시작되기 전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곳곳에 빛 바랜 입간판들이 대충 벽에 기대어 있었다. 호우는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해는 살짝 기울고 있었다.
-오늘은 근처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산으로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왜 그러는데? 얼마 안 걸리면 오늘 그냥 가지.”
내 물음에 호우는 대답도 않고 주위를 둘러보며 킁킁거렸다.
“여기 마땅히 잘 곳도 없잖아.”
“누나, 일단 뭐 좀 먹고 찾죠. 배가 고파서 눈에 별이 보여요.”
은호의 말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식당 중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여기 도토리묵 하나랑 알탕 하나랑.. 그리고 해물전이랑 닭백숙 2인분 주세요.”
“그걸 우리 둘이 다 먹어?”
“아참, 누나 것도 시켜야지. 누나는 뭐 먹을래요?”
은호는 밥 먹을 생각에 싱글벙글 이었다. 이 녀석 밥값 하려면 정말 제대로 부려먹어야겠어. 이래서는 월급을 식비로 죄다 까야 할 것 같네. 게다가 이제 같이 사는 신세니 식비 생각을 안 할 수가 없고... 은수는 그 동안 어떻게 얘를 감당한 거야?
호우는 밖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뭔가를 찾는 듯이 사방을 두리번 거리기도 했다.
-안나!
“왜? 뭘 찾고 있는 건데?”
-지금부터 내 얘기를 잘 들어라.
호우가 한 얘기는 이랬다. 호우가 부리는 전서령이 모피상의 정보를 가져다 줬는데, 암령의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모피상은 나름 유명하고 호우도 이미 알아봤던 사람이기 때문에 괜찮지만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것이었다. 모피상의 거처는 산 속에 있는데 암령은 어두움을 이용하는 영이기 때문에 밤에는, 특히 달이 어두운 밤에는 너무 위험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루 자고 내일 아침에 이동하자고 제안했었는데, 지금 주위를 둘러보니 희미하게 암령의 기운이 자꾸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이래서는 숙소로 이동하기도 힘들 상황이었다. 이제야 아까 호우가 왜 부적을 챙기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호우가 특별히 챙기라고 했던 것은 영화부적 100장 이었다.
“근데 암령이 뭘 노리는 거지? 걔네는 머리가 나쁘잖아. 분명히 조종하는 건 따로 있을 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일단 여기에 있는 건 암령 뿐이다.
나는 닭다리를 잡고 뜯고 있는 은호를 재촉해 부적으로 무장을 했다. 이러다 체하겠다며 투덜대면서도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으려고 우물거리는 은호를 보고 있자니 은수 동생만 아니었으면 줘 패버리고 싶다. 우리 셋은 나름 중무장을 하고 식당을 나섰다.
계곡의 등산로로 가는 길은 인적이 뜸했다. 호우와 나는 온 신경을 사방에서 풍기는 암령의 움직임에 두었다. 아직 어둠이 깔리지 않아 기척은 은은했다. 하지만 이제 곧 밤이 온다. 나는 은호에게 영도를 건네 주었다. 지금 주변에 암령들이 너무 많아서 영방을 썼다가는 되려 다 불러들일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은호는 영능력이 강하진 않지만 싸움을 잘했기 때문에 영도를 제대로 휘두르기만 해도 꽤 전력이 되어 줄 것이다.
은호는 괜찮은 녀석이었다. 함께한 지 오래 되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체력은 넘치고 영력은 제 누나를 닮아서, 아니, 제 누나보다는 조금 나아서 쓸모 없음과 간신히 쓸만함 사이를 왔다갔다 했지만 힘도 셌고 성격도 호탕하면서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었다. 나는 지금의 일을 오래 할 생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은호를 잘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은수는 나보다는 이 일을 오래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일을 그만두더라도 은호가 은수의 보호막이 되어 줄 것이다. 일단은 은호의 기절하는 습관부터 고쳐야겠다.
“근데 너 말야.”
“네, 누나.”
“왜 싸울 만 하면 꼭 기절하니?”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데요..”
“일부러가 아니라도 네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그래.”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 우리가 싸운 녀석들이 다 너보다 영력이 셌지?”
“네.”
“그건 마치 해를 정면으로 보는 것 같은 거야.”
“그게 무슨..?”
“우리가 해를 눈을 크게 뜨고 바로 보면 눈이 부시고, 시리고, 머리까지 아찔해지잖아.”
“네.”
“근데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신경을 쓰면 그래도 볼만해 지거든.”
“아..!”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러니까 주의를 기울이라는 거야. 그럼 최소한 기절은 안 할 테니까.”
기를 곧추세우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중간 지점의 가게들 사이를 지나가게 되었다. 허름한 식당, 식당 옆에 대충 지어둔 창고, 낡은 개집과 그 앞에 묶어둔 잡종개, 그리고 작은 기념품 가게. 호우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곳이 지나다가 문득 드는 느낌이 있어 발길을 멈췄다. 주변의 암령들도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너도 느낀 거야?”
-그렇다.
우리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념품 가게로 들어섰다.
*
오늘도 주문이 세 건이나 들어왔다. 역시. 난 대단한 것 같다. 이제 곧 꿈에 그리던 페라리를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를 우습게 보던 그 잘난 아버지도 날 인정할 수 밖에 없겠지. 아니, 요즘 시대에 누가 그렇게 구식으로 사냐고? 이렇게 인터넷 쇼핑몰도 하고 관광지에서 사람들과 장사도 해야 돈도 굴러 들어오고 사람이 촌스러워 지지 않는 건데.
오늘은 하루 종일 가죽에 기름을 먹이고 염색을 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관광객들에게 팔 열쇠고리도 스무 개 정도 만들었다. 요즘 사람들은 손으로 만들었다고 하면 그냥 돈을 막 더 준다. 예전엔 공장 물건이 최고라고 하더니 이제는 핸드 메이드라고 하면 최고란다.
오늘 하루 종일 기름먹인 가죽은 내일 핸드백을 만들 것이다. 아가씨들이 많이 주문하는 가방은 사첼백이라는 것인데 꼭 등에 매는 책가방을 작게 줄인 것 같았다. 난 동그란 가방을 맨 여자가 예쁘던데. 뭐, 내 취향이 중요한 것 아니지만.
이번 여름에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일일 공방을 차려볼까 한다. 이제 홈페이지에 손님도 제법 오니 공지로 신청을 받으면 다들 여행 삼아 찾아 올 거고, 그럼 난 또 돈을 벌겠지! 페라리도 사고! 여자도 꼬시고! 서울로 올라가서 부티 나게 살 생각만 하면 온 몸이 짜릿짜릿하다. 벌써 이번 달에 백만원을 벌었으니 이제 곧 꿈이 이루어 질 것 이다!
아, 벌써 날이 어두워 졌네. 이제 가게 문을 닫고 집에 가야겠다. 아버지 얼굴은 꼴도 보기 싫지만 일단은 같이 사니까 어쩔 수 없지. 근데.. 저 앞에 웬 여자가 있네? 얼씨구, 그 옆엔 백호? ..백호?!
*
문을 열고 들어서자 널찍한 테이블 위에 늘어 놓은 물건을 정리하고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 호우에게 성큼성큼 다가 왔다.
“백호를 실물로 본 게 도대체 얼마만이야!”
그 남자는 거리낌없이 호우를 잡고 마구 털을 비볐다.
“..이 백호가 보이세요?”
내 질문에 그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갑자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저기, 열쇠고리 사러 오셨나요?”
-인간, 내가 보이지?
“아니? 안 보이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호우는 그 남자의 다리를 한 바퀴 돌며 냄새를 맡았다.
-모피상이다.
“아냐! 아니야! 난 모피상 아냐! 난 그런 거 안 해!”
“그런 거? 뭐야, 당신! 뭘 알고 있는 거야?”
“아, 아냐, 몰라, 하악.. 여자 냄새!”
남자는 갑자기 얼굴이 상기되며 몸을 비비 꼬았다. 순간 여자답게 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정말 모피상이 뭔지 모르세요? 아이참.. 여기까지 왔는데..”
내 바뀐 목소리에 호우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은호는 내 뒤에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별반 차이는 없을 것이다. 나는 무릎을 구부리고 양 팔을 한껏 당기며 가슴을 모아 보았다. 오늘 다행히 민소매를 입고 왔다. 가슴이 많이 파인 옷은 아니었지만 이정도 몸을 구부리고 팔을 모았으니 약간은 가슴골이 보일 것이다.
“아, 아니, 알긴 아는데, 아니, 모르, 아니 아는데,”
남자는 더욱 당황해 팔을 휘저었다.
“어휴, 어쩌지.. 그럼 도로 가야 하나..? 모피상 집에서 하루 자고 가려고 했는데.”
“그, 그래?! 내가 알아! 난 아니지만!”
“그럼.. 안내를 부탁 드려도 될까요?”
나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팔짱을 꼈다. 그러자 남자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말을 더 더듬었다.
“가, 갑, 갑시다! 가, 가요!!”
황급히 가게 문을 잠그고 나를 안내하는 남자를 호우와 은호가 따라 왔다.
-꼴불견이다.
“그러게요...”
이 남자는 모피상일 것이다. 아니, 모피상이 아니라도 분명 모피상의 혈족일 것이다. 그 증거로 아까부터 사방에서 느껴지던 암령의 기가 깨끗이 사라졌다. 운이 좋았다. 이 남자를 만난 덕분에 모피상도 손쉽게 찾을 것 같았다.
가게에서 나와 산으로 계속 들어갔다. 남자는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하하, 제가 좀 가죽을 잘 만집니다. 그래! 가방을 만들어 드릴까요? 안나씨의 빨간 입술과 아주 잘 어울릴 붉은 가죽이 있습니다.”
“어머, 너무 좋죠!”
계속 웃으며 맞장구를 치니 온 얼굴에 경련이 일 지경이었다.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눈치도 없고 여자도 밝히는 피곤한 스타일 이었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은근슬쩍 팔 안쪽을 만지거나 허리춤을 만지려고 하는 통에 온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 골이 지끈거렸다. 차라리 악령을 때려 눕히고 말지.
그렇게 두 시간 가량을 걸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기척도 못 느끼는 사이에 어떤 집 앞에 도착했다. 그 집은 제법 큰 한옥이었다. 딱 보기에도 오래 전 지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이 산골에 이만한 집을 짓기가 쉽지 않을 텐데.
“아버지, 저 왔어요.”
남자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인사를 했다. 그러자 안에서 산을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이 썩어빠진 놈! 어딜 또 쏘다니다 기어들어오냐!”
갑자기 한 구석의 문이 열리더니 수염이 덥수룩하고 풍채가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건장한 모습의 노인이 뛰어 나왔다.
“이 빌어먹을 자식!!! 언제까지 허파에 바람 들어 지낼 거냐!!”
노인은 순식간에 남자를 메다 꽂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내가 옆에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바닥에 나뒹군 남자는 지지 않고 일어나 같이 덤볐다.
“지금 제 여자친구 앞에서 뭐 하는 짓이에요!!!!!”
“여, 여자친구? 언제부터? 누구 맘대로?”
남자는 갑자기 온 몸의 기를 돋구는가 싶더니 주변에 회오리 바람이 불어 남자를 감쌌고, 순식간에 상체가 곰으로 변했다. 수령술(獸靈術)이었다.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이 덜 떨어진 놈! 낳아주고 길러준 애비한테 대들어?! 게다가, 나이가 벌써 서른인데 아직도 윗몸밖에 못 바꿔?!?!"
그 모습에 노인도 같이 화가 나 기를 돋궜다. 더욱 거센 회오리가 불어 눈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노인은 온 몸이 다 곰으로 변했다.
순식간에 한옥집 마당은 싸움터로 변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뒤로 물러 섰다. 도저히 끼어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 보는 수령술에 입이 딱 벌어졌다. 호우와 은호도 나와 같이 마당 한 켠으로 물러 났다.
펑!!!
펑!!!!
퍼펑!!!!!!!
두 부자간의 싸움은 치열했다. 아니, 치열해 보였다. 서로 몸이 닿기도 전에 강한 기운들이 부딪혀 터지는 소리를 내었다.
아버지가 아들의 팔을 치면 아들은 피해서 아버지의 등을 쳤고, 그러면 또 아버지는 기를 돋궈 아들을 튕겨내며 흙보라를 일으키는, 그야말로 구경거리
인 싸움이었다. 하지만 신기한 건 그러면서도 둘은 서로의 급소는 치지 않았다. 하지만 딱 보기에도 아들의 힘이 현저히 부족했다.
아버지는 싸우면서도 싸움을 통해 아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내가 네 놈을 잘못 키웠구나!!”
곰으로 변한 노인은 아직 사람의 형태인 아들의 다리를 잡고 번쩍 들었다. 그러자 키가 작은 아들은 거꾸로 매달려 버둥거리다 갑자기 변신을 풀고 사람으로 돌아왔다.
“아, 아야!! 아파요!! 그만해요!! 이 노인네가 미쳤나!!”
“하나뿐인 아들이라 오냐오냐 해줬더니 이 놈의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노인은 아들을 바닥에 패대기 치고서야 다시 사람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서로 씩씩거리기만 할 뿐 더 말이 없었다.
“얼른 들어가 밥이나 쳐먹어!”
“안 먹어요!”
“왜 안 먹어!!”
“아, 먹었으니까요!!”
“저 팔병신 계집애랑 백호랑 떨거지는 뭐냐?!”
“제 여자친구라니까요!!”
아들의 말에 노인은 성큼성큼 다가와 내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이 덜 떨어진 놈! 이 계집애가 네 여자친구라고? 딱 봐라! 이마에 제령사라고 쓰여있다, 이 놈아!”
노인은 커다란 주먹으로 아들의 머리를 거세게 쥐어 박았다.
“씨이.. 여자친구인데..”
“어이고, 백호가 제 발로 기어 들어왔네? 그리고 이 놈은 쭉정이고.”
노인은 은호를 보는 둥 마는 둥 지나쳐 호우의 목덜미를 들어 올리려 하자 호우는 화들짝 놀라 뒤로 펄쩍 뛰고는 털을 낱낱이 세우며 쩌렁쩌렁한 소리로 위협적인 포효를 내뱉었다.
“얼씨구? 피하네? 제법 쓸만하겠는데? 거기, 아가씨. 이 놈 팔려고 온 거요? 그럼 값 잘 쳐주고.”
노인은 입맛을 다시며 씨익 웃었다.
“어르신, 어르신이 모피상이십니까?”
나의 진지한 질문에 노인은 웃음을 거두고 손으로 입을 싹 닦았다.
“무슨 부탁을 하려고 찾아 온 거요? 일 없소. 난 이제 손 뗐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제 모피상을 안 한다는 말이오.”
<계속>